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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뒤셀도르퍼 Oct 30. 2020

조각 빛에 빚지다

1.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빛을 조절하는 일입니다. 세 가지 조임쇠를 조이고 풀면서 빛의 양을 적절히 조절해야 하죠. 그래서 카메라를 드는 법을 배우자마자 처음 배우는 것이 노출을 조절하는 것입니다. 빛이 적은 곳에선 삼각대를 세워 한참을 기다리기도 하고, 팡 터지는 플래시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흔들린 사진, 거의 피사체가 보이지 않는 결과물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점이 눈과 다른 부분입니다. 밤에 불을 끄고 한참을 있다 보면, 아주 작은 빛에도 눈은 많은 것을 인식할 수 있어요. 하지만 내 눈으로 본 것을 찍고 싶어 카메라를 들면 까만 화면만 가득하죠.


2.

잠들지 못한 밤 그래서 조용히 밖으로 나서는 밤. 나는 달빛에 반짝이는 것들을 봅니다. 카메라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두 눈으로 봅니다. 가늘게 흔들리는 마음으로 예민한 밤. 그 밤에는 삼각대도 부담스럽고, 플래시도 기피하게 됩니다. 어둠 속에선 자동 초점도 의미가 없어요. 렌즈보다 밝은 눈으로 초점을 맞추고, 셔터를 살짝 누릅니다. 표시창에 뜬 1초. 괜히 숨을 잔뜩 들이마시고, 카메라를 꼭 쥔 채 셔터를 누릅니다. 탈-칵.


3.

낮도 밤처럼 느껴지는 날이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어제도, 어제의 어제도 그랬어요. 빛이 창가로 스며드는 데도 마음은 여전히 깊은 밤에 빠져 있는 것 같은 날이었습니다. 그렇게 온통 밤인 날이 늘어가면, 몸도 반응을 합니다. 괴로웠어요. 나만 해가 뜨지 않는 세상에 사는 것 같았으니까요. 꼭 아무 생각 없이 찍은 밤 사진처럼 그저 까만색이었습니다. 해가 뜨지 않는 마음이라고, 사진으로 보여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밤의 고요함이 입마저 막아버려, 침묵한 채 침잠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아침을 기다릴 여유도 없이 어둠의 일부가 되어가는 것처럼.


4.

괜히 들이 마신 숨은 오히려 악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1초도 채 버티지 못한 숨이 새어 나오면, 떨림이 사진에 드러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천천히 숨을 고르고 다시 자세를 잡습니다. 초점이 흐트러진 것 같아, 다시 한번 눈을 믿고 초점을 잡습니다. 매 순간 쉬는 숨이 어째서 이리 크게 느껴지는지 파인더를 보고 한참을 망설입니다. 들이마실 땐 흔들리니까, 아주 천천히 내쉬는 순간을 노려봅니다. 다시 한번 탈-칵.


5.

가까운 듯 먼 사람이 있고, 먼 듯 가까운 사람이 있습니다. 낮과 밤이 일정하던 날에는 우리 사이의 거리를 명확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밤에 빠지고 난 다음에는 초점 시스템이 고장 난 사람처럼 위잉-위잉 거리를 놓치고 맙니다. 그래서 가끔 멀찌감치 있던 내가 바짝 붙어 있기도 하고, 살갑던 우리가 부쩍 멀어지기도 하는 겁니다. 당혹스러운 마음에도 그저 그 자리를 지켜줘서 고마운 마음입니다. 어쩌면 그 틈에 당신들은 내게 머무는 밤을 엿보았을지도 몰라요.


6.

탈-칵 소리가 끝나고, 화면에 뜬 사진을 봅니다. 사진 속에는 어둠에 다 묻혀버리지 않은, 눈으로 본 풍경이 나타납니다. 주변에 빛이 닿지 않아 더 반짝이는 것만 같은, 미세하게 요동치는 것 같은 사진입니다. 그리고서 깨닫는 것은 이 밤에도 조각 빛이 우리에게 닿아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날은 달빛이, 또 어떤 순간에는 지나는 차의 헤드라이트가, 어떤 공간에는 가로등이 닿아 있습니다.

당신 그리고 또 다른 당신은 밤에 머무는 내게 가볍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시답잖은 안부를 묻기 위한 전화 한 통이, '기분은 어떻냐'며 살피는 기색이 역력한 문자 한 통이 밤을 비추는 조각 빛이 됩니다. 1초가 빛을 모아 내가 본 밤의 순간을 기록할 수 있는 시간인 것처럼, 한 번의 안부 인사가 어둠 속에서 생을 인지하는 시간을 건네줍니다.


7.

그 밤의 사진은 달빛에 빚을 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건넨 조각 빛에 의지한 빚을 지고 있습니다. 빚진 삶으로 내일은 마음에도 해가 들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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