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니까 변하는 거다
생의 시기마다 필요한 옷이 있고 어울리는 색과 취향이 있듯이 삶의 체형도 맞게 인연도 변해간다.
- 싸울수록 투명해진다 | 은유 -
자기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 사람. 누구나 이런 지인 한두 명쯤 가진다. 나도 있다. 그들이 연락할 때는 둘 중 하나다. 인생 하소연을 쏟고 싶거나 부탁하거나. 보통 좋고 신날 때는 연락두절이다. 힘들 때 전용이라고 해야 되나?
자기 필요가 우선인지라 나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그저 잘 들어주고 부탁을 처리할 사람이 필요한 거다. 그러니 내 병명도 임의 변경되고 서너 번 말해 준 것도 수시로 다시 묻는다. 때론 요청한 적 없는 조언도 날린다. 좀 웃기다. 뭘 조언하려면 알아야 되는 거 아닌가.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니 슬슬 짜증이 난다. '넌 뭐냐? 주고받는 거 모르니?' 지인이 알려준 하나하나 기억하는 나도 싫다. 이러니 연락에 날 선 반응이 나간다. ‘또 뭘 하소연하려나?’ 혹은 ‘뭐가 필요한 거야?’
슬며시 건성건성 대답하고 몇 개는 무시 한다. 그러다 인연인데 싶은 죄책감으로 다가서면 여지없이 반복된다. 남에게 짜증이 반복되면 나는? 이라며 들여다본다. 과연 나는 다른가? 나도 뜸하던 지인에게 연락한다. 그의 필요가 아니라 내 필요에 의해서.
살며 정확히 반반씩 주고받는 건 어차피 불가능하다. 사는 거 치킨 반반이 아니잖는가. 더 주는 곳 있으면 더 받는 곳도 있다. 그러니 약간 손해 보듯 사는 것도 맘 편해지는 방법 중 하나다. 속 끓여야 상대는 모른다. 날 선 반응에 ‘왜 그래? 안 좋은 일 있어?’라는 응답이 돌아온다. 여태 참다 짜증을 쏟는 상대를 되려 어리둥절해한다.
잔잔히 품으면 얼마나 좋겠냐만 잘 안된다. 손해 보리라 맘먹고 눌러도 삐죽삐죽 나온다. 사람이잖나. '내가 잘못 사나'부터 '사람을 잘 못 봤나'까지 오만가지 질문이 맴돈다. 그러다 문득 너무나 자연스러운 거에 변치 말라고 내 고집을 피우나 싶더라.
관심은 강요할 순 없다. 나를 봐달라 한들 볼까? 앙갚음하듯이 돌려주마라고 해봐야 진 빠진다. 그러니 인정하고 내려놓으면 어떨까 싶었다. 그저 '저 사람보다 내가 좀 더 관계에 진지했구나’라고. 살면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던가. 변화를 인정하면 ‘너 뭐냐?’에서 ‘그런 거지 뭐’가 되고 나중엔 ‘아.. 너 아직 있었구나’가 된다.
혈족 사회가 해체되어 가지만 여전히 오랜 우정, 끈끈한 관계에 집착한다. 유독 길고 오래된 관계에 자랑스러워한다. 진지하고 괜찮은 사람이라는 보증 수표가 같다. 글쎄, 과연 그럴까?
나무가 헐벗는 겨울이다. 저 나무에 저리 잔가지가 많았나 싶다. 자세히 보니 아랫부분엔 잔가지가 없다. 계속 잔가지를 들고 살았다면 나무가 컸을까? 성장은 둘째치고 바람과 눈비의 무게로 잔가지를 쳐내야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사람이라고 다를까. 시간에 따라 환경에 따라 인연은 맺어졌다 끊어진다. 못내 아쉬워 부여잡으면 잡힐까? 아니, 그리 다 부여잡으면 과연 살 수 있을까? 아쉬워도 남겨두고 들어와도 내치지 말고. 인연의 옷을 갈아입으며. 이리 사는 거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