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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펠 Jul 17. 2023

2023년 12월 31일에 있는 나에게 (1)

토막일기 - 1월

남의 일기장을 몰래 읽어본 적 있어?


수지가 나오는 드라마 <안나>에서 그랬지.

우리는 나만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한다고.


나만 보는 곳에 왜 거짓말을 쓸까?

혹시나 누가 몰래 훔쳐 읽을까 봐 그런 걸까?


나는 여기에 거짓말이 조금씩 섞인 내 일기장을 펼쳐 둘 거야.


23년 1월부터 아직 오지 않은 12월까지.









2023년 1월 1일

- 마음 목표


1) 되도록이면 사랑하며 살기.

2) 다른 사람들의 인정에 목매지 말기.

3) 혼자서도 잘 노는 어른 되기.

4) 걱정을 미리 사서 하지 말기.

5) 겉모습으로 다른 사람 판단하지 말기.

6) 슬픈 노래 너무 많이 듣지 말기.





2023년 1월 2일

- 장기 기증

오늘 장기 기증 신청을 했어. 23년 12월 31일의 네가 살아있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만약 이걸 읽지 못하게 됐다면 그래도 네 몸 어딘가는 새 주인을 만나 건강하게 뛰고 있기를 바라. 근데 웃긴 건 죽고 나서도 각막 기증은 무서운 거야. 그리고 사는 동안 좋은 꼴, 더러운 꼴 다 봤을 내 눈이 좀 불쌍해서 고민 끝에 안구 기증은 안 하겠다고 했어.





2023년 1월 3일

- 혼자 사는 연습


나는 요즘 혼자서도 외롭지 않게 사는 방법을 연습하는 중이야. 예전에는 혼자서도 퍽 잘 지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턴가 혼자인 시간을 못 견디겠더라고. 너는 이제 어때? 작년 한 해 동안 충분히 알았잖아, 내가 지금 당장 혼자 밥을 먹고 혼자 방에서 청승을 떨고 있더라도 내 주변에는 나를 진심으로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다는 걸. 그래서 지금 버틸 만 해. 버틴다고 말하기도 뭐 하다. 그냥 편해. 그동안 참 관계에 집착하며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2023년 1월 3일

- 연필에 힘을 빼고


편지를 쓰면서 갑자기 든 생각인데 나 연필에 힘을 너무 준다. 진하게 쓰고 싶지 않은데 계속 힘이 들어가. 예쁘게 쓰고 싶은 마음 때문이겠지. 근데 사실 힘을 쭉 빼고, 예쁘게 쓰겠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쓰는 글씨가 더 보기 좋은 거 알아? 사는 것도 그런 것 같지? 잘 살려고 아등바등 힘 빡 주고 살던 봄에는 참 많이도 울었는데 '에라, 모르겠다.'하고 내려놓은 가을에는 많이 웃었잖아. 힘을 빼는 데까지는 또 많은 힘이 들어.


아무튼 힘든 거야.

이걸 읽는 네가 잔잔하게 행복했으면 좋겠어.

아무도 아프지 않은 날들을 보내고 있길 바라.


* <나의 육체의 꿈> - 문정희

추운 겨울날에도 식지 않고 잘 도는 내 피만큼

내가 따뜻한 사람이었으면

내 살만큼만 내가 부드러운 사람이었으면

내 뼈만큼만 내가 곧고 단단한 사람이었으면.





또 2023년 1월 3일

- 지금만 할 수 있는 일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여자들은 머리를 짧게 잘라. 관리하기 힘들고, 귀찮고, 또 긴 머리를 오래 감기에는 무릎도 허리도 아플 것 같아. 그럼 나는 지금 원 없이 길러 봐야지.

지금만 할 수 있는 일들을 할 거야. 지금 이렇게 젊을 때만 할 수 있는 일.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되는 일들을 할 거야. 예를 들면 하루살이 같은 사랑?





2023년 1월 4일

- 서울 겨울 향



자라에서 향수를 하나 샀어. 조말론이랑 콜라보한 건데 잠실 자라에서 우연히 뿌려보고 너무 마음에 들어서 자꾸 생각이 나더라고. 아직 잘 쓰고 있니? 질리진 않았는지.

집에 와서 뿌려 봤는데 사실 '살까, 말까' 고민했거든? 근데 사길 너무 잘한 것 같아. 향이 날 때마다 기분이 좋아. 베를린에서 산 Balea 핸드크림을 바르면 칼크슈타인벡(kalksteinweg)으로 돌아가게 되고, 튀빙겐에서 산 Lush 바디 스프레이를 뿌리면 하트마이어(Hartmeyer St.) 길로 돌아가게 돼. 이제 앞으로 Zara의 Ebony Wood를 뿌리면 처음 서울의 겨울을 보내게 된 이 작은 기숙사 방을 떠올리게 될까? 아마 너도 함께 생각날 거야. 한 번만 더 뿌리고 이제 자야겠다. 26살로 넘어가는 너의 밤이 어느 때보다 따듯하길. 지금 내가 누워있는 전기 매트만큼.





또 2023년 1월 4일

- 나는 나를 키워


나는 나를 키워, 자식을 키우는 부모처럼. 아침마다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애를 깨워 대충 싼 김밥이라도 먹여 보내는 부모처럼. 뭐라도 먹이고 잘 씻겨 강의실로 보내지. 수업이 끝나면 수고했다고 달달한 걸로 기분을 풀어주고, 좀 쉬었다 싶으면 이제 공부해야지 하고 닦달도 하다가. 몸 상할까 봐 운동도 시켜.

나는 나를 키워. 가끔은 멋대로 자라도록 내버려 두고 싶어지기도 해. 아니면 그냥 더 자라지 않았으면 할 때도 있고, 아주 가끔은 죽었으면 할 때도 있지. 그래도 요즘 나는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나를 키워내고 있어.

지금은 이씨씨 돌계단에 앉아 식물을 키우듯 광합성을 해주고 있어. 내가 잘 키운 나는 네가 되겠지.



* <그래서> - 김소연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2023년 1월 5일

- 20대 후반을 코앞에 둔 너에게


지금쯤 멋지게 주먹을 날리고 있을까? 여기는 23년 1월 5일, 오늘 처음 복싱을 배웠어. 나는 (잘 알겠지만) 엄청난 몸치라서 기본 동작도 쉽지 않더라. 그래도 다들 친절하게 잘 가르쳐 주셔서 재밌었어. 강한 여자가 되는 기분! 하하


나는 여전히 나한테 취해 사는 습관을 못 버렸어. 여기 적진 않았지만 올해 내 목표가 그거였거든. 내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라는 생각 버리기. 근데 나는 여전히 내가 주연인 세상에 살고 있어. 나는 내가 너무 대견하고 재밌고 잘났어. 진짜 웃기지? 이런 내가 4년 전, 죽을 방법을 고민했다는 건 아마 너 말고는 아무도 안 믿을 거야.

스물여섯이 된 너는 어때? 또다시 그런 시기가 왔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봐, 또 지나갈 거야. 울다 잠드는 밤이 있어야 이렇게 눈부신 날들도 있는 거겠지. 일단은 살아. 언젠가는 올 거야, "죽지 않길 잘했다."라고 말하게 되는 순간들이.



* <연인> - 마르그리트 뒤라스

가장 싱그러운 젊은 날을,

생애에서 가장 축복받은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이따금 충격적인 시간들이 후려치곤 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나에게 얘기해 주었던 것처럼 여겨질 뿐이다.

늙어 간다는 것은 가혹했다.





2023년 1월 11일

- 질투


있잖아, 인스타를 끊은 1월은 질투가 사라진 달인 것 같아. 나를 늘 괴롭게 하는 게 바로 그 질투였는데.

너도 알겠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건 다 해보고 싶어 하잖아. 그리고 연애를 할 때도 질투가 나서 심장이 바싹바싹 아팠지. 그게 다 왜 그런 줄 알아? 우리는 이 세상의 주인공이 우리라는 생각, 아니 착각을 아직도 하고 있기 때문이야. 내가 주인공인데 감히 조연들이 주연도 안 해본 일을 한다? 주연의 남주를 탐낸다? 그건 말이 안 되고 납득이 안 되는 거지. 근데 그 질투가 가장 자주 일어나는 곳이 어딘지 알아? 바로 인스타그램이야. 나만 보고, 듣고, 만지고, 자고 싶었던 남자가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있는 걸 보아야 하고, 나는 못 가진 것, 내가 못하는 일, 내가 못 가는 곳에 있는 사람들이 널린 게 인스타잖아. 그래서 인스타를 끊었더니 마음이 편안해진 거였어. 연애를 할 때 느끼는 질투, 그거 상대를 정말 사랑해야 생기는 건 줄 알았는데 나를 너무 사랑해도 느끼는 거 같아. 소유하려고 하지 말자. 흘러가는 대로. 곁에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여유를 내 안에 만들자.




- 나이 들어감을 느끼는 순간


1. 일어나자마자 찬물이 아닌 따뜻한 물을 찾게 될 때

2. 한식이 제일 좋아지고 밥을 먹어야 제대로 한 끼 먹었다고 느낄 때

3. 전화 공포증이 사라지고 낯선 사람과 얘기하는 것도 아무 문제가 아닐 때






2023년 1월 14일

- 기도


너무 큰 사랑은 나를 죽고 싶게 하는 거 알아?

오늘 엄마아빠가 서울에 올라왔어. 다음 학기부터 나랑 동생이 같이 살게 될 자취방을 알아보려고. 우리가 지금 너무 바빠서 그 멀리서 기차를 타고 온 거야. 그 와중에 엄마는 나 주려고 샐러드 두 통에 쌀빵까지 가져왔더라.

같이 점심 먹으려고 엄마아빠 있는 곳으로 갔어. 아빠는 그마저도 내 시간을 뺏는 걸까 봐 걱정하더라. 비싸고 맛있는 밥을 먹었어. 하루종일 서울을 누비고 다니더니 결국 제일 비싸고 좋은 집으로 계약했더라. 이걸 읽는 네가 아마 지금 그곳에 살고 있겠지.

근데 나는 자꾸 울컥울컥 눈물이 나. 너무 고맙고 너무 미안하고 사랑해서 이 너무한 사랑을 내가 돌려주지 못할까 봐 그리고 돌려줄 수 있을 때쯤 더 이상 내 곁에 없을까 봐 무섭고 두려워졌어. 부모의 사랑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20대인 나도 평일 5일을 일하고 나면 주말엔 아무것도 안 하고 쉬고 싶은데 이제 60이 다 된 사람들의 체력은 사랑으로 다 커버되는 걸까. 조금이라도 덜 늙겠다고 내 눈밑에 발라 놓은 아이크림이 흘려내려.

사라지지 말아. 사라지지 마라. 아무리 기도해도 사라지겠지. 엄마아빠가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 아프다가, 울다가, 후회하다가, 비 쩍 비 쩍 말라 나도 사라지지 않을까? 사라지는 건 어떻게든 받아들일 테니, 힘들지 않게, 놀라지 않게, 억울하지 않게, 너무 아프지 않게, 자연스럽고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고통만 느낄 마지막이 되길 간절히 빌었어.





2023년 1월 19일

- 노인


‘집으로 가는 지하철. 사람들의 주름이 그날따라 길고 깊다. 무섭다. 나도 늙겠지, 흰머리가 올라오고 듬성듬성 빈 곳이 보이겠지 피부는 윤기 없이 거치르하고 뼈마디가 아프고 주름도 선명해지겠지.


온몸에 힘이 빠지는 날이 오겠지. 오늘은 캐리어를 들고 뛰어내려 간 지하철 계단을 손잡이를 잡고도 겨우 한 칸, 한 칸 디뎌야 하는 날에는 먹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자고 싶은 남자도 사라지겠지 나를 욕망하는 사람도 줄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도 줄고 나를 질투하는 사람도 줄고.


어떤 말을 해도 가르치려 드는 고지식한 늙은이 잔소리로 들리려나 싸구려 옷을 입어도 젊음으로 소화할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눈 깜빡할 사이에 스물다섯이 된 것처럼 이 젊은 날도 순식간에 흘러 오래된 몸 안에서 꺼내달라 설치겠지 그때가 되면 가장 후회하게 될 일이 뭘까 그래, 그걸 생각하면서 살아야지.





2023년 1월 31일

- 1월도 끝!


벌써 23년도 한 달이 지났다. 되도록 사랑하자고, 사랑하며 살자고 다짐한 1월, 이 정도면 제법 사랑 가득, 까진 아니지만 미워하지 않고 사랑에 가까운 것들을 한 한 달. 슬픈 노래를 너무 많이 듣지 않기로 한 건 전혀 지키지 못했어. '슬픔은 나의 연인'이라는 책 구절처럼 슬픈 노래는 나의 연인인걸.


어제 아침에는 일어나서 환기를 시키는데 아침 바람이 그렇게 차지 않아서 봄노래들을 잔뜩 틀었어. 봄노래는 거의 다 밝고 설레고 즐겁지. 근데 봄에 태어난 나는, 이름에도 봄이 가득한데 왜 맨날 죽어가는 노래만 들을까? 그래도 오랜만에 봄노래 들으니까 기분이 너무 좋더라. 오랜만에 누군가를 완전히 믿고, 상처받을까 두려워 계산하지 않는 사랑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 아주 잠시였지만.


2월은 피하지 않는 달이 되었으면 해. 하기 싫어도, 보기 싫고 마주하기 싫어도 봐야 할 것을 보고, 마주해야 할 것을 직면하고, 말해야 할 것을 삼키지 않는 2월. 네이버 운세를 보니 2월은 애정운이 모처럼 순수하고 강하게 있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된단다. 건강만 조심하면 매우 좋은 달이 된다네. 잘 먹어야지. 그래, 2월은 먹는 것도 피하지 않는 달!


사랑을 믿지 않으면서 늘 운세를 볼 때는 애정운부터 찾는 게 모순적이지. 어쩌면 믿고 싶은 걸지도 몰라. 동화 같은 사랑보다는 서로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 주는 계약적인 관계가 더 깔끔해서, 아플 일도 없어서 더 선호했지만, 어쩌면 그 와중에 진정한 사랑이 생기기를 바라고 있었을지도.


봉숭아로 물들인 작고 순수한 손톱을 가리려고 무겁고 어두운 블랙 색상의 매니큐어를 발랐어. 그런데 아무리 덧칠을 해도 그 작고 연한 꽃물 하나를 가리지 못하고 자꾸만 칠이 벗겨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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