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허락하면 되는 문제
2021년 1월(2022년의 오타가 아님.), 서른 다섯살의 새해를 맞이하며 나는 글쓰기에 대해 작은 결론을 내렸다: 사는 동안 쓸 수 있는 데까지 써 볼 가치가 있다. 심지어 먹고 살기의 수월함을 약간 희생하더라도. 왜냐면 쓰는 삶은 그 자체로 좋은 시간이니까.
반환점까지 오고 나니 삼십대는 그럭저럭 자신에 대한 데이터가 쌓여 하나 둘 작은 결론들이 내려지는 시기같다. 어린 날의 꿈을 점점 잃어가는 어른됨에 대한 수 많은 회한의 노랫말과 경구들을 이해하게 되는 한편, 솔직히 그게 뭐 대수냐 싶어지기도 한다. 가능성의 소멸은 일면 다행스럽다. 점점 복잡하게 갈래쳐가는 생활의 틈바구니에서 그나마 삶은 좀 더 명확해지니까. 인생에서 갈팡질팡하며 크게 원 하나의 궤적을 그려내고 이제서야 비로소 자기 그릇에 맞는, 지름이 더 작고, 경로가 덜 갈팡질팡하고 더 깊이 가는 두 번째 원을 그리는 시작점에 다시 선 것 같달까. 또 다시 시작이라는 게 약간 막막하지만 갓 태어난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 기억은 안나지만 자궁에서 갓 빠져나와 어둠 속에서 울부짖는 일은 이보다 훨씬 고통스러울 것 같다.
아무튼 이 다짐 비슷한 결론에 멈춰 서기까지 많은 외부 피드백의 공헌이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드문드문 글을 더 써보라는 격려를 해줬던 것이다. 이런 말들은 이십대 때까지 별 효력이 없었다. 오히려 누군가 지나가는 말로 글쓰기에 관련된 직업을 권하거나 칭찬이라도 던지면, 다급하게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냥 지나가는 말일 뿐이야. 저 사람은 뭘 몰라. 너는 글로 먹고 살만큼 잘 쓰진 않아. 작가나 기자나 아무튼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어.’ 글쓰기의 신이 꿈에 찾아와 너는 작가가 될 운명이라며 찬란한 계시를 내려주고 그 증거로 잠에서 깼을 때 초능력 같은 거라도 생겨나있지 않는 이상 계속 그럴 생각이었다.
생각해보면 지극히 청년다운 오만함에서 비롯된 자기비하적 태도였다. 특별히 눈에 띄게 탁월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특별히 눈에 띄게 탁월하고 싶었단 얘기기도 하겠다.) 동시에 무던히 기능적일 자신도 없었는데, 무엇보다 계속해서 쓸 자신이 없었다. 어떤 장르의 글을 한 번 써보는 것과 계속 쓰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니까. 책임을 짊어지고 계속 해나가기엔 글쓰기는 너무 힘겨운 작업이었다. 잘 나가다가도 어디서 막혀버릴 지 예측할 수가 없고 늘 밤을 새게 된다. 게다가 다 쓰고 나면 처음에 쓰려고 했던 내용이 아닌 다른 종착지에 도달해 있었다.(물론 그게 처음에 생각한 것보다 더 낫기는 했다.) 써야하면 어떻게든 썼지만,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싶은 때 정확히 써 본 경험은 몇 번 없었다. 늘 마음에 안 찼고, 몇 번은 시간 내에 작성하지 못해 불이익을 보기도 했다. 글쓰기에 대해 나는 아마추어였고, 영원히 그럴 것 같았다.
그런 내게 당시 친구 Y는 이런 질문을 했다.
“희원아, 너는 글 쓰는 게 재밌어서 쓰는 거지?”
“재밌다는 게 무슨 뜻이야?”
“흰 종이를 글씨로 채우는 게 재밌어서 쓰는 거 아니야?”
Y가 그런 질문을 할만도 했다. 당시 나는 싸이월드 미니홈피 게시판에 지나치게 길고 사색적인 글을 써서 올리곤 했기 때문이다. 지극히 폐쇄적인 채널에 그런 글들이 올라왔으니, 내게 애정어린 관심을 갖고 있는 이라면 의아했을 것이다. 관련된 직업을 가질 것도 아니라면 대단한 즐거움과 자기만족이 있지 않고서야, 도대체 얘는 일기장에서 왜 그렇게까지 진지하단 말인가. 친구의 의문에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재밌기는 커녕 힘들었는데, 재밌지 않다고 한들 다른 설명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질문을 받으면 무조건 대답하려고 하는 성미는 좀 고쳐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예술의 신도 내가 글을 써야 할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시장도 반응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글을 잘 쓴다고는 말해도, 그러니 내 밑에서 뭘 좀 더 배워보라는 제안은 해도, 잘 쓴 글에 대한 댓가로 돈을 주마 하진 않았다. 붙을 줄 몰랐는데 의외로 면접까지 간 언론사들에서는 “글 잘 쓰는 건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다”라는 말을 듣고 떨어졌고, 딱 맞는 포지션은 아니지만 자기소개서가 너무 감명 깊어서 만나고 싶다며 면접 보자는 회사도 있었는데 결국 떨어졌다. 거기선 후에 자기네 컨텐츠를 무료로 보고 리뷰를 써줄 수 있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나는 무경력이었지만 원고비 책정을 요청했고 한 두 번 메일이 오갔다. 그리고 끝.
나는 거기서 더 시도하지 않았다. 거기까지도 얼마나 치사하게 갔는지 모른다. 절대 최선을 다하지 않으려고, 상처입지 않으려고 요행을 바라면서…그러니까 거기서 끝이었겠지. 근데 업이 되지 않아도 글쓰기는 그냥 인생에 남아있었다. 내가 하는 기본소득 활동을 설명하려면, 아직 우리에게만 의미 있는 주장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려면 글을 써야했다. 회사에 들어간 뒤로는 더했다. 기획안, 메일, 보고서, 홍보 카피, 회의록… 그런 거 다 글쓰기였다. 사회 생활의 틈바구니에서 부조리한 장면들을 마주치면 글로 써내려감으로써 그 부정적인 영향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가끔은 자신을 경멸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건 마음 아픈 과정이었지만 그럼에도 분명 나를 지키는 일이었다. 글을 쓰고 바라보는 것보다 더 나쁘고 아픈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종종 그냥 계속 썼다. 그러다보니 어느 날은 누가 이렇게 묻기도 했다. “희원님은 어떤 작가가 되고 싶어요?” 작가요? 또 누군가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넌 나중에 책을 쓸 거야.” 제가요? 이 모든 말들 이전에 이런 말을 몇 번이나 해 준 친구도 있었다. “너는 그냥 많이 쓰면 좋을 것 같아.” 이 말들은 나를 어리둥절해지게 했다. 어떤 당위도 이유도 없이 그냥 나의 글이 있으면 좋다는 이야기여서? 와 나에게 이런 환대를? 나이를 헛먹진 않았는지, 칭찬 앞에 동요하던 마음은 어느덧 사라진지 오래였다. 나는 순순히 고마워졌다. 그래서 고맙다고 하고 잊지 않으려고 그 말들을 적어두었다. 용기가 필요할 때면 꺼내서 읽었다. 읽고 싶다고 하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 이미 쓰는 사람으로 봐주는 이들이 있는 것. 그냥 그 두 가지가 나를 충분히 써도 되는 사람의 자리로 데려다주었다. 사실 그러고 나니까 탁월할 자신감이나, 계속 쓸 확신 같은 건 별로 필요 없어졌다. 무언가를 완성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점차 줄어들었다. 그냥 나만 허락하면 되는 문제. 단어를 쓰면 시작된다. 아무것도 되지 못해도, 나쁜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이 길지 않은 글은 2021년 1월에 적은 단어로 시작되었다가, 불현듯 1년 반이 지난 오늘 마저 쓰여졌다.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