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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는 미래의 우리입니다.

어린이날 100주년 기념 아동인권에 관하여,



공동체는 어린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2022 어린이날 100주년 기념 춘계 연합 학술대회

                                                               아동인권에 관한 학부모 토론 주제를 준비하며...



그림책 [난 원숭이다] 표지를 봅니다.

나의 눈에 비친 이 아이가
어떻게 보이십니까?


좀 그렇습니다.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있고, 왼손으로 손가락을 빠는 듯 퇴행 현상도 보이는 듯 하지요. 눈도, 코도, 입도 어쩐지 비대칭, 비균형적이면서요 반쪽 얼굴은 아직 미완성으로 보입니다. 머리는 사방으로 삐죽삐죽 뻗쳐있고 아이가 걸친 옷은 얼룩덜룩합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대체 이 아이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

베이트리체 일레마냐 | 베틀북


Q: 공동체는 어린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이처럼 어린이의 존재는 미완입니다. 그러하기에 어린이가 저마다 어떠한 생각과 느낌을 가지고 살아가는가에 대해 어른들은 결코 미리 재단할 수 없습니다. 어른들은 고유의 성장 과정에서 생긴 전형적인 프레임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성질을 갖고 있지요. 대게는 결론을 먼저 내고 그에 걸맞게 합당해 보이는 이유를 만들어 그것을 이해 관계자들에게 설득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요. 성인기에 생존하는데 필요한 매우 유리한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한 때는... 어린이였습니다.


어린이 시절에는 고정된 프레임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아니지요. 그렇지 않지요. 그냥 덤벼보고 다치고 다시 일어서고... 어린이의 인생도 나름 파란만장하답니다. 재밌어 보이거나, 궁금하거나, 또는 그냥 처음부터 그렇게 믿어버리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도 많지요. 바로 이 주인공 아이처럼요. ^^

자신이 원숭이라 믿고 있는 이 아이를 둘러싼 공동체가 있습니다. 각 집단은 가지각색으로 다양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들 중 일부는 아이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웃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인내심을 발휘합니다. 아이가 자신의 시야를 스스로 넓혀갈 수 있도록 기다려 줍니다. 충분하게 실천해보고 충실하게 느낄 수 있도록 바라보아 줍니다. 제가 독자로서 가장 감동한 부분은 아이의 믿음이 흔들릴 때조차 있는 그대로 곁을 지켜주는 존재를 발견한 순간이었습니다. 직접 부딪히고 깨달을 때가 바로 아이가 진정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믿어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시선을 확장해 보겠습니다. 부모와 아동 전문가 그리고 동물원의 원숭이들이 보이는 태도와 사촌 및 이웃들이 보이는 반응을 구별할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림책에 등장한 무리 외에 현실 속 공동체는 더 분화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학교와 선생님, 자치단체, NGO, 시민단체 심지어 도서관이나 경찰서, 병원까지 사회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공공 양육을 하고 있는 셈이지요. 그렇기에 보다 더 적극적인 난상 토론이 필요하다 봅니다. 아이의 성장과 성장 사이에 반드시 흔들림, 그러니까 내적 갈등이 일어나는데 그것을 성장을 위한 흔들림으로 오롯하게 바라봐주고 성장의 기회로써 곁을 쓱 버텨줄 수 있는 그런 사회적인 분위기와 제도가 잘 체계화되어 있는지 생각해보게 되는 대목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이를 둘러싼 집단과 집단, 기관과 기관 사이사이에 어린이를 위한 건강한 질문과 적극적인 토론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부모로서 이러한 이치를 알고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것과 모르고 그냥 사는 것은 어린이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관건이 아닐는지요.



Q: 급변하는 세상, 부모-자녀 관계에서 변해야 할 것과 지켜져야 할 것이 있다면?

교실 안이나 운동장, 엘리베이터나 동네 길, 어떤 순간에 어린이를 만나더라도 지적보다는 격려로써 어린이의 성장을 지켜봐 주면 좋겠습니다. 어린이에게 지적하고 싶을 때 혹여 어른들의 프레임에 아이를 맞추려 요구하는 것은 아닌가 자문하는 습관을 들이면 좋겠습니다. 어린이를 어른들의 프레임 안에 가두지 말고 프레임 밖으로 갈 수 있게 도와주면 어떻겠습니까? 실컷, 양껏 느껴보고 돌아올 때 그 자리에 있어주면 됩니다. 아이와 함께 양질의 질문을 속아내고, 거르고 걸러낸 순도 높은 생각과 느낌을 공유해 보는 거지요. 그렇게 자란 아이는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건강한 질문을 건넬 수 있는 미래의 어른으로 자라날 수 있지 않을는지요.


Q: 자녀의 행복을 위해 부모는 무엇을 해야 할까?

표지를 돌아와 면지를 다시 바라봅니다. 면지 전체를 뒤덮고 있는 무늬가 있습니다. 눈치 채신 분 있나요? 바로, 아이가 입고 있던 얼룩덜룩 옷 무늬입니다. 아니지요, 알록달록한 아이의 마음이지요. ^^

어른들의 시야로 가득 찬 세상이 어린이에게 언제나 유익하다는 보장이 있나요? 어른들의 프레임 안에서는 해로운 부분을 찾아 애써 피하거나 적응하거나 조율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면지처럼 어린이의 모든 것, 즉 어린이의 시야로 세상을 들여다보면 어른이나 어린이 가릴 것 없이 우리 모두에게 안전하고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지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약 100여 년 전 [소파 방정환 선생님의 어린이날 선언문]을 다시 봅니다.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보아 주시오.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하여 주시오.

이발이나 목욕 같은 것을 때맞춰하여 주시오.

잠자는 것과 운동하는 것을 충분히 하게 하여 주시오.

산보와 원족(견학, 현장체험) 같은 것을 충분하게 하여 주시오.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에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 자세 타일러 주시오.

어린이들이 서로 모여 즐겁게 놀만한 놀이터나 기관 같은 것을 지어 주시오.

대 우주의 뇌신경의 말초는 늙은이에게 있지 아니하고

젊은이에게도 있지 아니하고

오직 어린이 그들에게만 있는 것을

늘 생각하여 주시오.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 1923)



Q: 자녀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감성에 휘둘릴 때 이성을 쓸 수 있는 사람, 이성만 앞설 때 감성으로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어른, 아이 구분하지 않고 이성과 감성을 칼과 방패처럼 쓸 수 있는 연습을 함께 해 나가면 어떨까요? 그렇게 된다면 우리 사회, 나아가 이 세상에 공존하는 다양한 존재들이 보다 더 조화로운 균형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훗날, 우리들의 고민과 노력을 알아주고 역사에 남겨 줄 이들이 바로 오늘날의 어린이니까요. 그 어린이들이 바로 미래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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