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igjeje Apr 01. 2024

나의‘인연’이 나의 ‘외로움’이 자신의 ‘사랑’을 정리

하고 있다.

처음 그녀를 알게 된 것은 쿠바 여행에서다.

조금 연배가 있어 보여 윗사람에 대한 예의를 갖추려는 나에게 그녀는 여행의 길동무는 나이에 상관없이 친구로 대해주는 것이 좋다며 ‘윗사람 대접하기’를 정중하고 부담스럽지 않게 사양했다. 나이가 나보다 어린 사람을 만날 때면 나이에 대한 차별을 사양했던 내 평소의 생각과 같아 그런 그녀를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여행에서 만난 사람과의 좋은 점은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공감한다는 편안함이다.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상대가 어떤 위치나 직급을 가진 사람인지 알 필요도 묻지도 않는다. 그저 같은 여행지에서 보고 싶었던 것을 보고, 알고 싶었던 것을 서로 교환하며, 느끼고자 하는 것을 함께 느끼고, 모르는 것은 서로에게서 배운다. 그 나라의 문화와 사람을 알아가는 즐거움이면 족하다. 그러다 가끔 그곳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대화를 하고 저녁에는 맥주 한잔이나 와인 한잔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 서로의 잔을 부딪치는 여유로움에서 지친 하루의 피로를 푼다.

나는 그녀와 늦은 밤 아바나 해변에서 집시들의 기타 연주를 함께 들었다. 살사 춤을 추는 사람들 틈에서 함께 어설픈 스텝을 밟으며 긴장된 마음을 내려놓기도 했다. 거리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었던 쿠바의 영웅 체 게바라의 역사적 장소에서는 그에 대한 인간애를 나누며 약자인 세상 사람들에 대한 정의와 이타심을 공고히 하기도 했다. 그러다 부인할 수 없는 체 게바라의 남성적 매력에 빠져 아직도 가슴에 살아 숨 쉬는 젊은 날 같은 사랑의 열정을 운운하며 서로의 비밀스러운 사랑 이야기로 사심 없는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었다.  

    

여행 동무의 또 다른 좋은 점은 일단 공항에서 헤어지면 서로의 일상으로 돌아가 각자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좋은 점이자 부담스러운 것 중 하나는 가까워지면 상대의 사생활에 너무 관여하고 싶어 한다는 친근감이다. 혼자서 여행하는 사람들 어느 정도의 특징은 지인이나 가족 친구 등의 시선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혼자의 시간을 갖고 싶어 하는 이유를 가지고 있다.

나도 그중에 하나이지만 세상 어느 곳에서 가끔 만나게 되는 이런 여행 길동무는 돌아와서도 그 이유에 대한 진실을 잘 알기에 때로는 지나치게 곁을 내어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또한 묘한 것은 그런 사람을 내가 선택한 여행지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면 우리는 인연, 또는 운명을 운운하며 반가워하고 여행에 동행자가 된다.  

    

그녀가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첫 만 남지인 쿠바에서 느꼈던 그녀의 행동은 우선 매우 독립적이어서 일행과 떨어져 혼자 다니기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차분해 보이는 모습이 오히려 우울해 보이고 외로워 보인다는 인상을 주었다. 나 또한 그룹으로 여행을 가도 대부분은 혼자서 돌아다니는 것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 나와 그녀는 작은 골목길 탐험을 좋아하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다 맘에 드는 카페를 발견하면 주저 없이 들어가 그 집 커피 맛을 음미하며 여유를 부려보는 취향도 나와 같았다. 그러다 보니 같은 장소에서 자주 마주치게 되었고. 여러 번 마주치다가 같은 카페에서 만났을 때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우리는 같이 차를 마셨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여행이 끝나는 날까지 동행자가 되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역시 서로 소식이 끊겼고 점차 추억 속의 한 사람이 됐다. 그런 그녀를 같은 여행지에서 몇 번 우연히 만나면서 조금 더 서로에게 친근감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한국에 돌아와서는 언제나처럼 개별적 만남이나 각자의 사생활에는 무관심했다.      

그렇게 그녀와 인연을 맺은 것이 벌써 10년을 넘기고 있다. 코로나가 끝나갈 무렵 다시 떠났던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트레킹에서 그녀를 또 만나게 되었다. 아일랜드에서부터 시작해 하루도 거르지 않는 트레킹 일정에 젊은 사람들도 점차 지쳐가고 있었지만, 갈수록 그녀가 뒤처져 따라오는 날이 많아졌다. 난 그녀와 속도를 맞추려고 했다. 나의 의도를 눈치챈 그녀가 극구 사양하며 나의 배려를 부담스러워했다. 가끔 뒤 돌아보면 묵묵히 걷는 그녀가 시야에 들어어 왔다 사리 지곤 했다. 그렇게 아일랜드의 일정을 무사히 끝냈다.     

스코틀랜드에서 우리는 아주 짙고 깊은 안개를 만났다. 비도 많이 내리고 있어 그날은 모두 차로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때 내 곁에 앉은 그녀가 창밖의 소리 없이 내리는 비처럼 조용하고 느리게 그리고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내게 했다.

‘이 비가 나를 쉬게 하고 저 안개가 내 두려운 얼굴을 가려주네요. 선생님을 만나서 여행길이 외롭지 않았어요.’

‘저도 선생님 덕분에 외롭지 않은 여행이 되었답니다.’

홀로 나선 여행에서 그녀를 만나 조금은 흥분되고 더 여행이 즐거웠던 것이 나 또한 진심이었다. 우리는 그날 숙소 로비에서 술 대신 뜨거운 영국 차로 몸과 마음을 녹이며 여행에 대해, 코로나로 겪은 그동안의 일상에 대해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그녀는 베를린에 있는 딸에게 가야 하는 일정이 있어 먼저 스코틀랜드를 떠났다. 그때 우리는 헤어지는 아쉬움에 뜨거운 포옹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2년 정도 흐른 시점에 홀로 떠난 여행지에서 그녀의 지인을 만나 그녀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평소 그녀는 책 읽는 것과 책 사는 것을 좋아했다. 다 읽지도 못하면서 책장에 책이 꽂히는 것을 보며 즐거워하는 나와 비슷한 그녀가 반갑고 좋았다. 하지만 나와 다른 점은 그녀는 모든 책을 정독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해박한 지식과 깊은 마음의 내공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얼마 전 트럭을 불러 모든 책을 집에서 내보냈다는 것이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유방암 치료를 받고 있었고, 그 후에 완치 판정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 지 거의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 다시 그녀에게 흑색종이라는 암이 찾아왔다. 그 진단을 받고 자신의 주의를 정리하고 있다고 했다. 그 첫 정리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자신을 지켜주었던 ‘책’이다. 나의 외로움에 또 다른 그림자로 떠오르던 그녀가 혼자서 자신이 가장 아끼던 책들을 트럭에 실어서 보내는 장면이 떠오르며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다. 여행의 중간 지점에 서 있은 발길이 무거워 더 이상 다음 여행지를 생각할 수 없었다. 스코틀랜드에서 했던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유난히 힘을 주어 포옹하던 그녀의 가슴이 느껴졌다. 갑자기 따가운 햇살에 눈물이 미처 멈추지 못하고 뜨거워져 흘러내렸다. 아직도 내 앞에는 보지 못한 풍경들이 야생의 봄꽃을 품은 채 저리도 애교스럽게 유혹하는데 사랑스러움도 느낄 수가 없었다. 에트나산의 경이로운 모습도 그 아래 풍요롭게 펼쳐진 오렌지와 레몬의 햇살 품은 빛깔도 검게만 느껴지는 감정이 아직 며칠 남아있는 귀국 날 자의 숫자를 헤아리며 가던 길을 뒤돌렸다.


어느 지역을 가나 부활의 날을 축복하기 위해 기쁨과 성스러움이 넘치는 부활절 주기에 어떤 생명은 죽음에 굴복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있는 기쁨과 슬픔이라는 경계에 나는 서 있었다. 신의 부활과 친구의 다가올 죽음, 그 귀로에 있는 축제의 현장. 하지만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서 일어설 수 있는 마음의 용기를 서로 나누며 공유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하루하루의 삶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고 신께 그 모든 것이 주어짐을 인정하고 맡기자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느 상황이길래 신의 그 손을 놓으려 하고 있는지, 나는 그녀가 궁금하고 당장 따져보고 싶었지만, 다가설 수 없는 여행 동무라는 거리감이 마음만 안타깝게 했다.

조급한 마음에 막 성금요일을 맞이한 성당 방문으로 여행의 일정을 변경하기로 했다. 오늘은 예수님의 죽음을 애도하고 내일의 부활을 기다리는 축복의 기도를 올리는 날이다. 나는 한국에 돌아가기에 가장 가까운 지역을 찾기 시작했다.

     

‘내년 당신의 부활절에는 병마로부터 다시 태어난 그녀가 당신께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여행 동무의 바람을 간청해 보리라.’  

    

반드시 병마를 이기고 다시 태어날 그녀를 기대하며 난 공항 근처의 카타니아 두오모 성당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오늘도 사랑을 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