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식사는 다시 현지식으로 도전이다. 와카치나의 '로모살타도'에 이은 두 번째 페루 음식, '치차론'을 먹으러 가자! 일단 주재료가 튀긴 돼지고기랑 옥수수라만만해 보여서 선택했다. 진정한 도전이라면 꾸이를 선택해야 했겠지만, 뇽과 나는 무엇이 되었든 간에'생전의 모습을 간직한 음식' 앞에서는 식욕이 사라지기 때문에 일말의 아쉬움도 없이 패스. 미리 검색해 본 치차론 음식점 두 군데가 지도상 근거리에 있어 가 봤더니, 그 골목 전체가 신당동 떡볶이 골목처럼 치차론 가게로 가득했다.
경쟁이 치열한 탓에 직원이 가게 앞에 나와서 작열하는 오후의 태양을 고스란히 받으며 호객하는 곳도 있었는데, 손님 대신 물색없는 떠돌이 개가 그 앞에 얌전히 앉아 운좋게 떨어질고기를 기다렸다. 검색했던 두 군데 중 한 군데는 현지인들이 많이 간다는 식당이었는데 건너편에서 봤을 때 실내가 너무 어두워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은 한 군데였던 'Los mundialistas'는 가격이 비싼 편이라서 위생 상태나 서비스가 웬만큼 보장되겠지 싶어 그곳으로 선택했다. 분점을 낸 건지 같은 이름의 가게가 2개였고, 확실히 유명한 가게답게 관광객들이 안에 꽤 있었다.
질기고 짭짤했던 치차론
메뉴판에서 유일하게 아는 음식인 치차론과 잉카콜라를 주문했다. 치차론의 돼지고기는 약간 질긴 편인 데다 짜서 한번에 많이 먹을 수 없었다. 사이드로 나온 옥수수는 낱알을 하나하나 따서 접시에 쌓아주었는데 구황 작물답게 크기가 어마어마하게 컸다. 알갱이 몇 술 떴을 뿐인데 금방 배가 불러온다.
잉카콜라는 첫날에 단독으로 먹었을 때는 상쾌했는데, 탄산이 약한 데다 단맛이 강해서 튀긴 고기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쿠스께냐 맥주를 이때 주문했더라면 더 맛있게 먹었을 것 같은데 낮이라고 맥주 생각을 미처 못한 게 아쉽다. 결국식사를 마치고 나와서도 속이 개운하지 않아 근처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뇽은 바닐라맛 아이스크림 콘을 사고 나는 망고맛 하드를 샀는데, 역시 페루의 과일 가공품은 실패가 없다. 주스처럼 상큼한 단맛으로 속이 시원해졌다.
거리 구경 겸 쇼핑할 겸 정처 없이 돌아다니던 중, 문득 쿠스코에 야마(Llama)가 있다는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지금은 우리나라 동물원에서도 종종 볼 수 있지만 나는 페루에 오기 전까지 야마 실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TV에서 본 것처럼 시니컬한 얼굴로 침을 뱉고 다니는지, 이 동네 개들처럼 아무렇게나 자유롭게 돌아다니는지 궁금했다.
쿠스코에서 이틀 째니 이 정도면 나타나야 하는 거 아니냐며 우리끼리 쑥덕거리는데 문득, 어디선가 짐승의 배설물 냄새가 풍겨왔다. 우리나라였다면 어디 소가 있나 보다, 생각했겠지만 여기는 쿠스코니까 혹시 야마가 아닐까? 싶어서 뇽의 개코를 앞세워 냄새 방향으로 전진했다.
진짜로 나타날 줄이야.
기념품샵 앞마당에 야마는 아니지만, 알파카 세 마리가 꽃단장을 하고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귀여운 건 정말 참을 수 없어
야마와 알파카는 같은 낙타과로 서식지도 비슷하지만 전혀 다르게 생겼다. 야마는 키가 크고 속눈썹이 긴 큰 눈에 도도한 인상이지만 알파카는 키가 작고 유순하게 생겼으며 털도 복슬복슬하다. 기념품샵에서 파는 인형은 거의 '야마 인형'이라고 퉁쳐서 팔지만 사실상 '귀엽게 생긴 야마 인형'의 얼굴은 알파카를 닮았다. 야생의 알파카는 아니지만 뜻하지 않게 만나게 되어 너무 기뻤다. 그들의 곁에는 유료 기념사진 촬영을 허가해주는 관리자도 함께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서 기념사진을 찍겠다고 했다. 자본주의가 낳은 알파카답게 사람에 대한 경계는커녕 지나치게 적극적이었다. 알파카는 키가 작은 편이라 투샷으로 찍으려면 사람이 약간 몸을 숙여야 하는데, 내가 다리를 굽히자마자 녀석이 큰 입을 쩌억 벌린 채 잡아먹을 듯이 얼굴을 디밀었다. 녀석과 관리자의 연출 의도는 '알파카와 나의 다정한 모습'이었을지 모르나 카메라에 담긴 모습은 죄다 '알파카에게 바친 제물' 느낌이었다.
초식동물인 건 아는데, 얼굴은 참 귀여운데... 혓바닥은 안 귀여워 인마! 멀리서 알파카만 따로 찍은 사진이 그나마 봐줄 만하다. 멋진 풍경에 굳이 나를 끼얹을 필요는 없었는데 괜한 욕심을 부렸다. 돈 내고 찍은 사진임에도 건질 게 없어 아쉽지만, 가끔 기분이 다운되었을 때 찾아서 보면 볼 때마다 큰 웃음이 난다는 점에서 돈 들인 보람이 있다.
알파카들 뒤로 딸려있는 기념품샵에도 들러봤는데 생각보다 높은 가격대에 비해 살 만한 물건은 없었다.
아직 시간이 많으니까 다른 가게들도 둘러보자며 작은 야마 인형 하나만 사 가지고 나왔다.
아침 먹으러 가는 길에 지나갔던 12각돌 골목 쪽에 기념품 가게가 모여있었던 기억이 나서 다시 가 봤다. 관광객과 상인들로 한층 북적이는 골목 안에 전통 복식을 차려입은 여자들이 인형처럼 작은 베이비 알파카를 안고 있었다. 살면서 관광지에서 기념사진 명목으로 돈 털려 본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오늘이 그 날이 될 줄이야. 그들은 방금 전에 돈 내고 보고 왔으면서 알파카를 보고 또다시 눈이 돌아가는 호구 둘을 귀신같이 알아보았다. 느닷없이 사진을 같이 찍자며 다가오더니, 우리가 미처 입을 떼기도 전에 뇽의 품에 알파카 한 마리를 안겨주고 그 옆에 쪼로록 서서 포즈를 취하는 게 아닌가.
이게 뭘까, 생각해보기도 전에 너무 준비된 사진이라 셔터부터 눌렀다. 뭐긴 뭐야, 돈 내라는 신호지. 카메라를 딱 내려놓자마자 그들은 빚쟁이로 돌변, 앞다투어 1 솔을 외치며 뇽을 에워쌌다. 사진은 한 장만 찍었는데 머릿수로 계산하는 건 어느 나라 계산법이냐! 다섯 명이나 되는 외국인에게 둘러싸여 삥 뜯기는 상황에서 뇽은 너무도 침착하게 인당 1 솔씩만 건네주었고, 심지어 더 받겠다고 다시 손을 내미는 사람에게는 "넌 아까 받았잖아! 안돼!"라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귀여운 거 밝히다가 눈 뜨고 5 솔을 뜯긴 상황이 어처구니없었지만, 그나마 돈을 들고 있었던 게 내가 아니어서 피해 금액이 이 정도에 그치지 않았나 싶다.
골목 안에 가게는 많고 많은데, 좀 전에 기념사진으로 돈을 뜯겨서 그런지 바가지를 쓸 것 같은 두려움에 섣불리 발을 들이게 되지 않았다. 똑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하면 당하는 놈이 바보라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바보가 틀림없다. 이카에서 탄 택시의 기사님처럼 '친구'를 부르는 목소리에 홀려 무심코 돌아보니, <꽃보다 청춘>에서 이적과 유희열을 잉카 소녀로 변신시킨 능력자 '로사'가 서 있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게로 들어가자마자 순식간에 뇽에게 판초와 치마, 모자가 착착 씌워지더니, 그걸 지켜보며 낄낄대던 나 역시 정신 차려보니 판초와 치마, 모자를 차려입고 로사가 쥐어 준 알파카 인형을 든 채 석벽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얼굴이 잘 나온 사진은 아니지만 복식과 배경만 보면 이만한 기념사진을 어디서도 찍을 일이 없을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빈틈없는 디자이너 로사 st
로사는 탁월한 상인이었다. 기념사진을 찍고 나서 아까 5인조 사진 강도(?)처럼 돈을 요구하지 않았고, 들고 있었던 물건을 강매하지도 않았다. 대신 가게를 마음껏 둘러보게 내버려 두며 가격을 물어볼 때만 다가와서 정가와 할인가를 알려주었다. 비싸다고 얘기하면 얼른 더 저렴한 물건을 찾아서 보여주었고, 골랐던 물건을 다시 내려놔도 개의치 않았다. 덕분에 경계심이 와르르 허물어진 우리는 사려고 했던 물건의 대부분을 여기서 쓸어 담고 말았다.
우리 이래도 되는 거야? 무슨 쇼핑을 이렇게까지 해? 라며 이성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면 옆에서 로사가 "쇼핑~쇼핑~"하고 응원해줘서 모든 사고가 마비되었다. 그나마 전반적인 가격대가 처음 갔던 곳보다는 저렴한 편이어서 다행이었다.
결제를 하고 나오려는데, 로사는 가게 앞에서 인증샷을 따로 찍어주는 센스를 발휘했다. 보통은 물건을 살지 말지 알 수 없는 고객이 사진을 찍으면 싫어하는 경우도 많은데 로사는 처음 가게에 들어갔을 때부터 사진을 찍거나 가격을 비교하는 행위에 대해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심지어 결제까지 끝난 마당에도 친근한 웃음을 유지한 채 또 놀러 오라고 하더니, 갑자기 맞은편 골목을 가리키며 저 쪽에는 소매치기가 많으니까 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왠지 그쪽 골목 가게가 경쟁사인 건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지만 고객 확보를 향한 로사의 의지와 노력은 인근의 어떤 가게도 따라잡기 힘들 것 같았다. 로사의 호객 행위를 부담스럽게 여기는 후기도 봤지만, 에스빠뇰을 못해도 쇼핑하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고 사진까지 찍어준다는 점에서 우리는 대만족이었다.
뇽의 어머님께서 부탁하신 선물용 동전지갑 수량이 부족해서 다른 기념품샵에 들러 지갑을 추가 구매한 다음 유화 가게에 가서 그림도 구경했다. 알록달록한 색감이 예뻐서 집에 걸어놓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이걸 들고 쿠스코-리마-LA를 거쳐 집까지 무사히 도착할 자신이 없어 몇 번을 망설이다 내려놓았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놓친 물건 하나하나가 다 아쉬운데 당시에는 배낭의 무게가 물욕을 이겼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한스럽다.
쇼핑에 집중한 사이 어느새 해 질 무렵이다. 쿠스코의 노을이 궁금해서 서둘러 아르마스 광장으로 돌아왔다. 하늘의 파란색이 조금씩 바래고 눈이 아프도록 쨍쨍하게 떠 있던 해가 조금씩 움직이기는 하는데, 희한하게도 점점 어두워지기만 하고 붉은 기운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한눈팔다가 놓칠까 봐 아무것도 안 하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지만, 아직 새파란 하늘 저편으로 해가 쏙 들어가더니 순식간에 깜깜한 밤으로 돌변해버렸다. 정말 이게 끝이라고? 날씨가 얼마나 좋았는데 노을이 없는 저녁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만 못 본건가 싶어 쿠스코의 노을 사진을 따로 검색해봐도 우리나라에서 보는 것처럼 전체적으로 붉게 타오르는 하늘 사진 같은 건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태양신이 꽤 성격이 급한 모양이다.
쿠스코의 밤은 황혼보다 화려하다
비록 기대했던 노을은 보지 못했지만,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저 멀리 고산지대 마을(친체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이 별자리처럼 산세를 수놓은 모습이 장관이었다. 보름달마저 유독 환하고 둥글었던 그날은 날짜를 헤아려보니 추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