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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레네 Mar 05. 2023

사랑은 그런 식으로 우릴 만든다

그 해 첫날은 김치만둣국을 먹었다 

우리 집은 오랜 세월 동안 할머니의 음식을 먹어 왔다. 오 남매 중 장남인 아빠가 할머니를 모신 까닭에서였다. 


강원도 토박이인 할머니는 손맛이 좋았다. 감자 하나를 삶아도 뽀얀 분이 올라와 먹음직스러웠고, 크레페처럼 얇게 올린 메밀 반죽에 배춧잎만 부쳐도 금세 군침 돌게 만들었다. 봄이면 동네 뒷산의 이름 모를 풀떼기를 한 소쿠리 뽑아 나물을 무치고, 국을 끓이고, 김치로 만들던 할머니는, 마디마디가 불퉁하게 나온 손으로 평생 오 남매와 열두 명의 손주들을 먹였다. 




그림: 이미경 작가, <나어릴적에>, www.leemk.com




그래서인지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가장 힘든 것 중의 하나가 냉장고 정리, 특히나 김치 정리였다. 유품이나 재산처럼 나누기 애매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 맛을 영영 잃게 될까 두려워 쉽사리 손댈 수가 없었다. 엄마는 몇십 년 만에 처음으로 슈퍼에서 김치를 사기 시작했다. 냉장고 안에 우리가 평생 먹어 온 김치가 있는데도 남의 것을 사다 먹었다. 할머니 덕에 신체 부위 중 입만 고급이 된 아빠와 남동생들은 시판 김치에 트집을 잡았지만, 난 금방 익숙해졌다. 뭐, 단지 종종 우스운 짓을 하긴 했다. 냉장고 한구석에 묵직하게 자리한 갈색의 김치통이 제단이라도 되는 듯 짧게 기도를 했다는 것? 여하튼 여러 방식으로 할머니 김치는 쉽게 우릴 떠나지 못했다. 


"이거 안 되겠어. 이번에 먹어 치워야지." 


아빠의 결단은 설날을 이틀 앞둔 시점에 내려졌다. 할머니 김치로 만둣국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아, 그냥 고향만두로 해." 

"설날에 항상 엄마 김치로 만둣국 끓였잖아." 

"그건 어머니가 계실 때 소리지." 


귀찮음이 드러나는 엄마의 의견에도 아빠는 꿈쩍하지 않았다. 이대로 내버려 뒀다간 김치를 버리게 될까 싶은 걱정에서였다. 결국, 만두를 만드는 전 과정에 아빠가 적극 참여한다는 조건으로 합의가 이뤄졌다. 나는 후련함과 동시에 헛헛함을 느꼈다. 할머니의 김치가 이번 설에 사라진다니, 그럼 이제 어디에 기도해? 


나름대로 경건했던 나의 질문과 상관없이, 설 전날 밤부터 할머니의 김치는 몽땅 만두소로 사용됐다. 시고 물컹해진 김치가 아주 제격이었다. 아빠는 두부를 다지고, 김치 물기를 빼고, 반죽을 치대는 내내 중얼거렸다. '아니 엄마는 이걸 어떻게 혼자 했대?' …그러고 보니 할머니는 늘 혼자 만두를 빚곤 했다. 우리가 도와준대도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며 한사코 거절했다. 자식들이 조금 더 편했으면 하는 마음일까, 그도 아니면 정말 혼자가 편해서였을까. 어쨌든 만두는 온전히 할머니의 손맛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반죽해 놓았던 만두피가 제법 쫀득하게 부풀자, 우리 가족은 거실에 둘러앉아 만두를 빚기 시작했다. 얇은 피 안에 할머니의 마지막 손맛을 하나, 하나 감쌌다. 반달 모양, 혹은 끄트머리를 모아 둥글게 오므린 다양한 형태의 만두가 쟁반에 차곡히 쌓여갔다. 할머니 것은 뽀얗고 볼록해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웠는데, 우리가 만든 건 누가 봐도 초짜 티가 났다. 할머니가 남긴 마지막 김치를 이따위로 망쳐도 되나 싶은 생각이 일순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아무리 망쳐도 그 맛 때문에 평타는 치겠단 안도감도 들었다. 






그림: 이미경 작가, <사랑2016>, www.leemk.com




설 당일 아침, 엄마는 전날 밤 만들어 놓은 만두와 떡을 넣고 국을 끓였다. 개중에서 이쁜 것들만 골라 그런지 몰라도, 끓는 내내 반들반들 통통하게 익는 만두가 퍽 맛있어 보였다. 나는 기대감을 안고 계란 지단과 김가루를 국 위에 수북이 올렸다. 다신 없을 만둣국이었다. 


"엄마 잘 먹을게요" 


둥근 상 앞에 가족 모두가 둘러앉자 아빠가 나직히 말했다. 이 말을 하는 아빠의 얼굴이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처럼 울상이었다. 우린 말을 보태는 대신 만두를 꿀렁꿀렁 삼켰다. 칼칼하고 담백하고 보드라운 맛이 할머니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입안에 머무르는 그 찰나의 순간이 지나면, 영원히 결핍이 되어버릴 맛. 


사랑은 그런 식으로 우릴 만든다. 살 찌우고, 기억을 보태고, 하루를 살아낸 힘을 솟아나게 만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하라고 다독이며. 


새로운 해가 시작되고 있었다. 할머니의 음식을 먹고 무럭무럭 자란 우리가, 그렇게 또 다른 해를 맞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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