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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립국 May 01. 2021

오늘의 서술, #48 나는 행복합니다

#48 나는 행복합니다


 집에 TV가 없지만 매주 챙겨보는 예능 프로그램이 있다. 복면가왕이다. 복면가왕뿐만 아니라 트롯을 제외한 여러 방송사들의 오디션, 음악 프로그램은 챙겨 보는 편이다. 이미 데뷔한 기성 가수들의 공연도 좋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는 게 좋다. 오디션의 경우 꿈을 엿볼 수 있고, 복면가왕의 경우 다른 매력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궤도에 오른 기성 가수들의 공연은 프로페셔널하지만 꽉 막힌 기분이 든다. 아티스트이지만 기계적인 느낌이랄까. 하지만 오디션이나 복면가왕의 무대에 선 그들에게서는 가수를 향한 열정과 탈락의 불안, 무대에 섰다는 기쁨과 본업으로부터 일탈의 자유 등 다양한 감정과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맨날 성만 내고 윽박지르던 김과장이 회식 후 노래방에서 멋들어지게 노래를 부르면 심심하게 충격을 받을 거다. 한 인간을 규정하는 어떤 틀이 깨지는 드라마틱한 순간이라서 그런 것일까. 그 변곡점이 나는 좋다. 


 지난 주말에도 어김없이 복면가왕을 봤더랬다. 피맥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온 이정권의 From Mark가 흘러나왔다. 처음 듣는 노래인데도 불구하고 몇 번이고 들었던 노래인 것처럼 익숙했다. 좋았다. 가사의 의미를 곱씹기도 전이었다. 그냥 분위기가 좋았다. 난 거실에서 컴퓨터로 보고 있었고, 여자 친구는 방에서 조명을 켜놓고 책을 읽고 있었다. 중간에 멈추고 같이 듣자며 볼륨을 키우고 여자 친구 옆에 누웠다. 그도 읽기를 멈추고 같이 들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두운 방에 은은하게 퍼진 노란 조명과 가사는 잘 몰라도 마음을 홀리는 노래와 함께라면 어디든 괜찮을 것 같은 그와 우리를 바라보는 오방이, 일요일 저녁을 이렇게 보내고 있자니 행복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불행복이라는 말을 자주 되뇌는 삶이었다. 행복해지기 위해선 나를 포함한 사람들을 바꾸는 대단한 혁명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지금껏 살아왔다. 쉽지 않아서 행복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저녁은 그냥 이런 날이 많다면 세상 그거 바꿔서 뭐하겠냐는 생각이 들더라. 내가 바라던 곳이 여기인가? 우리 둘만이 있는 이 작은 방의 온도만이라도 잘 맞춘다면 행복 그거 뭐 별거냐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사랑인가라는 생각과 함께.


 여자 친구가 잔소리를 할 때, 가끔 "나는 행복하다"를 몇 번이고 반복해 되뇌며 심술을 부린다. 의도가 적중해 열 받아한다. 살면서 행복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그를 만나고 나서는 가끔 행복을 느낀다. 사랑은, 전부는 아니지만, 전부일 수도 있다는 환상을 주는 요물 같다. 나는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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