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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펠 Jul 24. 2023

2023년 12월 31일에 있는 나에게 (3)

토막 일기 - 3월

2023년 3월 18일

순례자의 길


오랜만이다. 하고 싶은 일이 생겼어.

스페인 순례길에 가야겠어.그곳은 살다가 길을 잃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래.

한 달 동안 혼자 걸으면서 내 속에 있는 모든 생각들, 걱정들, 거만과 오만과 욕심들, 불안과 기대들을 모두 비우고 정리하고 나에 대해 더 제대로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해. 내가 대체 뭘 원하는지, 엄마아빠가 원하는 거 말고, 진짜 내가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게 뭔지 그걸 알아야겠어





2023년 3월 19일

C에 대하여


요즘은 C를 보는 재미로 살아.

언제부터였더라.

분명 처음엔 제일 무섭고 같이 있기 싫은 사람이 C였거든?


근데 아마 그날이었던 거 같아. 처음으로 저녁이 아니라 한가로운 점심시간에 운동하러 간 날.

그때 C랑 단둘이 있었거든? 별 거 아닌 얘기들을 하면서 둘이 까르르거리고 나서부터였던 거 같아.

그 후로 아는 척해주면 좋고 같이 운동하면 더 좋고.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데 입이 안 떨어져.


내일은 꼭 이 일 얼마나 했는지 물어봐야지!


맞다, M은 곧 결혼한대.





2023년 3월 20일

오바해서 쓰는 사랑 이야기



이게 무슨 감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이전의 짧은 만남들이 다 가짜였다는 거야. 이전에, 그러니까 소유욕으로 가득 차 "네가 감히"를 입에 달고 살았던, 그러면서 "이것도 사랑이야"했던 지난 관계들이 얼마나 건강하지 못했던가를 느끼고 있어.


거기엔 사랑이 없어.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곳에 사랑 비스무리한 게 있다면 모를까.


"우리 이제부터 달달한 거 시작하는 거다? 하나, 둘, 땅!" 해서 시작된 관계들 같아, 이전에는.

그래서 자꾸 신호에 맞춰 잘 따라오고 있는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뒤돌아 보게 돼.

왜냐면 그 신호가 애초에 사랑으로 발사된 게 아니니까. 언제 탈주해도 할 말이 없거든.


그러니까 지금까지 나는 사랑을 한 게 아니야.

나는 나 자신을 실험하고 증명하는 데에 사랑의 형태를 이용한 거야. 내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얼마나 매력적이고 대단한 사람인지를 증명하려고 누군가와의 관계를 도구로 이용한 거야. 그러니까 그게 증명되는 순간, 도구는 사라지고. 만약 원하는 만큼 증명되지 않으면 분노가 생기는 거지.


이번에는 진짜 사랑일까? 사실 아직 모르겠어. 외로워서 그럴 수도 있고. 뭐 이유가 어찌 됐든, 나는 요즘 오랜만에 풋풋한 마음들을 느껴.


오늘은 눈이 마주쳤는데 참지 못하고 활짝 웃어 버렸어. 근데 같이 웃어주는 거야, 활짝.

그 사람은 왜 웃었을까? 아니, 나는 왜 숨길 생각도 않고 그렇게 대뜸 마음을 활짝 보여줬을까?

이걸 읽는 12월의 너는 아마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 "그 정돈 아니었는데 또 오바해서 썼네."

그래, 그럴 수도.

봄이라서 그럴 수도 있어. 누구든 사랑해 보겠다고 다짐하게 되는 3월이잖아.



* <환신의 고백> - 김소연

아,

내 심장이 쿵쿵쿵 걸어가는 소리

너에게 들렸으면

시끄러워 잠 못 잤으면

일어나 너는 봉창이라도 두드렸으면

난 봉창이 되리

무색 민무늬 영혼이 네 손때로 까맣게 더럽혀진다면.





2023년 3월 21일

온몸이 웃음으로 가득 찬 기분


나 요즘 시도 때도 없이 실실거리는 거 알아? C 생각만 하면 너무 웃음이 나. 이걸 읽을 네가 기억할지 모르겠다. 스물다섯의 봄이 얼마나 감당 안되게 들뜨고 신났는지.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매일매일 쥐똥만큼 마음을 주다가 어제는 웬일인지 마구 쏟아내서 광대가 주체가 안되더라. 하나씩 다 적어볼래. 이 나이 먹고 연애일기 쓰는 게 유치하고 뭐 그렇지만, 어쩌겠어. 머릿속에 온통 그 생각뿐인데.


온몸이 웃음으로 가득 찬 기분이야.

그래서 막으려고 해도 온 구멍으로 실실, 아니 픽픽 튀어나오는 거야.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이렇게까지 설렐 일인가 싶고.


그 사람 퇴근하면 어디 가서 뭐 할까, 술도 안 좋아하는데. 사랑은 이런 걸까, 일기장을 맨 마지막 줄까지 남김없이 쓰고도 할 말이 남아 잠이 안 오는 거 말이야.





2023년 3월 23일

질투


짜증 나 죽겠어. 어떻게 해야 되지.

아니 어쩌다, 왜 이렇게까지 됐지? 이게 맞나 싶어.

사랑을 이야기하는 글은 한없이 유치해지는 걸 느끼니





2023년 3월 24일

매일 마주친다는 이유만으로 도착한 사랑의 협곡


오늘 C가 다쳐서 피가 났어. 옷에도 다 묻었길래 말해줬더니 아무렇지 않게 등에도 묻었냐고.

어쩌다 다쳤는지 말해주길래 안 아팠냐고 물었는데

또 그 웃겨 죽겠다는 표정으로 빵! 질문이 너무 웃기다고..

대체 뭐가 웃긴 거야?


* <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 이병률


사랑으로 인생을 뒤집을 수 있다는 카드를 알고 있다면

그 카드를 쥐고 사랑에 확률을 걸자.

사랑이라는 유리조각을 기꺼이 밟자.

사랑만이 우리를 살아 있게 하고

사랑만이 우리를 더 나은 쪽으로 견인한다.


실수를 통해 사람은 세부적으로 가까워지고,

눈동자의 안쪽 감정을 궁금해하면서 서로가 만난다.


한 번도 마음에 둔 적 없는 유형의 사람을

그저 매일 마주친다는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사랑의 협곡에 도착하고 만다.





2023년 3월 27일

내리막길


보긴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야. 스물여섯의 너는 그런 즐거움을 여전히 갖고 사는지 궁금해.



근데 나 요즘 운동 말고는 정말 하는 게 별로 없어.

'이렇게 열심히 안 산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무기력하게 살고 있어. 지금 좀 논다고 아무도 내 인생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욕하진 않아. 그리고 욕하면 또 어때. 뭐라도, 뭐라도 되겠지. 어떻게든 살아는 있지 않을까. 우울해. 인생이 망하고 있는 거 같아.

망하는 내리막길을 달려가는 기분이야.  





2023년 3월 28일

멸치볶음


저녁 먹다가 울었다. 엄마가 깻잎이랑 멸치볶음, 김치볶음 만들어서 택배로 보내줬는데

엄마 반찬을 영영 먹지 못할 날이 언젠간,

너무 싫지만 꼭 반드시 올 거라는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났다.


오늘 oo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스물셋, 그 애의 스물셋은 앞으로 어떻게 기억될까.

꽃이 피고 봄바람이 불 때도 눈물이 나겠지.

3월은 이제 아픔이겠지.

그래도 언젠간 봄이 봄 같은 날이 오길.

따뜻하고 설레는 봄이 그 애에게 다시 오길.


우리는 누구나 죽잖아.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이렇게 노을이 예쁘다고 전화를 걸어 시답잖은 얘기로 꺌꺌 거릴 수 있을 때, 더 자주 보고, 더 자주 안고, 더 자주 말해야지.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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