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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선 Apr 20. 2021

빛나는 내 연봉 180만 원

서른여덟의 엄마가 꿈을 꾼다는 것은

 나는 지금 초등학교 4학년 딸을 둔 엄마이자 여전히 꿈 많은 미술작가이다. 이제 제법 당당히 작가라고 이야기하게 되었지만 전공도 하지 않았고, 서른이 넘은 늦은 나이에 미술을 시작한 나에게 전시의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기에 아직은 반쪽짜리 작가이긴 하다. 하지만 8년 전 다시 그림을 시작하게 될 때의 상황을 돌이켜보면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도 기적이고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다.


인생의 나비효과


 8년 전 서른 살이 되던 나는 지독한 산후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아이는 3살이었고 몇 년간 쌓여왔던 내 안의 억눌린 분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무언가 행동하지 않으면 내가 나를 해칠 것 같은 상황이었다.

 난 잠든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무작정 서점으로 달려갔다. 원래는 아이 옷이라도 직접 만들 요량으로 미싱과 관련된 서적을 뒤적이고 있었는데 그때 아이는 잠에서 깨어버렸고 서점이 떠나가라 울기 시작했다. 나는 급한 마음에 바로 내 앞에 꽂혀있던 미술책 한 권을 뽑아 후다닥 계산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 책을 들여다보니 그 책은 '크레파스로 명화 그리기'라는 그림책이었다. 그날 밤 나는 아이를 재우고 아이가 사용하던 크레파스를 주섬주섬 들고 나와 책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몇 시간을 한 자리에 앉아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몰입하고 있었다. '그래! 내가 미술을 참 좋아했었는데!' 그랬었다. 나는 고3 때까지 미대에 가고 싶다고 엉엉 울던 참 미술을 좋아했던 학생이었다.

 그 날 만약 내가 치밀어 오르는 마음을 서점이 아닌 다른 출구로 뿜어냈다면 아마도 8년이 지난 지금의 난 완전히 다른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날의 나의 선택은 바로 지금 나의 인생의 나비효과였다.


2013년 그렸던 크레파스화


달리는 마음

 그림을 그리는 희열을 20년 만에 느끼게 된 나는 다음날 무엇에 홀린 듯 화실을 찾아 등록하게 된다. 꽤나 오랜만에 연필을 들어 선을 그어보았지만 신기하게도 내 몸이 그 감각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었던 나에게 선생님의 칭찬은 꿀과 같았다. 자존감 바닥의 나에게 인정 욕구를 마구 채워주는 그림 그리기는 그 어떤 우울증 약 보다도 묘약이었다. 하지만 인정을 받을수록,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수록 내 욕심과 꿈은 점점 더 커졌고, 처음과 달리 내 마음은 빨리 나아가고픈 마음에 뛰어가기 시작했다.

 조급한 마음은 나로 하여금 열심히 뛰다가 지쳐 멈추기를 무한 반복하게 만들었다. 나는 집안일과 육아를 전담하며, 강아지 세 마리를 케어하고 남는 시간에 그림을 그릴 수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시간이었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강박은 나를 24시간 시간에 쫓기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지인들과 커피를 마실 때에도 속으로 시간 계산을 하고 있었던 나는 현재를 전혀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천천히 걸어왔어도 결과는 같았을 텐데 스스로를 괴롭혀왔다는 후회가 남는다.



거위의 꿈


 "있잖아. 나 꼭 그림으로 성공해서 내 힘으로 돈 벌고 싶어. 내가 좋아하는 일 하면서 돈도 벌고 싶어."

남편이 나에게 가장 듣기 싫다고 했던 말이다.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뜬구름 잡는 소리 좀 그만하고 철 좀 들라고. 넌 현실감이 너무 떨어진다고. 그런 말 듣기 싫다고.

 이 말들이 나에게 더 아프게 다가왔던 것은 어쩌면 내면의 나도 나에게 같은 말을 하고 있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7년의 시간 동안 공모전 입상과 단체전의 경험은 있었지만 내로라할 성과는 없었기에 남편의 눈에 비친 나는 세상 물정 모르는 이상주의자로 보였으리라. 그리고 정말 남편 말대로 내가 여태 쏟아부은 열정과 노력들이 헛수고가 되고, 뜬구름만 쫓아다니다가 끝나버리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도 불안했다.

 나에게는 들을 때마다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는 노래가 있다. 바로 '카니발'의 '거위의 꿈'이다. 이상하게 눈물이 그렇게 난다. 가사 하나하나가 모두 내 이야기 같아서 들을 때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하루는 이어폰으로 이 노래를 들으며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가다가 쓰레기 분리수거장 앞에서 나는 조용히 뜨겁게 울었다. 비록 지금 내 현실은 쓰레기장 같지만 언젠가 훨훨 날아오를 거라고 다짐하며.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저 차갑게 서 있는 운명이란 벽 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

​언젠가 나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수 없죠

내 삶의 끝에서 나 웃을 그 날을 함께해요

-'거위의 꿈' 가사 중-


한 걸음 나아가 보자

 

 나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나에게 참 편하게 살았을 것 같다고들 종종 이야기한다. 몇 년 전에 제법 동창생들이 많이 나오는 동창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졸업 후 처음 보는 한 친구가 나에게 한 말이 있다.

 "사람들은 살면서 힘든 일도 있고 굴곡이 있기 마련인데 넌 참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인생이 잘 풀리는 것 같다. 참 부럽다."

난 이 말을 듣고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말문이 막혀 미소 짓고 말았다. 20년도 더 지나서 만난 친하지도 않은 동창생에게 그 간의 내 인생 서사시를 들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이 떠올랐다.

 수많은 나의 비극 중에 나의 결혼이 있다. 나의 결혼식에는 시댁 식구가 '0'명 참석했다. 시부모님 기준에서 돈 없고 학벌 뒤쳐지는 며느리였던 나는 용납될 수 없었고 끝내 아무도 오시지 않았다. 그렇게 딸아이 3살이 될 때까지 왕래조차 없이 지냈으니 시어머니 눈에 내가 예뻐 보일 리 없었고, 시간이 흘러도 시어머니는 한 번씩 말로 나의 심장을 찌르셨다.

 2년 전 어느 날, 그날도 시어머니는 기분이 안 좋으셨는지 감정 쓰레기통이었던 나에게 수화기를 통해 당신의 감정을 마구 쏟아내셨다. 나는 내가 꽤 많이 도를 닦아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날 그 험한 말들을 이유 없이 듣고 나니 이젠 정말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결혼생활을 더 이상 견딜 수 있는 힘이 없었다.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나는 구체적으로 이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계획을 세울수록 내 마음의 돌덩이는 더 무거워져만 갔다. 시쳇말로 내 인생에 대한 '현타'가 온 것이다. 이혼을 하면 내가 생활비를 벌어서 초등학생 딸아이를 혼자 키워야 하는데 현실감 떨어지는 나라는 인간은 당장 돈도 없고 돈 벌 능력도 없었다. '돈 안 되는 것'만 밤낮 가리지 않고 매달려서 그 모호한 '꿈'을 향해 달려왔으니 말이다.

 나는 그때 이혼에 진지했기에 꿈이고 뭐고 나의 원래 직업이었던 간호사 일을 다시 할까, 아니면 간호직공무원 시험에 도전할까, 아니면 알바라도 해볼까 온갖 생각을 했었다. 도무지 내가 좋아하는 그림으로는 돈을 못 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음이 바닥을 친 그때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명상을 하고 있는데, 그맘때 했던 명상이 '내면 아이 치유 명상'이었다. 아이와 남편이 잠들고 혼자 방문을 잠그고 명상을 하는데 정말 나도 당황스러울 만큼 눈물이 쏟아져 나와 정말 꺼이꺼이 목놓아 울었다. 정말 울어도 울어도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두 시간 가까이 지칠 때까지 울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함부로 대했던 상처투성이의 내면 아이를 온 마음으로 끌어안고.

 그 이후에 나는 결론을 내렸다.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꿈을 버리지 말고, 꿈을 품고 나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길로 계속 걸어가 보기로 했다. 정말 진정 내가 나를 사랑해주며 인생을 멀리 보고 나아가 보기로 결정했다. 그동안 타인의 말이 비수로 꽂혔던 것은 어쩌면 내가 나를 혐오하고, 엄격한 잣대로 비난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남들에게 관대하고 친절하며 밝은 사람이었던 것처럼 나에게 그렇게 대해 보기로 결심했다.

 유리멘탈, 완벽주의자였던 나는 겨우 울음을 그친 내면 아이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용기를 내어 세상을 믿고 나를 믿으며 한 걸음씩 나아가 보기로 했다. 세상을 향한 분노의 에너지를 열정의 에너지로 바꾸어 내 안에 분노가 올라올 때면 더 열심히 한 점이라도 더 그렸다. 그리고 용기가 없어서 도전하지 않았던 모든 것에 도전해 보았다. 그러자 내 마음과 내 삶에 작지만 큰 변화들이 생겼다. 7년 전 서점으로 향했던 내 행동처럼 이 작은 나의 선택과 행동들이 5년 뒤, 10년 뒤에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빛나는 내 연봉 180만 원


 하루는 아이를 재우며 핸드폰으로 공모전을 검색하다가 제법 이름 있는 그림 렌탈 회사에서 작가 공모를 한다는 게시글을 발견하고 고민에 빠졌다. 내가 알고 있던 유명 작가분들도 그 업체에 등록되어 있었고, 다른 작가분들도 나름 약력이 화려했기에 나 같은 사람을 뽑아줄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미술 전공자도 아니고 개인전 경력도 없는 스펙이라고는 1도 없는 그런 사람이었기에 망설여졌다. 괜히 비웃음거리가 될까 봐 두려웠지만 후회 없는 인생을 살기로 결심했기에 실행에 옮겼다. '아님 말고'의 정신으로.

 그렇게 공모신청서를 내고 한 달 동안 아무런 연락이 없었고, 나는 아직은 내가 부족하구나 하고 단념을 하고 있었다. 조금은 실망했지만 그 사이 마음이 제법 단단해졌기에 '더 좋은 때에 더 좋은 일이 오려나보다.' 하고 내 마음을 다독였다. 그렇게 그 일에 대해 잊고 있었을 때 즈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작가님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 계약을 하고 싶은데 미팅 가능하신가요?"

 전화를 끊고 집에서 큰 소리로 만세를 불렀다. 비웃음과 조롱이 섞이지 않은 처음으로 진지하게 들어본 '작가님'이라는 말에 눈물이 났다. 누군가에게는 별 것 아닐지 몰라도 7년을 외롭게 쑥과 마늘을 먹는 시간을 보내왔던 나에게는 무엇보다 값진 한 마디였다. 그 날 누구보다 내가 나에게 처음으로 넘치도록 칭찬해주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포기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온 네가 자랑스럽다고.

 등록이 되어 내 이름과 내 그림들이 홈페이지에 올라오자 일단 너무 신기했고, 그다음으로는 과연 누가 내 그림을 대여해줄까 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렌탈 신청이 들어왔다. 첫 렌탈. 그때 그 기분을 잊을 수가 없다. 저 수많은 작품들 중에 내 그림을 선택해주신 분께 정말 감사했다.

 수수료와 택배비를 제외하면 만원, 2만 원 남짓이었지만 액수가 문제가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은 남는 것도 없겠다고 했지만 전시 기회가 거의 없는 나에게는 누군가의 집에서 전시회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큰돈 대신 큰 행복을 받았다. 기꺼이 내 그림에 비용을 지불해주신 분들께 지금도 너무나도 감사한 마음이다.

 1년 이 지난 지금, 1년간 내가 렌탈로만 벌어들인 수익을 계산해보니 대략 180만 원이었다. 만원, 2만 원이 모여서 나의 첫 연봉은 180만 원. 누군가에게는 우스운 액수이겠지만 나에게는 눈물 나게 고마운, 간호사 시절 내가 받았던 연봉 3000만 원보다 값진, 나의 30대를 녹여 빚어낸 자랑스러운 나의 연봉 180만 원이다.




성공의 의미

 

 난 어릴 때부터 항상 1등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시험에서 100점을 받아오면 당연한 것이었고 98점을 받아오면 혼이 났다. 이런 어머니 아래에서 양육되었으니 난 완벽해야 한다는 강한 압박감이 나의 인생을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1년 간 명상도 하고, 나와 친해지는 시간을 가지면서 많은 생각이 변화했다. 난 더 이상 닿지 않을 것 같은 산 정상만 바라보며 불안, 초조해하지 않기로 선택했다. 대신 지금 내가 서 있는 위치에서 주변에 있는 것들을 만끽하고 감사하며 여유롭게 살기로 했다. 그렇다고 게을러지자는 것이 아니다. 성실하게 한 발짝 씩 올라가되 마음만은 지금 현재 이 순간에 오롯이 집중하기로 했다.

 아직 나는 산 중턱에도 오르지 못했다. 여유 부리며 느리게 걸어가다가는 어쩌면 나는 산 정상까지 오르지 못하고 내 생명이 다할 수도 있다. 극단적으로 내일 내가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다. 그럼 내 인생은 실패라고 이야기할 것인가? 예전의 나는 실패라고 이야기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난 적어도 내 꿈을 위해 나 자신과 끊임없이 싸우며 전보다 훨씬 내면이 단단한 사람이 되었고, 소박했지만 나의 소원이었던 전시회도 해 보았고, 나의 그림을 사랑해준 몇몇의 소중한 분들을 만났고, 무엇보다 꿈을 찾는 여정을 떠나지 않았다면 영원히 모르고 생을 마감할 뻔했던 '나'를, 내가 그렇게도 미워하고 혐오했던 나를 점점 알아가고 사랑하게 되었다. 앞으로 내 삶이 어디까지 남아있는지는 모르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그 두려움들을 즐겨보려 한다. 앞으로도 수만 번 넘어지고 그때마다 아프겠지만, 아픔 뒤에는 항상 빛나는 보석이 하나씩 내 안에 쌓여간다는 것을 알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기꺼이 겪어내려 한다. 그리하여 언젠가 삶이 끝나는 날 내 인생은 100점짜리 시험지가 아닌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한 점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남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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