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AI는 오래된 미래다
“그 조각상의 얼굴은 진짜 처녀의 얼굴 같았고…
그는 자신이 만든 존재를 기뻐하고 경탄하다 마침내 갈망하게 되었다.”
-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AI는 옛날이야기다. 오래된 미래다. 알파고나 챗GPT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앨런 튜링(1912~1954)이나 마빈 민스키(1927~2016)의 작품도 아니다. 인공지능과 로봇은 인류의 본능 속에 있다. 인간은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을 닮은 지능적인 도구와 존재를 만들고 싶어 했다.
이미 고대 그리스에는 탈로스 같은 로봇이나 피그말리온의 조각상 같은 특이점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곁에는 인간의 지능과 생각 방식을 탐구하는 철학자들도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에는 각종 알고리즘이 이스터 에그처럼 들어 있다. 시대마다 모습은 달랐지만, 인류는 본능적으로 지능적인 도구의 꿈을 꾸고, 그 시대의 안목과 기술로 최선의 것을 만들어 사용하며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다.
챗GPT와 생성형 AI의 파장이 계속되고 있다. 알파고도 충격적이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어디까지나 구경꾼으로서의 충격이었다. 하지만 챗GPT와 생성형 AI는 모두에게 경험의 충격을 주고 있다. 파장의 크기가 다르다. 여기저기 인공지능 이야기가 난무한다. 경탄하는 사람도 있고 공포를 느끼는 사람도 있다. 허풍도 많고 헛소리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AI가 신대륙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기술적 외양은 첨단일 수 있지만, 그 안에서 돌아가는 주요한 원리는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것들이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기술이 변할 뿐이다. 인공지능 분야는 더욱 그렇다. 인공지능 연구에 무엇보다 인문학적 통찰이 필요한 이유다. AI를 개발하는 사람들이나 AI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마찬가지다.
인공지능의 미래는 수학에 달려있지 않다. 인문학에 달려있다. 인문학은 인간을 연구한다. 인공지능은 인간을 모방한다. 둘은 함께 있어야 한다. 인문학 없는 인공지능은 인간 없는 인형의 양산으로 가게 된다. 허무한 풍선인형이 될 수도 있고, 자본가의 꼭두각시가 될 수도 있다. 영혼 없는 좀비가 되어 인간의 피를 빨고 다닐 수도 있다.
우리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1818)을 읽을 필요가 있다. AI의 오래된 미래를 알려주는 책이다. 위대한 고전이 그렇듯이 이 소설 역시 다양한 관점으로 읽을 수 있다. 산업화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도 있다. 흑인 노예, 여성,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와 이단자들의 고통과 몸부림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무엇보다 과학기술에 대한 이야기다. 과학기술에 대해 피상적인 경고를 날리는 수준이 아니다. 그랬다면 고전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경고를 넘어 통찰을 담고 있다. 미지의 존재가 인간 같은 생명과 지능을 얻얻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일들에 대한 통찰이다. “현대판 프로메테우스”라는 소설의 부제처럼 인간의 오랜 욕망과 그 결과들을 생각하게 한다.
고전의 힘이다. 고전 독서 교육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모티머 애들러 (1902~2001)는 "서양 세계의 위대한 책들(Great Books of the Western World)”을 선정하면서 여러 기준들을 말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시대를 초월해서 오늘의 현실에도 잘 들어맞는 책”이었다. 인류의 영원한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프랑켄슈타인>이 바로 그런 책이다.
소설은 로버트 월턴이라는 젊은 탐험가의 편지로 시작한다.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영국에 있는 누이에게 가는 편지다. 월턴은 북극을 통하는 항로를 찾는 모험을 하고 있었다. 무려 6년간 만반의 준비를 한 후에 배와 선원들을 구해서 꿈에 부푼 항해를 하고 있었다. 그는 자연을 탐험하고 지식을 얻고 싶은 욕망으로 불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나눌 친구가 없어서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북극을 향하던 배가 빙하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할 때, 월턴과 선원들은 멀리 썰매를 타고 가는 거대한 몸집의 사람을 보고 놀라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얼음 조각을 타고 표류하고 있던 또 다른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다. 피로와 고통에 지쳐있던 그의 이름은 빅터 프랑켄슈타인이었다.
얼마 후 월턴의 열정을 알아챈 빅터는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네는 옛날의 나처럼 지식과 지혜를 갈구하고 있군. 하지만 자네의 소망이 이루어져서 뱀처럼 자네를 물지 않기를 바랄 뿐이네. 내 경우는 그랬거든. 내가 겪은 재앙을 말해주는 것이 자네에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관심이 있다면 내 이야기를 들어보게.”
빅터는 월턴에게서 젊은 날의 자신을 보았다. 자신과 똑같은 욕망이었다. 위대하고 위험한, 지식을 향한 욕망. 빅터는 젊은 월턴이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를 바라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다. 첨단기술의 사회를 사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이야기다.
빅터는 제네바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좋은 친구들과 좋은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어느 날 연금술에 관심이 생긴 것을 계기로 자연을 탐구하는 과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대학에 진학해서 마음껏 탐구했고 단기간에 선배와 스승들을 따라잡는 수준에 이르렀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는 마침내 생명의 원리를 알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는 납골당과 시체안치소에서 숱한 밤을 지새우며 삶과 죽음 사이의 변화 과정을 파헤친 끝에 생명 발생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그는 멈출 수가 없었다. 비밀의 지식을 실제로 구현해보고 싶은 열망에 불타게 되었다. 과학의 원리와 기술의 응용은 서로를 부르는 법이다. 그는 인간의 몸을 재료로 사용해서 인간 같은 존재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여기저기서 시체 조각들을 모아서 인간 형태로 조립했다. 도덕과 인간 본성의 울타리를 걷어차고 끔찍한 일을 서슴지 않았다.
“그때는 저항할 수 없는 광기에 사로잡혀서 오직 앞만 보고 나아갔다. 내 모든 영혼과 감각은 사라지고 오직 이 한 가지 목적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사실 그것은 일시적인 최면 상태일 뿐이었다.”
그는 자연에 등을 돌리고 세상에 귀를 막은 채 실험실에서 살았다. 혐오스러운 작업으로 몇 달을 보내면서도 자신이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종(種)은 나를 자신의 창조자요 근원으로 찬양할 것이다. 행복하고 탁월한 수많은 본성들이 나로 인해 탄생할 것이다. 나만큼 자식에게 큰 감사를 받아 마땅한 아버지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시체 조각들로 조립된, 인간 아닌 인간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2.5m 크기의 거대한 존재였다.
프랑켄슈타인은 시체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서 주술이나 마법을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과학을 활용했다. 소설이 집필되던 무렵에 주목받던 갈바니즘(Galvanism)이다. 당시의 ‘첨단과학’이었다.
갈바니즘은 이탈리아의 과학자 루이지 갈바니(1737~1798)의 이름에서 따온 말이다. 그는 죽은 개구리의 뒷다리가 전기 자극으로 움직이는 현상을 발견했다. 그는 동물의 몸에 전기가 흘러서 생명이 유지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갈바니의 조카였던 과학자 지오바니 알디니(1762~1834)는 이것을 과감하게 인체로 확대했다. 사형당한 죄수의 시체로 실험해서 같은 결과를 보게 되었다. 이렇게 다른 과학자들이 실험에 동참하면서 유럽 전체에 갈바니즘이 알려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전기를 잘 이용하면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거나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분명히 과학적인 생각이었다.
물론 오늘날 우리는 갈바니즘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동물의 몸에 전기가 흐르는 것은 사실이다. 신경계의 전기 신호로 정보가 전달되고 근육이 제어된다. 따라서 죽은 직후에 동물의 시체에 전기를 통하게 하면 경련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잠시 뿐이다. 신경 세포까지 죽고 나면 경련도 없어진다. 다시 말해서, 전기가 있어서 생명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이 유지되어서 전기가 있는 것이다.
한때 과학으로 추앙받았지만 지금은 오류로 밝혀진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과학을 절대 진리로 생각하는 과학주의(과학만능주의)에 빠지지 않으려면 과학사(科學史)를 보면 된다.
AI에 대한 연구도 마찬가지다. AI 연구의 역사를 보면 너무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다. 당장이라도 인공지능이 가능할 것처럼 낙관했던 사례는 과거에도 많았다.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과학자로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던 허버트 사이먼(1916~2001)은 1965년에 “기계가 20년 안에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었다. 딥러닝 사례들과 챗GPT 등장을 전후해서 당장 AI 시대가 올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잘 살펴야 한다.
죽은 개구리 뒷다리에 경련이 있다고 생명체가 된 것은 아니다. 전기 충격은 뒷다리를 운동 범위 내에 잠시 움직이게 할 뿐이다. 데이터의 패턴 분석으로 생각 밖의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지능이 생긴 것이 아니다. 기계학습이라는 이름으로 예상 밖의 결과물을 출력하지만, 결국은 목적 함수의 범위 내에서 움직이는 경련의 일종일 뿐이다. 패턴은 지능이 아니다.
현재의 AI와 지능 사이의 거리는, 갈바니즘과 생명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멀다. 더 가까운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엄청난 자본과 데이터가 만든 착시 현상이다. 이세돌 한 사람과 바둑을 두기 위해서 1,000대의 컴퓨터와 고급 인력들이 매달렸다. 챗GPT는 수십억 달러의 자금으로 움직이는 시스템이다. 현재의 AI도 갈바니즘의 실험처럼 전기가 없으면 멈춘다.
그렇다고 이런 시도들이 다 부질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갈바니즘은 결국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지 못했지만, 오늘날 전기 충격으로 심장박동을 되살리는 응급처지법에 쓰이고 있다. 또한 갈바니즘이 촉발시킨 전기에 대한 관심과 논쟁은 건전지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계속적인 탐구를 통해 원래의 확신과 이론은 오류로 드러났어도, 그 과정의 산물들이 또 다른 발전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우연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행운이 아니다. 탐구의 과정에서 얻는 열매들이다. 열정이 있어야 우연도 생긴다. 열정이 있어야 우연 속에 있는 보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과학의 역사는 우연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AI 연구도 마찬가지다. 진짜 지능이 만들어지고 특이점에 도달하는 일이 없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얻게 될 열매들이 있다. 이미 데이터 분석과 다양한 알고리즘 모델들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의 AI 붐이 또 실패하고 긴 겨울이 온다고 해도 과정의 열매들은 여러 방식으로 계속 활용되고 발전될 것이다.
과학은 자연을 알고자 하는 욕망의 산물이다. 과학을 뜻하는 ‘사이언스(science)’의 어원은 라틴어 ‘스키엔티아(scientia)’로 ‘지식’, ‘배움’ 등을 뜻한다. 체계적인 지식과 앎 자체가 넓은 의미의 과학인 것이다. ‘자연과학(natural science)’으로 범위를 좁혀서 말하면 과학은 자연을 알고자 하는 욕망의 이야기가 된다. 과학 자체는 명확하고 냉정한 체제를 추구하는 것 같지만 실제는 다르다. 적어도 과학의 방향을 이끄는 사람은 욕망을 따라간다.
욕망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더구나 앎에 대한 욕망은 인간의 본성이다. 문제는 욕망이 머리가 되어 모든 것을 끌고 갈 때 발생한다. 브레이크 없는 폭주가 되는 것이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고 심지어 자신까지 망치는 일이 되어도 멈출 줄을 모른다. 모든 것을 정당화시키고 이성을 마비시킨다.
프랑켄슈타인의 욕망이 그랬다. 자연에 대한 경외로 시작했던 그의 탐구는 광기가 되었다. 경외는 탐욕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작업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장밋빛 환상으로 가득 찼다. 어떤 진실도 보지 못하고 어떤 충고도 듣지 않게 되었다.
탐욕의 환상에 빠지면 지식은 재앙이 될 수 있다. 연구하고 만드는 사람들 뿐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똑똑한 바보들의 늪에 빠지게 된다. 얼마나 많은 대단한 기업들이 값비싼 첨단 기술 ‘솔루션’ 도입에 반복적으로 돈을 허비하고 있는가? 욕망 때문에 실체를 못 보기 때문이다. 욕망의 물고기는 광고 한 컷이면 낚을 수 있다.
AI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한다. 기업들은 왜 AI 개발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AI 도구에 열광하는 것일까? 정말 그렇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일까? 혹시 프랑켄슈타인처럼 “한 가지 목적”에 사로잡힌 것은 아닐까? 첨단기술과 변화를 비하하거나 외면하자는 것이 아니다. 어떤 기술이나 도구를 붙잡기에 앞서 우리의 욕망을 먼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진짜 '솔루션'을 찾아갈 수 있다. 그래야 첨단기술 도구들의 가능성과 한계를 제대로 파악하고 더 잘 사용하는 방법을 찾아갈 수 있다.
욕망이 탐욕으로 바뀌는 것을 막는 방법은 없을까? 좋은 방법 하나는 욕망과 필요를 구분하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때로는 혼동되기도 하고 완전히 분리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하지만 둘을 구분하면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다. 필요 없는 욕망은 병든 탐욕이 되고, 욕망 없는 필요는 메마른 생존으로 연명하게 된다. 욕망은 부풀게 하지만 터질 위험이 있고, 필요는 유지시켜 주지만 흐물거릴 위험이 있다. 욕망은 바람이고 필요는 가죽이다. 둘이 함께 있어야 탱탱한 공이 되어 공중으로 튀어 오를 수 있다.
프랑켄슈타인의 실험과 창조에는 사람들의 필요를 헤아리는 눈이 없었다. 미지의 인간형 생명체가 탄생되는 것은 도대체 누구에게 무슨 필요가 있는 일인가? 그는 타인의 필요도 자신의 필요도 고려하지 않았다. 창조될 미지의 생명체의 필요도 안중에 없었다. 그저 금단의 지식을 정복하고 창조자가 되고 싶은 욕망뿐이었다.
프랑켄슈타인의 잘못은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은 것이다. 욕망과 필요를 구분하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일을 위해서 빛나는 욕망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필요 없는 욕망으로 탐욕의 불을 질렀다. 결국 사람들을 불태워 죽이고 말았다.
첨단과학의 깃발을 들고 정신없이 폭주하는 사람들에게 프랑켄슈타인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는 왜 AI를 개발하려고 하는가?
우리는 왜 AI를 사용하려고 하는가?
탐욕을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필요는 정말 무엇인가? AI가 필요하다면, 어디에 어떻게 필요한 것인가?
우선 필요한 일은 AI 솔루션들을 뒤적거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또한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그것이 최고의 시작이다. @
※ 본문 속의 인용문은 원전에서 직접 번역한 것입니다.
[이야기 차례]
1. AI는 오래된 미래다.
2. 인공지능의 꿈
3. 기계의 공부
4. 기계의 언어
5. 기계의 예술
6. 기계 길들이기
[관련 강의] 프랑켄슈타인 AI 프로젝트 워크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