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색채의 대비 안에서 발견되는 현대의 고독
요즘 시대만큼 미술관에 가는 것이 겁나던 때가 언제였던가.
어떠한 작가의 그림을 감상한다는 것은, 그려낸 그림이 묘사하고 있는 대중적인 호소력과, 그 대상을 그려내는 한정된 화풍의 표현력을 감상하는 것이다. 우리는 학창시절의 미술시간에 물감과 재료를 놀리는 법을 배웠고, 미술 교과서에 실린 낙서같은 그림 마져도, 나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간들 사이에 있는 고릴라같이 미개함이라는 것이 우직하게 존재함을 자각하게 된다.
그러한 미술 교육 덕택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그 비루한 실력을 기준으로 작가와 그렇지 않은 사이비를 감별해야겠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현대 미술은 안타깝게도 그런 기준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어떨때는 사진인지 분간이 안가는 그림들이 걸려있기도 하지만, 대체로 현대 미술이 될수록 내가 해봐도 이것보다 낫겠는데? 하는 도전정신과 자신감이 충만하게 하는, 막눈에게는 사이비 같은 작품들이 수두룩 빽빽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모처럼 온 미술관에 걸린 이 그림이, 대충 물감을 닦아낸 것인지, 실수로 흘린 것인지 알수 없는 낙서같은 것을 보면서, ‘오.. 이 그림은 이런 뜻이구만’ 하며 이해하는 척 하는 새로운 자신의 연기 재능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대중에게 유명한 그림들은 표현이 익숙하고 예쁘게 구성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대중이 별도의 배경 정보가 없더라도 ‘무엇을 그린 것인가’라는 인식이 될 수 있어야 쉽게 다가갈 수 있다. 현대 작품으로 올 수록 작품 자체보다, 그 작품이 태어나기까지 과정과 작가가 해온 행적, 작가의 세계관을 모두 이해하고 있어야 작품을 온전히 의도를 찾아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새로운 작가를 발굴해내는 역할을 가진 큐레이터들의 역량은 얼마나 전문적이어야 하고, 신뢰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곤 한다.
이 전시는 정말 좋은 작가가, 정말 좋은 예술을 한 것인가? 아니면 쓰레기를 감별할 수 없는 나에게 아무거나 안겨준 것인가? 나는 이 그림에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면, 나의 심미안은 쓰레기인가? 우리가 미술관으로 방문할 수 없는 주요 이유는 바로 그림의 감식을 할 수 없음으로 인해 스스로의 능력과 역량이 판별된다는 공포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David Park의 전시는 다행히도 우리의 전통적이고 직관적인 감상 방법만 가지고서도 읽을 거리가 많은 전시다. 얼마나 감사한가!
샌프란시스코의 MoMA는 코로나로 인해 문을 닫았다가, 회원만을 위해 예약제로 잠시 열었다. David Park전은 이 코비드 상황이 벌어지기 이전에 전시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Lock Down이 시행되고 나서, 제한된 사람들만이 감상을 할 수 있도록 해두었기 때문에 무척이나 쾌적한 감상이 가능했다. 공간에 사람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뒤 따라오는 행렬을 신경 쓰지 않고, 그림 코 앞까지 가서 세세히 즐겨볼 수 있는 모처럼의 전시였다.
David Park의 전시는 그 한계도 존재하지만, 작품에서 감지되는 작가의 예술적 표현 역량을 감지하고 발견해내는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는 전시다. 사진만으로는 감지하기 어려운 유화 물감의 두께로 제작 과정을 가늠케 하는 부감이 전달된다. 굵직하게 비벼진 선명한 붓 자국. 망설임 없이 표현된 강한 대비, 밝지 않은 색상을 두껍게 붙여놓은 유화물감 덩어리에서부터, 예술가가 수많은 시간 동안 제련한 단순하고 분명한 표현의 기법에 경탄을 하게 한다.
전시는 초기 작품과 말기작품을 중점적으로 보여주는데, 초기 작품에서 일러스트레이터 같은 대중적 표현력에서 작가가 보여주는 다소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유쾌함이 뭍어나면서 동시에 왜인지 모르지만 남미 회화의 느낌이 주는 과장이 함께 녹아있다.
그러나 그의 후반기 작품을 보면, 마치 같은 작가가 아닌 것 같은 화풍과 시선의 격랑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러한 변화가 가지고 오는 큰 울림이 그림마다 전달되었다. 전후 세계 미술에서 주로 발견할 수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즉 구상적 표현이지만, 의도적으로 혼란을 야기하고 거기서 오는 감상자의 감정적 불편함을 통해 강렬하게 인상을 남기는 것이 그 시대 흐름이었다.
작가의 초기 작품들을 보면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당시의 입체파들의 시도처럼 공간감 보다는 분위기 전달에 더 애를 쓴 모습이다. 시간이 더 흐르면 과감히 생략된 선과 표정에서 이후 미국의 많은 일러스트 작가들이 차용한 간결화된 인체 묘사의 양식들이 발견된다. 곱게 구성한 색과 명암의 부조화들은 가까이서는 표현양식의 아쉬움이 보이지만 한발짝 떨어져서 보면 포근하고 다정한 붓터치의 느낌을 갖게 한다. 희노애락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묘사들은, 오히려 현실적으로 일상화된 감각을 담아낸다. 놀라움을 위해 놀라워 하는 표정을 그리는 것보다, 그 정황을 그려내는 것이 더 수준높은 표현이듯. 아이가 엄마의 머리를 끄집어 몸을 밀착시키는 자세에서 표정보다 더 한 일상적인 모성의 장면을 보여준다.
조금 더 둘러보면, 상황의 무덤한 묘사를 통한 감정의 전달을 시도한 다른 시리즈들이 보인다. 전시 한 켠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스케치를 기반으로 한 판화들이다. 간결한 터치와 과감한 생략, 색상들의 다이내믹스를 기반으로 하는 독특한 역동은 화면 밖으로 나가는 역동이라기 보다 캔버스 안에 모듬은 둥그런 형태로 정리가 되어 있다. 성서의 주요 사건들을 묘사한 판화들은 단순화된 색채와 둥그런 다이내믹을 통해 화풍의 장식성을 배가했다.
미국의 현대 구상화 특히 인물화와 풍경화들을 보면, 강한 햇빛과 그 아래 드리워진 그늘 사이에 존재하는 묘한 우울감에 대한 표현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뭐라고 딱 집어서 이야기할 수 없지만, 우리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묘한 긴장감과 극적 대비에 의한 외로움을 David Park의 전시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단 몇 스트로크로 보이는 표정에 대한 묘사, 성의 없고 낯선 붓터치로 마무리한 듯한 등장인물의 포즈와 상황 묘사는 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현실적이면서도 현실을 벗어나버리는 공기들을 압축해서 담아내고 있다.
화풍이 놀랍게도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관통하는 작가의 관점은 감정을 붙잡기 위해 표정과 묘사에 기교를 집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얼굴보다는 자세로, 자세 보다는 배경 구성으로, 색채와 붓자국에서 종합적인 분위기를 감자하게 한다. 얼굴과 색채의 불확실한 묘사가 오히려 상황을 이해하게 하고, 쉽게 말할 수 없는 어색한 공기를 표현하게 한다. 불친절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캔버스에서 튀어나오는 현대인들의 우울을 뭉그러진 익명의 얼굴과 육체의 포즈로 표현한 점은 이 작가가 도달한 표현력의 깊이라고 할 수 있겠다. 누구인지 알 수 없고, 읽지 못하는 표정에서도 우리는 시간대를 넘어 남겨진 그 감정에 공감하게 된다. 생활의 우울의 흔적이 그림에 조금만 남아도 우리는 예민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