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구에서 마주한 죽음
중년의 부부가 은행 문을 열고 들어선다. 한 뭉치의 서류를 들고 청경 매니저에게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묻더니 청경이 수신 창구 번호표를 뽑아준다. 번호표를 손에 쥐고 부부는 한산한 객장에서 서로 멀찍이 떨어져 앉는다. 창구 뒤로 얼핏 보이는 중년 여성의 얼굴이 왠지 모르게 젖어 있는 것 같다.
띵동-
호출 버튼이 경쾌한 소리를 내자 갈라져 앉아있던 부부가 내 자리 앞으로 합쳐져 앉는다.
- 안녕하세요~ 어떤 업무 하러 오셨을까요?
애써 밝은 티를 내며 묻는 나에게 부부는 나즈막이 서류를 건내며 말한다.
- 상속이요.
최근에 상속이 자주 오는구나. 아마 근처에 있는 대학 병원에서 오시는 것이겠지.
- 아 네, 오신분은 대표 상속인..
짐짓 할아버지나 할머니께서 돌아가셨겠구나, 하며 습관적으로 물어보려던 찰나에 기본증명서 상의 낯선 숫자에 흠칫 놀라 말을 주워 담았다. 199X년.. 나와 동갑인 친구의 죽음이다.
- 예..
서류상 아버지께서 대답하신다. 순간 죄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서류로 시선을 떨군다. 부부는 이전에 다른 은행도 다녀 오신듯 서류는 꾸깃해져 있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기본증명서, 사망사실확인서, 상속인 신분증, 가족관계증명서 등의 형식상 서류를 확인한다. 사인은 병사, 나이는 199x년생, 남자, 주소지는 근처 아파트, 사망사실확인서 상으로 확인되는 병명으로 봤을때 꽤 오랜 기간 옆의 대학 병원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상속 받으러 오신 예금은 청약통장 하나 밖에 없다. 2010년도 즈음 부모님께서 만들어 주신 주택청약통장. 청약 통장을 대신 만들러 오시는 부모님을 많이 봐온 터라 숨을 고를 수 밖에 없다. 부모님은 곧 성인이 되는 아들에게 세상을 나갈 때 필요한 무기를 하나 쥐어주는 심정이셨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들은 정보로 청약을 미리 가입 해두면 좋고, 이를 위해서는 어떤 서류가 필요하고, 또 어디 은행이 좋고.. 당신들에게 낯선 그 단어를 곱씹으며, 언젠가 이 무기를 힘껏 휘두르길 바라는 심정이셨을 것이다. 그런 희망이었을 것이다.
청약은 최근인 세 달 전까지도 매달 5만원씩 입금이 되었다. 세 달 전부터 입금되지 않은 것은 병세가 악화되어 그 작은 희망의 불씨마져 꺼져버렸기 때문이었겠지.
- 여기 서명 해주시구요, 금액은 현금으로 드리면 될까요?
부부는 아무 말 없이, 서로의 눈도 보지 않고 슥슥 사인하며 현금으로 달라고 한다. 돈을 세어 이자까지 십원 단위로 달그락 거리며 돈을 내어준다. 그런 장면이 왜인지 먼저 떠난 아들의 삶을 돈으로 환산하는 것 같은 기분에 나 또한 마음이 무거워진다. 부부는 작은 목소리로 감사하다고 말한 뒤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간다.
어떤 청약 통장 해지는 무겁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부모의 발걸음도 무겁고, 업무를 처리하는 내 마음도 무겁다. 그 무거움과 반대로 어떤 삶의 무게는 한없이 가벼워서 흔적도 남기지 않고 떠나버렸다. 매달 5만원으로 이어지던 삶의 희망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모니터 상으로 깨끗하게 지워져버린 흔적을, 부부는 평생 지우지 못하고 살아가겠지.
가린 마스크 사이로 보였던 중년 여성의 젖은 얼굴이 내 얼굴로 겹쳐지는 것 같아 서둘러 호출 버튼을 누른다.
띵동-
경쾌한 호출음이 다시 객장에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