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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레네 Jul 07. 2021

포도가 익어가는 풍경

어쩌면 포기, 또 어쩌면 적당한 타협


  와인이 좋아지기 시작한 것은 멕시코의 한 와인농장에 다녀오면서부터 였다.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고 싶다는 오랜 꿈이 또 엎어진 후, 나는 도피하듯 멕시코에 사는 선배 부부를 찾았다. 집과 직장만을 오가던 무료한 일상에 지친 그들은 신이 나 이곳저곳으로 나를 데리고 다녔다. 그리고 어느 일요일, 우리는 근교의 와인 농장으로 향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La bodega Casa Madero (라 보데가 까사 마데로)라는 농장이었다. 그러나 선배 부부가 사는 몬떼레이에서 농장이 있는 파라스 지역까지 두 시간 남짓 차로 달리는 동안, 나는 마트에서 본 적이 없는 멕시코 와인에 대한 의구심에 심드렁했다. 게다가 와인은 내 취향과 맞지도 않았다. 탄산이 있어 속을 뻥 뚫어주는 것도 아니고, 저렴하지도 않은 데다 맛이 강해 안주를 신경 써서 골라야 한다는 등의 이유에서였다.



  와인 농장에 도착해 직원이 직접 말마차를 몰며 농장을 소개한다는 투어를 신청했다. 우리를 마차에 태워 안내한 사람은 30대쯤 되어 보이는 멕시코인이었다. 그는 농장을 설명하면서도 말수가 적었고(!) 무뚝뚝했다. 그가 유일하게 적극적이었던 때는 잠시 마차에서 내려 막 열매가 맺기 시작한 포도밭을 거닐 때였다. 생각보다 볼 게 없어 억지로 흥밋거리를 찾아 눈을 이리저리 돌리던 우리에게 그가 검은 봉지를 내밀었다. 알이 제법 큰 호두가 수북이 들어 있었다. 농장 곳곳에 있는 나무에서 수확한 것으로 다른 지역보다 훨씬 더 알이 단단하고 맛이 좋다고 했다. 그리고 시장가보다 훨씬 더 저렴하게 판매한다는 소리도 덧붙였다. 우린 권하는 호두를 몇 개 주워 먹었다. 고소하고 적당히 기름진 맛이 꽤 괜찮았지만 와인 농장에서 호두를 사고 싶진 않았다.

  화제를 돌리려 다른 이야길 꺼냈다. '여긴 포도나무 말고도, 다른 나무가 참 많네요', 다시금 무표정으로 돌아온 직원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저게 다 호두나무라고 했다. '왜 호두나무가 이렇게 많은 거죠?' 그는 말라비틀어진 포도 덩굴 하나를 꺾어 빙글빙글 돌리며 저걸로 와인을 담을 통을 만들어 그렇다고 답했다. 나는 농장을 휘 둘러보았다. 그제야 외곽을 둘러싼 숲이 대부분 호두나무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삼십 분 간의 투어를 마치고 돌아온 우리는 와인을 시음했다. 더운 날씨에 마신 와인은 평소 마시던 것보다 더 달큼하고 끝 맛이 짙었으며, 금세 취기를 몰고 왔다. 선배 부부는 구석에 작게 마련된 파라솔이 있는 테이블에 앉아 치즈 플래터를 주문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한잔 마시고 가는 게 인지상정이란 소리와 함께. 그러나 나는 술 생각이 없었다. 아니, 마시면 안 될 것 같았다. 여기서 취해 신춘문예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내뱉는 순간 흑역사의 장엄한 문이 열릴 것만 같은 예감에서였다. 그렇게 나는 혼자 와인 농장을 산책하기로 했다. 포도밭은 들어가면 안 된다기에 호두나무를 따라 조용히 걸었다. 뙤약볕인데도 나무가 만든 그늘 아래는 제법 선선해 걸을 만했다. 나는 가끔씩 바람에 실려오는 말똥 냄새를 맡으며 졸작이었던 내 단편소설을 떠올렸다. 재능이 없으니 포기하고 그냥 월급쟁이나 하라는 마음의 소리가 메마른 가슴을 따갑게 갈랐다. 올해 당선작은 내가 보기에도 재밌었다. 막내 동생뻘 되는 어린 작가들이 당선되고, 책을 내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매일 기회가 저만치 달아나고 있다는 생각에 자괴감에 휩싸였다. '박완서 작가는 마흔 넘어 등단했잖아'로 스스로를 위무하던 레퍼토리는 언젠가부터 '야 그건 박완서잖아'라는 대답으로 앙칼지게 돌아오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 아까 그 무표정한 직원이 호두를 까먹으며 마차 위에 드러누운 모습이 보였다. 삼삼오오 모인 말들은 여유롭게 꼬리를 팔랑거리고, 포도밭과 그 외의 농장 시설 사이를 가르는 하얀 담 너머로 마리아치의 경쾌한 음악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나는 호두나무의 꺼칠한 표피에 등을 바짝 대고 이 그림 같은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점점 내가 보고 있는 이 풍경을 그대로 마주하고 있을 호두나무로 마음이 옮겨 갔다.

호두나무는 농장의 주인공인 포도밭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작은 씨앗에서 알이 맺히고, 영글고, 농부의 손에 수확되어 포도주로 변하는 그 과정을 다 보고 있는 그는 어떤 마음일까. 나는 평화로운 고요가 깃든 그 풍경 아래에서 자괴감으로 시끄러웠던 마음이 점점 편안해짐을 느꼈다. 나무의 심정까지 알 수는 없겠지만, 아니 나무가 생각을 할리가 없겠지만 어쨌든 이렇게 가까이에서 저 포도가 익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썩 나쁘진 않겠단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아까 와인 참 달았는데….’ 갑자기 와인이 마시고 싶어진 나는 선배 부부가 있는 파라솔로 향하며 넓은 포도밭을 시선에 담았다.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한 말이 언뜻 머리에 스쳤다.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내 생애에 우주를 전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낀다’. 그렇다. 이해할 수 없고 가질 수 없어도, 좋아할 수는 있다. 작가가 될 재능은 내게 주어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책이 좋고, 글을 끄적이며 위로를 받는다.



  어쩌면 포기, 또 어쩌면 적당한 타협. 그러나 그렇다 한들 뭐 어떤가. 다래다래 매달린 포도는 검붉게 익어 가고, 나는 혼자 오롯이 바라보는 그 풍경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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