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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르다 Oct 12. 2021

로맨스가 필요해

체육관 7시

나의 첫 남자 친구와 손을 잡은 건 만난 지 육 개월 만이었다.

"우리 오늘부터 사귀는 거다?"라는 유치한 확인을 한 적이 없어 정확히 며칠만 인지는 몰라도,

한 육 개월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

'오늘 저녁 7시 체육관 앞 계단에서 봐.'

-

사실 며칠간 작은 말다툼이 있었는데, 그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늦은 오후에 만나기로 했다.

약속 장소는 집에서 버스로 삼십 분 거리에 있는 체육관이었다.

왜 하필 체육관이었는지, 이제는 물어볼 수도 없고, 그럴 이유도 사라졌지만 아무튼 체육관 앞 7시였다.

-

그때 나는 한산해진 체육관 계단에 서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며칠 동안 그 애와 옥신각신했던 일을 되짚어보며 아마 오늘 헤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참 번거롭게도 나를 체육관까지 불러냈구나'

그러다 멀리서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그 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애의 표정은 웃는 듯, 화난 듯 표정을 읽어보려 해도 알쏭달쏭했다.

아마 본인도 무슨 기분인지 헷갈렸을 것이다.

그때는 서로 모를게 많은 나이였다.

그날은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

멀리서 야구 배트에 공이 깡. 깡.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 애와 나란히 걸으며 나는 이따금씩 들리는 야구공 마찰음에 어색한 마음을 의지했다.

나에게 따지듯 물으려나, 그럼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차에 차갑고 마른 내 손이 살짝 잡히는 기분이 들었다.

-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불편하지 않은 무력감이었다.

차가운 손 끝에 조심스럽게 걸린 따듯함은

나를 정면만 본 채 계속 걸어가게 만들었다.

깡. 깡. 야구공이 부딪히는 소리만 들으며.

-

그날을 생각하면 무슨 대화를 했는지, 어떻게 집으로 돌아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야구공 소리와 계단을 착착 밟고 올라오던 알쏭달쏭한 표정과 너무 차가워서 부끄러웠던 내 손만을 기억한다.

-

나는 그 아이가 그립지는 않다.

할 수만 있다면 (아마 그럴 테지만) 살면서 마주칠 일이 없기를 바란다.

그저 작은 일에 설레고, 이렇듯 처음 손잡는 것을

'작은 일'이라고 치부하기 이전의 나를 가끔 그리워할 뿐이다.

불안하고 차가웠던 손은 다행스러운 추억을 입은 채

적당히 무디고 따듯한 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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