troye sivan
개인적인 것은 공감 위에서 사회적으로 감상을 공유한다.
예술은 특히 그 프라이빗한 경험을 불특정 다수에게 표현하고, 공감을 얻을 수 있는 표현이다. 트로이 시반은 for him. 이라는 곡이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제목을 소문자로 표기했다고 말했으나, 그가 써내려 간 그만의 감성은 상대에게 그 감정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의 덩어리 진 이야기가 된다.
그만이 가지고 있던 감정은 음원으로 공개된 순간부터 화자와 청자가 바뀌어도 그럴듯한 고백으로 변해 버리고는 한다. 그의 뛰어난 표현력은 사람들의 추상화된 경험 기억 속 감정만을 불러일으키고, 그 비슷한 감정의 결을 노래 가사에 녹여 낸다.
최근 며칠, 혹은 몇 달, 어쩌면 평생에 걸쳐 나는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지금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새삼스럽게 인생이 싫어졌거나, 나 자신을 부정하고 싶어졌거나, 모두가 싫어져서라기보다는 흥밋거리로 각색되어 소문이 된 상황에 대한 피곤함과 믿었던 상대에게 느끼는 배신감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 겪은 일이지만 보이는 곳에서, 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에 대한 이야기를 전시하는 이에게 보살을 자처할 수는 없었다. 무례하다느니 나도 상대에 대하여 입을 열 게 많다느니 생각하며 떠오르는 것들을 커뮤니티에 산발적으로 나열하고 싶던 나에게 이 곡이 신기하게도 브레이크가 되었다. 또 나와 이런 경험을 공감할 사람들이 어딘가에는 있겠지, 싶은 생각만으로도 나는 이 분노를 뭉뚱그려 정리하고 싶어졌다.
객관적인 사실 역시 한쪽 시선으로만 들으면 치우치게 된다. 아무리 공정하려고 하더라도 속내를 유추하는 것과,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 자신의 편을 들지 않기를 바란다며 익명으로 상황을 간추려 주는 친한 친구의 이야기에서도 그 친구가 어느 쪽 입장인지 서너 마디 만에 알 수 있었다.
내가 화가 난 부분도 그것이었다. 자기가 느끼고, 자기가 판단한 것을 기조로 하여 남에 대해서 쉽게 말하고 다니는 사람과, 그것을 들으며 그의 입장에 몰입할 모르는 사람들과, 사람들이 편을 들어줄 때마다 자신의 합리화를 더 공고하게 할 그 사람과, 그럴 사람에게 그럴 만한 것들을 여태까지 말해 왔다는 나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이 맞물려 억지로 눌러 오던 자기 혐오에 시너지를 냈다. 이성적으로 굴었다면 피하는 게 맞았을 시그널들도 앞다투어 머리에 떠올라 심장이 뻐근했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바꿀 수는 없고, 게임이 아닌 이상 인생이나 여태까지 맺어 온 관계를 리셋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얻는 것보다 포기하는 게 더 많은 선택지에서 즉흥과 충동을 선택하는 것은 쉽지 않다.
현실에 뿌리를 내린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 주인공과는 다르게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지만, 또 안온한 바운더리 내에서 노력하는 것 역시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조금 더 강력한 액션을 취하고 싶다가도 책임져야 할 것들이 밟히고는 한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말은 아이러니하게도 주어진 상황에 충실한 선택을 직접 했다는 말이 된다.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선택지를 쟀을 때 무게감이 천지 차이였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잠적 대신 겨우 닿지 않을 글을 브런치에 적으며 감정을 정리하는 것을 선택한 나 역시 나의 선택권을 놓친 적은 없는 것처럼 말이다.
타인의 시선에 어떻게 보이는지에 무감해지려 노력해 온 시간들은 자랄수록 사회화되는 자아와 충돌하여 종종 헤게모니 여탈전을 벌인다. 감정은 강렬하지만 시간은 그보다 더 두텁다. 바래지고 흐려질 경험을 다른 이들의 공감을 매개로 조금이라도 오래 지속시킬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더 크지 않을까.
머리가 어지러워 글의 전개가 전혀 매끄럽지 못하지만, 타인의 오해와 소문에 분개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뭉툭한 가시의 길도 있음을 공유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