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을 좋아하는 모두 저마다의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현실로부터의 탈출'을 1순위로 꼽는다. 익숙한 동네의 편안함이나, 지루한 회사 근처가 아닌, 낯선 설렘이 가득한 그곳으로 떠나는 것. 꽤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이유로 해외여행을 즐기진 않을까. 또, 그래서 펜데믹으로 고통받는 지금은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 제주도가 붐비는 이유가 아닐까.
그렇게 떠난 해외에서 '여행 첫날, 둘째 날, 셋째 날'등을 카운트하며 며칠을 보내다 보면 '여행 원년'의 개념이 자리 잡아 한국적 - 현실적 - 시간 감각이 완전히 잊혀 버리기 마련이다. 중간에 '성가대 보기' 같은 일정이 없는 이상은 요일 개념마저 사라지는데, 우리는 추석명절을 끼고 여행을 갔으면서도 추석을 잊고 있었다.
쿠스코 성당 장식 너머로 보이는 커다란 보름달
보고 싶었던 노을도, 남반구에서만 볼 수 있다는 독특한 별자리도 모두 실패하고 보게 된 커다란 보름달.
"오늘이 무슨 날이길래 저렇게 커다란 보름달이 뜨지?"
스마트폰의 캘린더를 열어보니 선명하게 쓰여있는 글씨. 완전히 까먹고 있던 추석이었다.
우리가 한가위 보름달을 보았을 무렵 한국은 추석 다음날 아침이었지만 명절의 느낌을 고취시키고자 우리는 각자의 부모님께 안부 메시지를 보내고 한가위엔 당연히 '풍성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며 일전에 알아뒀던 쿠스코의 세비체 맛집 '바리오 세비체(Barrio Ceviche)'로 향했다. 점심엔 커다란 옥수수 알갱이를 겸비한 치차론을 먹었으니 저녁식사 역시 페루의 자랑 '세비체'를 먹자!
입구부터 뭔가 격식 있어 보이는 - 비싸 보이는 - 레스토랑은 우리에게 예약을 했냐고 물어봤지만 예약을 하지 않아도 오픈 키친 앞의 바 테이블 정도는 앉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깔끔한 주방이 그대로 보이는 오픈 주방에, 예약제 시스템과, 영어로 된 메뉴판까지 갖추고 있는 것이 가격이 상당할 거라 예상했고, 역시 우리가 갔던 레스토랑들에 비해 비싼 집 이긴 했으나 한국에 비하면 그냥 보통 레스토랑 수준이어서 '이럴 때 아니면 우리가 언제 이런 호사를 누려보겠냐'며 우린 나름 있어 보이는 저녁을 하기로 했다.
깔끔한 오픈 주방
세비체는 라임에 절인 생선회인데 주문 당시 매운맛 선택이 가능했다. 우린 둘 다 한국 기준 맵찔이었으므로 not spicy를 주문했는데, 음식이 나오고 두어 번의 젓가락질 끝에 그 선택을 잠시 후회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국인에게 '이 음식은 매운 가요'라는 질문은 '그 매움을 견딜 수 있느냐'는 뜻인데, 외국인에게 '이 음식은 매운 가요'라는 질문의 뜻은 '매운맛이 (조금이라도) 존재하는가'라는 뜻이었으니, 매운(외국인 기준으로) 김치를 달고 사는 한국인 종특의 기질이 나와버리고 만 것이다. 아주 약간의 매운맛도, 후추의 매운맛 조차 느껴지지 않던 세비체는 맛이 없진 않았지만 라임 특유의 개운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외국음식이 매워봤자 일 텐데 우리는 왜 그렇게 겁을 먹었는가! 거기에 함께 주문한 쿠스께냐 맥주 역시 생맥주가 아닌 병맥이 그대로 나오는 형태로 일반 라거 맥주의 맛이었다. 조금이라도 도전을 했어야 했나 싶지만 이미 때는 늦으리.
고급진 플레이팅, 심심한 맛
한가위에 걸맞게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는 아니었지만 기회가 한 번 더 있었으니! 오늘의 스페셜한 일정, 생일을 며칠 앞둔 알의 생일파티!
평소 빵, 케이크류를 좋아하는 알의 생일이 오면 나는 항상 케이크 선정을 중요시하는 편인데, 딸기 케이크를 좋아하지만 가을에 태어난 관계로 - 딸기가 흔치 않은 계절이라 - 일부러 유명한 딸기 케이크 집을 찾아가 사 오거나, 다양한 조각 케이크를 모아둔 생일 케이크를 준비하는 편이다. 그런데, 바로 우리가 있는 이 쿠스코에 유명한 케이크 맛집이 있다니! 이런 날 생일 파티를 안 하면 언제 하겠냐!
라 본디에 페이스트리(La Bondiet Pastelería)
쿠스코의 새파란 하늘을 보며 커피를 마시기 좋은 케이크집으로 알려져 있지만 우리가 도착한 시각은 저녁. 추석 즈음이면 한국도 저녁시간에 조금 선선해지기 마련인데 페루는 우리와 기후가 다른 데다가 쿠스코가 워낙 고지대라서 그런지 밤공기는 꽤 쌀쌀한 편이었다. 멋내기용으로 산 판초를 보온용으로 껴입은 우리는 카페로 들어가 겨우 한 테이블 남아있던 자리를 잡고 디자인이 독특했던 미니 케이크 하나와 따듯한 라테 하나, 아이스커피 하나를 주문했다. 그리고 얼죽아인 나는 그곳에서 페루 사람들이나 유럽 사람들 -손님의 90%가 외국인이었는데 대다수 유럽인의 외모였다- 은 아이스커피를 먹지 않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스커피를 시켰는데 아이스(얼음컵)와 따듯한 커피가 나오다니요?
조촐했던 생일상
작은 케이크이고 초도 없었지만 그래도 생일을 축하하며 조촐하게 작은 목소리로 노래도 부르고 케이크를 맛보았는데 놀랍게도 그 맛은!.... 고전적인 제과점 케이크 맛이었다. 아니 여기 트립어드바이저에서 5위를 차지했다는데 왜 그런 거죠? 우리가 그런 걸 시킨 건가? 정장을 입고 주문을 받던 직원들의 서비스는 거의 호텔 카페급이었으나 그 맛은 그러지 못했다. 산소 부족으로 피곤함 속에서도 제대로 된 생일 축하를 해주지 못해 아쉬워하고 있으니 오히려 알은 아침부터 산소부족으로 고생한 나를 걱정하며 숙소로 가자고 먼저 말해주었다. 이렇게나 서로를 위해주는 친구가 어디 또 있을까.
밤늦게 고기 꼬치를 파는 쿠스코 노점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생각보다 더 어두웠고 숙소로 가까워질수록 인적이 드물어져 속으로 점점 쫄기 시작했지만 우린 둘 다 최대한 티 내지 않고 의미 없는 여담을 나누며 잰걸음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내일은 드디어 성스러운 계곡으로 가야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