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

천재도 아닌 우리가 세상을 사는 방법

by 강원일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을 그만둔대 를 보고.



이전에 만화가 이현세씨가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천재와 싸워서 이기는 법”이란 제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의 젊은 시절 아무리 노력해도 천재 친구가 술먹고 그린 그림 한점을 넘어서지 못해 좌절했었더란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매일매일 그림을 한 점씩 그렸고, 그렇게 그는 천재 친구를 넘어서서 우리나라 최고의 만화가가 되었다. 물론 그 역시 노력하는 천재를 만나면, 그때는 기꺼이 패배를 인정하고, 그런 사람과 한 시대를 살아가는 걸 축복으로 여기라고 했지만 말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노오오오오력 해”라는,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꼰대같은 얘기지만 매일 매일 한점씩 그리라는 그의 말에 꽤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 깊은 인상 뒤에 한줄기 의문점이 남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기지 못하면 어떡하지? 이기는 것이 과연 삶의 목적인 것일까?’


애써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않고 오랜 시간을 지내다가 최근에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을 그만둔대”라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 내내 수도 없이 키리시마라는 존재가 언급되지만 정작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키리시마 주변 사람들의 시각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된다. 몇가지 언급되는 단서로 추론해보건데 키리시마는 이런 존재다. 키큰 미남에 공부를 잘한다. 운동도 잘해서 배구 동아리의 주장이며 도내 배구 대표 선발대회에 나갈만큼 뛰어난 천재다. 모든 여학생들의 이상형이며 남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다. 영화는 그런 키리시마의 그늘에 가려진 2인자이자 절친인 키쿠치와 키리시마와는 정반대의 캐릭터인 마에다가 등장하며 시작한다.



키쿠치는 키리시마처럼 키큰 미남에 모든 운동을 두루 잘하는 사람으로 여학생들에겐 짝사랑의 대상이며 남학생들에겐 부러움의 대상이다. 운동을 잘 하지만 운동부 활동을 하지 않고 오로지 키리시마가 배구부 활동을 마치기만 기다리다 함께 집에 간다. 우직한 야구부 주장이 야구부에 들어오라고 이야기 하지만 그는 생각이 없다. 왜일까. 야구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좋아하는듯하다. 야구부 주장이 홀로 늦게까지 스윙 연습 하는 것을 몰래 뒤따라가 부러워하는 듯한눈으로 지켜보기 때문이다. 추측하건데, 이미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을 만난 것이 아닌가 싶다. 키리시마라는. 노력해도 이길수 없는 존재.


그리고 여기에 마에다가 있다. 그가 출품한 영화가 영화제에서 입상을 했다. 그 덕에 키리시마와 함께 전교생 앞에 호명된다. 하지만 키리시마는 박수를, 그는 조롱과 비웃음을 당한다. 그는 그런 존재다. 속칭 왕따에 오덕. 하지만 그는 영화를사랑한다. 그가 만들고 싶은 영화가 있다. 그러기에 담당 교사의 지시도 어기고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그의 몇몇 ‘덕후’ 친구들과 함께.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하면서 말이다.


이때 한 소문이 퍼진다. 우리의 천재, 선망의 대상, 배구 도대표 선발전에 나가는 그 키리시마가 동아리, 즉, 배구부를 그만둔다는 소문. 전교생이 혼란에 빠지고 특히 키쿠치는 더욱 더 큰 혼란에 빠진다. 넘을 수 없던 벽같은 키리시마마져 포기해버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 것일까. 키쿠치와 다른 학생들이 가진 혼란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리라. 저런 천재마저 이길수 없는 세상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하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란 무엇인가. 패배자일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이 말이다.


오직 마에다만이 키리시마로 인한 소동에 영향 받지 않는다. 그러다 그 역시 학교 옥상에서 영화를 찍던 도중’ 키리시마 소요 사태’에 휩쓸리게 되는데 그러면서 그가 찍던 영화를 망쳐버린다. 그리고 그때 키쿠치와 마에다는 만난다. 오직 키쿠치만이 그동안 마에다를 무시하지 않았는데, 망쳐버린 영화를 뒤로하고 키쿠치는 마에다에게 그가 만드는 영화와 카메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문득 인터뷰 형식으로 묻는다. 감독으로 데뷔해 아카데미 상을 받게 되느냐고. 당연히 “그렇다”라는 대답을 기대한 키쿠치는 오히려 정반대의 대답을 듣는다.


“글쎄.. 그럴 일은 없지 않을까”



여기서 키쿠치의 세상은 무너져 내린다. 무언가를 쟁취하고 이기기 위해 존재하는 그런 세상이 말이다. 그리고 홀린듯이그럼 왜 영화를 찍냐는 물음에 마에다는 대답한다.


“그래도 가끔 말야..우리들이 좋아하는 영화랑 우리들이 찍고있는 영화가 연결 되었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 그래서 ..정말 가끔이야.. 가끔이지만 ..그게 좋달까”


키쿠치는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 대학 신인 선수로 어디서도 지명받지 못할 줄 알면서도 매일밤 스윙연습을 하는 야구부 주장에게 전화를 걸며 영화는 끝이 난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에야 나는 이현세씨의 글을 보면서 들었던 의문점의 해답을 얻게 되었다. 패배자인 내가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이유.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 그것은 천재를 이기기 위해서도 아니고, 무언가를 쟁취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우리들은 이 세계에서 살아가야만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