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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권 Dec 27. 2024

삶의 정거장에서

17. 김승영 작가의 눈물

17. 김승영 작가의 눈물     


#어머니의 죽음과 우울증

 작가는 끝내 눈물을 쏟고 말았다. 2024년 12월 26일, 2년 만에 만난 김승영 작가는 활기차 보였다. 어머니의 죽음에 뒤이어 숙명처럼 찾아온 우울증의 긴 터널에서 막 빠져나온 터였다. 활달한 목소리와 자신만만한 태도, 삶에 대한 불꽃 같은 의지에 그 흔적이 진하게 묻어났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어머니의 그림자에 3년이 넘게 천근만근 회한의 무게로 짓눌려 생과 사를 넘나드는 정신적 갈등과의 사투(死鬪) 끝에 가까스로 평상심을 되찾은 것이다.      


근황이 궁금할 즈음, 작가는 한 번씩 소식을 전해왔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다고. 우울증이었다. 코로나 유행병이 한창일 때였다. 작가의 어머니는 2021년 9월 26일, 병원에 입원한 지 4일 만에 황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황망하다는 표현은 작가의 입에서 나왔다. 향년 85세.


김승영 작가.


오랫동안 폐섬유증을 앓은 어머니의 임종을 지킨 작가는 당신의 마지막 숨결을 지켜보고 기록으로 남겼다. 이승과 작별하기 직전, 어머니의 심전도(心電圖) 사진을 직접 찍어 그것을 작품에 새겼다. 종로구 평창동 김종영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제16회 김종영 미술상 수상 작가전(2024년 11월 15일~2025년 1월 5일) 출품작 중 하나다.      


#어머니를 기린 두 작품

 전시 타이틀은 ‘삶의 다섯 가지 질문’. 김승영 작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듬해인 지난 2022년 김종영 미술상 수상 작가로 선정됐다. 미술관 3층 전시실에 들어서면 한쪽 벽에 ‘보라’(2024년)라는 제목의 작품이 걸려 있다. 염습(殮襲)할 때 사용하는 수의(壽衣)용 천에 보라색 실로 작가가 한 땀 한 땀 자수를 놓아 한 달 만에 완성한 작품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직선 형태로 진행되는 자수의 흐름은 숨을 거두기 직전 나타난 어머니의 심전도 모습이다. 생전의 어머니가 손수 장만한 수의용 천에 어머니가 가장 좋아한 색인 보라색 실로 자수를 수놓으면서 작가는 어머니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고 허공 속에서 헤매던 정체성을 회복하게 됐다고 고백했다. 그런 점에서 ‘보라’는 어머니와 작가의 협업이 맺은 결실이자 작가가 새로운 삶에 눈을 뜬 매개체랄 수 있겠다.     


보라’, 수의(壽衣) 천 위에 보라색 자수, 233x51cm(액자 포함), 2024. 김승영 작가 어머니의 마지막 숨결이 새겨진 심전도를 작품화한 것이다.


3층 전시실에는 눈길을 끄는 또 하나의 작품이 있다. 전시장 입구 저만치 회색빛 재로 덮인 길 위에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의자’(2024년). 숯처럼 타버려 기능을 상실한 두 의자는 작가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의인화한 것이다. 오른쪽 의자가 왼쪽 의자에 살짝 기대어 있는데, 한평생 까맣게 속을 태운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애증(愛憎)을 형상화한 애끓는 신심(信心)의 발로(發露)이자 세속적 희로애락을 정화(淨化)한 상징이다.


거칠고 두툼한 길은 나무를 태우고 남은 재에다 어머니의 유품과 아버지의 일기장을 태운 재를 섞어 만든 것으로 두 분의 삶이 남긴 인생길이다.      


#어머니의 빈자리

 전시장 인근 언덕길 아래의 단아한 음식점. 거나하게 취기(醉氣)가 오른 작가는 기어이 꺼이꺼이 눈물을 쏟아냈다. 안경 너머의 눈물을 훔치면서 작가는 아마 두 가지를 떠올렸을 것이다. 어머니를 기리는 스스로와의 전시 약속을 우여곡절 끝에 지켰다는 안도감,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되새김질하게 되는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 망각의 늪이 아무리 깊을지라도 어머니의 빈자리를 덮을 수는 없는 법이다. 어머니란 존재는 그런 것이다.      


두 개의 의자’, 유품을 태운 재, 나무 재, 숯으로 된 2개의 의자, 97x182x730cm, 2024. 김승영 작가 아버지의 삶에 기댄 어머니의 삶을 의자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평생을 햇빛 한 자락 들지 않는 음지에서 헌신적인 모성애(母性愛)와 속을 알 수 없는 지아비에 대한 일편단심의 끈을 놓지 않은 어머니에게 진 마음의 빚을 이제 더 이상 갚을 수 없기에 통한의 사무침에 몸부림친 나머지 애써 꾹꾹 눌러 참았던 눈물 줄기가 저절로 터져 버렸을 것이다. 작가는 눈물 속에 어머니의 잔영(殘影)이 비친다고 했다. 무한 희생과 헌신, 그에 대척되는 상실감 같은 것 말이다.      


 새천년의 동이 막 텄을 무렵, 김승영 작가를 처음 만났다. 동년배인 그는 천진난만하고 해맑았다. 훗날 그의 성장배경을 알고서 첫인상이 수수께끼처럼 뇌리에 남았으나 한참 시간이 지나 왜 그런지를 알았다. 나이를 헛먹었다고, 철이 없다고 여겨질 작가의 순수하고 꾸밈이 없는 성정(性情)은 다름 아닌 어머니의 품성이 화석처럼 각인된 결과란 것을.      


그림자는 빛의 그늘이 빚어낸 물체의 또 다른 형상이다. ‘두 개의 의자작품 뒤로 보이는 그림자가 한자 문()을 닮았다. 김승영 작가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걸어온 삶의 여정을 오브제로 형상화한 작품의 성격이 그림자에도 투영된 것일까.


이번 전시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孝誠)이 지극했던 작가의 사모곡(思母曲)이자 오랫동안 닫힌 아버지에 대한 마음을 비로소 열게 된 화해와 관용(寬容)의 장(場)이다. 성찰과 사유의 작가 김승영은 김종영 미술상을 비롯해 모란조각대상전 우수상(1997년), 동아 미술상 대상(1998년), 전혁림 미술상(2020년) 등을 수상했다.      


 김승영 작가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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