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의 해, 을사년(乙巳年)이 밝았다. 새해 첫날, 집사람과 함께 진관사를 찾았다. 1년 만이다. 진관사로 올라가는 길은 지난해 이맘때와 달리 붐볐다. 우리처럼 새해맞이 나들이를 나온 인파(人波)들일 것이다. 은평한옥마을을 지나 진관사 입구로 들어서자, 꼬리에 꼬리를 문 승용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주차장으로 진입하기 위해 대기 중인 차량 행렬이 뱀의 형상을 닮았다.
1년 전 오늘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저마다의 사연을 짊어진 민초(民草)들의 발걸음은 불심(佛心)의 본산지, 대웅전(大雄殿)을 향했다. 혼탁한 시류(時流)를 잠시나마 잊고 부처님의 기(氣)를 받아 스스로 한 해의 출발을 자축(自祝)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진관사로 가는 길
대웅전은 진관사 가람(伽藍)의 중심이다. 대웅전 안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를 뜻하는 삼세불(三世佛)이 모셔져 있다. 중앙에 석가모니불(현세불), 좌우에 제화갈라보살(과거불)과 미륵보살(미래불)이 각각 대웅전을 지키고 있다.
#우리나라 사찰의 입지 조건
우리나라의 사찰은 산속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있다. 큰맘 먹고 부지런히 다리품을 팔아 산길을 따라 한참 올라야 다다를 수 있는 이유다. 진관사는 구파발역에서 불과 3.3km 떨어진 삼각산 북쪽에 위치해 서울 도심에서 가깝다. 그런 점에서 진관사의 입지 조건은 특이하다. 뛰어난 접근성은 물론 유구한 역사와 대중적 인지도까지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방문할 수 있는 곳이라서다.
정문 밖에서 본 진관사 가람(伽藍)
사찰은 왜 산속에 많을까.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서기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2년 때다. 신라는 불교를 동력(動力) 삼아 삼국을 통일했고 고려 시대에 불교문화는 융성했다. 신진 사대부들이 실세로 등장한 조선 왕조가 개막하자 불교계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유교를 사상적 지도 이념으로 내세운 조선 왕조의 억불숭유(抑佛崇儒) 통치 원칙 때문이었다.
불교에 대한 가혹한 탄압이 시작됐다. 승려에 대한 강제 환속(還俗)과 사찰 지원제도의 중단과 폐지 등 강력한 배불(排佛) 정책에 도시 사찰의 명맥이 끊겼다. 쫓겨나다시피 한 승려들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으로 들어갔다. 국토의 70%가 산지(山地)인 우리나라의 지형적 특성을 쫓아 산세 깊은 곳에 절을 세워 세간의 눈을 피한 것이다.
진관사 대웅전
#고려 현종이 창건한 진관사
진관사는 고려 제8대 왕 현종(992~1031, 재위 1009~1031)이 창건한 사찰이다. 재위 초기인 1011년 현종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진관대사(津寬大師)의 공덕(功德)을 기리기 위해 창건 불사를 시작해 이듬해 가을 준공식을 열었다.
신혈사(神穴寺)라는 작은 암자에서 홀로 수행 중이던 진관대사는 12살 왕위 계승자 신분으로 자객(刺客)에게 쫓기던 어린 현종을 몰래 숨겨준 생명의 은인이다. 진관사는 6 ‧ 25 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됐으나 1960년대에 재건된 비구니 수도 도량(道場)이다.
진관사가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계기가 있다. 2009년 5월 진관사는 경내(境內)의 칠성각(七星閣) 해체 보수공사를 단행했는데 이때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1919년 3 ‧ 1 독립운동 때 사용한 태극기가 이를 입증하는 자료들과 함께 발견돼 언론에 대서특필된 것이다. 먹으로 제작한 태극기 아래에 일장기가 깔린 모습이 확인돼 민족 저항 정신을 일깨우는 독립운동의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 제2142호로 지정됐다.
2020년에는 국민 누구나 다 아는 저명인사(著名人士)의 49재 불공(佛供) 의식이 이곳에서 치러지기도 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진관사 경내(境內)의 돌계단
#확장된 진관사
천년이 넘는 역사와 단아하면서 고즈넉한 정경(情景)으로 수도권 시민들의 심신(心身)을 달래주던 진관사 일대는 은평 뉴타운 사업이 시행되면서 획기적으로 변모했다. 진관사 주변으로 대규모 주거단지와 녹지 공간, 편의 시설이 들어섰고 비포장길이던 사찰 진입로에도 널찍한 포장도로가 깔렸다. 진관사로 들어가는 곳곳이 대대적으로 정비됐고 경내 안팎의 시설도 확충돼 사찰의 외관과 규모가 이전보다 커졌다.
진관사 경내의 장독대
#우리 가족의 추억이 박제된 진관사
나는 2000년대 초, 진관사를 처음 알게 됐다. 집사람과 함께 틈날 때마다 어린 아들, 딸을 데리고 진관사에서 불공을 올리고 휴식을 취했다. 여름휴가 때는 처가 식구들과 함께 진관사 계곡을 찾아 더위를 식힌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진관사 주변 곳곳에 우리 가족의 정겨운 추억이 박제돼 있다. 어릴 때 진관사 계곡에서 이종사촌 형제들과 즐겁게 물놀이하던 기억을 아들과 딸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다양한 종류의 염주를 판매하는 진관사 기념품점
진관사에 대한 개인적 감흥은 은평 뉴타운 개발 이전의 모습에 더 끌린다. 비포장 흙길을 밟고 사찰로 걸어 올라가는 자연 그대로의 정취가 좋았고 아담하지만 소박하면서 꾸밈이 없는 사찰의 전경(前景)이 푸근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진관사를 찾는 발걸음이 이전보다 뜸해졌고 지금은 1년에 한 번, 대웅전에서 소원을 빌고 있다.
지난해 1월 1일 진관사에서 산 염주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진관사에 깃든 불심(佛心)이야 변함이 없건만,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진관사의 아련한 옛 모습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