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인권 Dec 19. 2024

삶의 정거장에서

16. 아들의 집밥 사랑

16. 아들의 집밥 사랑     


#아들의 음식 성향

 늦은 밤, 아들이 집에 왔다. 추석 때 오고 3개월 만이다. 아들의 얼굴 아래로 검정 가죽 재킷이 불빛에 반짝였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보름 전, 오늘 아들이 집에 올 거라고 집사람이 말해 주었다. 저녁밥을 먹었을 텐데도 아들은 밥을 먹고 싶어 했다. 집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집사람은 어제 탕(湯)국을 한솥 끓였다. 탕국은 아들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국이다. 수능 시험 도시락 국도 탕국이었다. 아들이 원해서였다. 스물여덟 청년치고는 보기 드문 식성이다. 그러고 보면 아들의 음식 성향은 또래의 친구들에 비해 사뭇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탕국만이 아니다. 아들은 부모 세대나 익숙할 법한 음식을 즐겨 먹는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된장, 나물 반찬, 배춧국, 뭇국, 문어숙회, 돼지고기 수육, 명란젓 따위가 그렇다. 인스턴트 음식에 대한 집착이 별로 없다. 확실히 아들의 입맛은 복고풍의 집밥 스타일이다.      


집사람은 아들의 각별한 집밥 사랑을 누구보다 잘 안다. 아들이 먹을 집밥은 며칠 전부터 준비한 것이다. 집사람이 상차림을 준비하는 동안 아들이 뭔가를 내밀었다. “아빠, 선물이야.”     


아들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탕()


#아들의 선물

 속이 투명하게 비치는 포장지 속에는 108개의 대추나무 알을 꿴 염주(念珠)가 들어 있었다. 108개의 염주 알은 108 번뇌를 뜻한다. 손가락으로 염주 알을 하나씩 굴리면서 인간 세계의 108가지 번뇌를 잊는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다. 그렇지 않아도 염주를 하나 사려던 참이었다. 아들은 집사람에게도 똑같은 염주를 선물했다.      


아들은 지난 늦봄 남도(南道) 여행길에서 염주를 샀다고 한다. 진작에 가져 오려다가 그때마다 깜빡하곤 해 이제야 내놓게 됐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염주를 샀다면 분명 사찰을 방문했을 터인데 묻기도 전에 군산 동국사(東國寺)를 둘러보다가 경내(境內) 기념품점에서 골랐다고 스스로 나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무뚝뚝한 아들에게 이런 속정이 있었나, 싶어 마음이 따뜻해졌다.      


#집사람이 아들을 바라보는 눈빛의 의미

 집사람은 아들이 밥을 먹는 모습을 코앞에서 지켜봤다. 나는 안다, 그 그윽한 눈빛의 의미를. 집사람의 눈에 비친 아들의 모습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다. 집사람의 눈에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현재까지의 아들의 모습이 오버 랩 되어 파노라마처럼 어른거렸을 것이다.


맨 처음 아들을 잉태했을 때의 설렘, 핏덩이를 처음 안았을 때의 벅찬 희열, 밤잠을 설쳐가며 애간장을 태운 젖먹이 때의 기억, 천진난만했던 유년기, 질풍노도와도 같았던 사춘기, 대학 입시를 뒷바라지하던 노심초사의 심정, 문과생들이 선망하는 자격시험에 합격했을 때의 환희와 같은 흘러간 시간의 조각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투영됐을 거니까.      


아들이 깜짝 선물한 염주(念珠)


아들은 초저녁 식사의 기운이 다 풀린 데다 오랜만에 집밥의 행복감에 마음껏 빠질 수 있어서인지 두 그릇이 넘는 탕국에다 문어숙회, 미나리무침, 총각김치를 포식하면서 상차림을 깨끗이 비웠다.     


아들의 직장 생활은 몹시 바쁘다. 하나의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수개월간 밥 먹듯이 야근하고 주말에도 근무가 잦은 편이다. 회사 근처 오피스텔에서 생활하면서 바쁜 시간을 쪼개 제법 멀리 떨어진 집을 다녀가기가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번에 오게 된 것도 모처럼의 휴가를 이용해 자기 딴에는 큰맘을 먹은 것이라 그리 서운할 필요도 없겠다 싶었다. 우리집에서 아들의 직장까지는 28km 거리다.      


#모정(母情)

 이튿날, 집사람과 셋이 단골 외식 장소인 동네 음식점에서 반주(飯酒)를 곁들인 저녁 식사를 오붓하게 즐겼다. 그저께 집에 온 아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딸아, 너무 섭섭해하지 말거라. 너보다 세상을 조금 더 오래 산 오빠의 이야기를 먼저 썼을 뿐이다.


손수 차를 몰고 아들을 오피스텔까지 데려다준 집사람은 까닭 모를 애틋한 마음에 밤새 잠을 설쳤다고 한다. 모정(母情)이란 그런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