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꿈꾸는 공무원 자인 Jan 23. 2023

이제는 웃으며 말하는 세무공무원 그만둔 이야기 1

의원면직을 결심 전의 나

의원면직을 결심하기 전까지 매일 절벽 끝에 한쪽 다리를 들고 서 있었다.


 세무서 총 근무 기간 11개월 중에서 9개월을 저 상태였다. 부는 바람에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상태. 잠을 잘 때 그나마 절벽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자다가 깨면 어김없이 절벽 끝에 도달했다. 지금은 그만둔 지 2년이 거의 다 됐다. 이제야 그때 일을 웃으며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지난날에 대해 써볼까 한다.


 난 전형적인 성적에 맞춰서 대학을 간 케이스다. 원하는 대학에 떨어져서 내가 붙은 곳 중에 당시 커트라인 제일 높은 곳을 갔다. 세무학이라는 학문을 20살 때 처음 알았다. 세법학은 좀 괜찮은 것 같은데 회계학은 정말 안 맞았다. 전공과 다른 진로를 생각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다들 공인회계사나 세무사가 되려고 그 학과에 왔으니까. 전공을 살리기 위해 회계학 과목을 보지 않아도 합격을 하는 9급 세무직 공무원에 도전했고 금방 합격을 했다. 세무직 공무원은 아무래도 회계보다는 세법이 중요할 거라고 혼자 생각도 했다. 학교 다니면서 합격을 했기에 합격 후 1년 동안 임용을 미뤘다. 그동안 남들 다 가는 해외여행도 갔다. 유예 기간이 끝나고 곧바로 제주도 서귀포시에 있는 국세공무원교육원에 갔다. 거의 4달 동안 긴 교육을 마치고 나는 다행히 내가 사는 지역의 세무서에 발령을 받았다. 처음에는 집에서 다닐 수 있다는 생각에 그저 행복했다. 다른 동기들은 집이랑 멀리 떨어진 지역에 발령받기도 했으니까.


 입사 후 첫 한 달은 그냥 내가 아직 적응을 못해서 힘든 거라고 생각했다. 알바만 해봤지 직장 생활이 처음이었으니까. 업무 전화를 받는 것도 상사와 함께 밥을 먹는 것도 팀장님께 결재를 올리는 것도 출장을 나가는 것도 모든 게 낯설었다. 일처리가 조금만 늦어져도 불같이 화내는 민원인 때문에 일을 빨리 배우지 않으면 안 됐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시작하는 전화를 받았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세법은 자신 있었기 때문에 법령을 숙지하는 일은 괜찮았다. 그렇게 한 달은 사무실에 익숙해지는 법을 배웠다.

 

업무 세 달 차가 되니 이젠 사수의 도움 없이도 혼자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지금 내가 사무실에서 왕따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무도 나와 함께 밥을 먹기를 원하지 않았다. 밥을 먹더라도 나와 함께 카페에 가는 것을 꺼려했다. 대놓고 싫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항상 밥 먹으러 가자고 먼저 말을 꺼낸 건 나였다. 아무도 나에게 먼저 말한 적이 없다. 다들 업무 중간중간 쉬면서 잡담을 하는데 아무도 나한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모르는 이야기만 했다. 눈치 없이 내가 무슨 말이라도 하면 그들의 표정은 안 좋아졌다. 처음엔 자책을 했다. 그러다가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기억을 더듬어 봤다. 입사 첫 주가 생각났다. 그때도 그들은 나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정확히 말하면 눈엣가시. 그들은 그냥 내가 싫었던 것이다. 9급 공무원을 하기엔 높은 학력, 세무학과에 나왔다는 이유로 과장님과 팀장님의 기대, 어린 나이. 이 모든 게 꼴 보기 싫었겠지. 짝꿍 조사관님이 출산 휴가를 들어가기 전에 열린 송별회에도 나는 초대받지 못했다. 팀 과장님이 보기엔 내가 잘 지낸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대부분의 시간은 그들과 같이 밥을 먹고 카페에 갔으니까. 퇴사하는 날 알았다. 그들은 그저 신규 직원을 왕따 시키는 선배로 보이기 싫어서 나를 데리고 다녔다는 것을. 내가 퇴사하는 그날에 아무도 나와 점심조차 먹어주지 않는 걸 보고 확신했다. 여길 나가기로 한 건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라고.


 엄청난 민원 스트레스도 나의 의원면직에 큰 비중을 차지했다. 정말로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먹은 욕보다 세무서의 11개월 동안 먹은 욕이 훨씬 많다. 정말 진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욕을 먹었다. 지금 내가 말하는 욕이 정말로 쌍욕이다. 씨발은 애교로 느껴질 정도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민원인이 두 명 있다. 첫 번째는 소득세 신고에서 만난 모 대학의 교수. 미취학 아동 때 듣던 말을 들었다. 바로 외모 지적. 세무서의 소득세 신고 도움 서비스를 받으러 온 민원인이었다. 본인이 생각한 세금보다 더 많은 액수가 나오자 불같이 화를 냈다. 여기서 한 신고가 불만이라면 세무사 사무실을 방문해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라고 했다. 그랬더니 민원인을 섬길 줄 모른다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얼굴은 반반하게 생긴 년이 어디서 대들어? 너 몇 급이야?" 

아직도 기억이 난다. 정말로 저렇게 말했다. 다행히 내 곁에 사수가 있어서 잘 말려서 돌려보냈다. 그 말을 들었을 땐 정말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심지어 퇴근 때까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집에 오자마자.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신발을 벗자마자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집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한 채 엉엉 울었다. 놀란 아빠가 와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내 인생에서 그렇게 서러웠던 적은 없었다.  

 두 번째는 부모 욕을 하던 민원인. 세무서 직원이 해결해 줄 수 없는 일을 해달라고 조르던 민원인이었다. 자세한 상황은 비밀유지의 의무 때문에 말할 수 없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 나는 완전 중간에 낀 입장이 되었다. 대뜸 한쪽 민원인이

 "너는 너의 부모님이 그런 일을 당해도 그렇게 일 처리할 거냐. 부모가 어떻게 키운 거냐."

당시 전화 통화로 말하고 있었다. 그 순간에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울고 있는 나를 보고 팀장님이 급히 오셔서 전화를 대신 받아주셨다. 당시 과장님이 나를 달래 주셨다. 생각해보니 날 달래준 동료 직원은 없었네. 집 가서 엄마 아빠 얼굴 보기가 미안했다. 딸이 회사에서 이런 말을 들으며 일한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속상할까. 이날은 이불속에서 밤새 울었다.

 위의 발언 말고도 나 때문에 이혼 위기다. 파산하게 생겼다. 살려달라. 등등 온갖 폭언과 막말을 들었다. 죄책감에 들게 하는 발언까지. 이 모든 것은 25살이 감당하기엔 너무 힘든 파도였다.


 하루하루 말라갔다. 두 눈에선 빛을 잃어갔다. 삶의 의욕은 없어지고 그 좋아했던 책도 보지 않았다. 집 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지옥에 입장했다. 늘 죽고 싶단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여기서 벗어날 방법은 정말로 없어 보였다. 그러다가 당시 사귀었던 남자 친구에게 차이고 우울의 밑바닥까지 다녀왔다가 무언가 깨달았다. 그만두면 된다. 도망치면 된다. 도망치는 것도 용기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뭐에 홀린 듯 책장 저 편에 있는 공무원 시험 서적을 꺼내 들었다. 그때부터 나의 하루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작가의 이전글 혹시 꿈이 뭐예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