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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은규 Jun 21. 2023

경계경보, 베이글, 그리고 가족

  삐이익 삐익- 핸드폰에서 울리는 재난 문자 알림을 듣고 눈이 번쩍 떠졌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얼른 핸드폰을 집었다. 


 [서울특별시] 오늘 6시 32분 서울지역에 경계경보 발령. 국민 여러분께서는 대피할 준비를 하시고, 어린이와 노약자가 우선 대피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경계경보? 눈만 떠진 게 아니라 정신도 확 떠졌다. 경계경보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심각한 일이라는 건 직감적으로 잘 알았다. 대피라니...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뛰어간 곳은 안방이었다. 엄마도 문자를 받고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밖에서는 시끄럽게 울리는 사이렌 소리, 방송 소리와 태연하게 갈 길을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공존하고 있었다. 방송에 귀 기울여 봐도 하나도 들리지 않아 일단 급한 대로 네이버에 들어갔다. 근데 웬걸. 네이버가 접속되지 않는다. 난생처음 보는 화면이었다. 그때 공포가 밀려왔다. 뭐지, 벌써 공격을 해서 기지국이 파괴되었나. 이상하다. 인스타그램은 잘 들어가지는데 네이버는 왜 안 되지. 일단 대피를 해야 하니 언니를 후다닥 깨웠다. 


 아빠는 이미 출근을 한 후라, 여자 셋이서 안방에 모였다. 안방에 모여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짐 싸서 대피해야 하는지, 간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 지정된 대피 장소를 찾아보던 중, 경계경보 해제 메시지가 왔다.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긴장이 풀리자 입도 터져버렸다. '진짜 전쟁이면 우린 이미 죽은 거 아니냐' '대피하면 괜찮지 않냐''우리 집은 국방부 근처라 정말 미사일을 쏘면 우리는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다.' 와 같이 반박에, 재반박이 이어진다. 다시 또 재난문자가 발송되는 날엔, 그땐 우주 발사체가 아닌 정말 미사일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런 걱정과 상상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때 'N'스러운 언니가 질문을 던졌다. "내일 전쟁이 난대. 근데 너만 그 사실을 알고 있어. 그럼 넌 당장 내일 뭐 할 거야?" 극 S인 나도 더 이상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진지하게 고민했다. 일단 전날이면 그냥 공포에 떨다가 죽는 거 아니냐는 말을 했다가 타박만 들었다. 그건 질문의 요지가 아니지 않냐, 그런 현실적인 생각은 접어두고 무얼 하면서 삶을 끝내고 싶은지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럼 나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 우리 가족 넷이 모두 좋아하는 동네인 북촌에 갈 것이다. 북촌에서 나와 엄마가 특히나 좋아하는 정독 도서관에 먼저 가야지. 정독 도서관은 그때의 계절을 느끼기에 최적의 공간이다. 봄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여름에는 초록초록한 나무들 덕분에 여름을 느낄 수 있다. 그늘 속 벤치에 앉아 새소리를 들으며 힐링하기 딱이다. 그곳에서 가족들끼리 맨날 하는 농담을 주고받아야지. “아빠가 엄마를 좋아하네~” 와 같은 당연하지만 우리끼리는 재밌는 이야기들. 


  실컷 이야기를 하다 서촌 쪽으로 저녁을 먹으러 갈 것이다. 아빠가 출장 가 있는 사이에 우리 셋이서 먹었던 만두전골 집에 가야지. “아빠도 같이 오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오네~”라는 말도 빠지지 않고 할 것이다. 거기는 만두전골도 맛있고 수육도 맛있으니 4명이서 딱 그렇게 시켜 먹어야지. 집 가는 길엔 ‘런던 베이글’에 들를 거다. 테이크아웃은 별로 안 기다려도 되니, 웨이팅을 싫어하는 아빠도 이해해 줄 것이다. 우리가 맨날 맛있다고 자랑만 하고 못 사준 베이글 맛을 꼭 보여줘야지. 


  그리고 너무 늦지 않은 시간에 집에 가야겠다. 엄마는 사람 많은 대중교통을 싫어하니까. 집에 와서 베이글을 나눠 먹으며 행복해하는 부모님 모습을 눈에 담아야지. 그리고 좀 쉬다가 슬금슬금 방에서 나와 ‘나 혼자 산다’를 같이 봐야지. 가족끼리 거의 유일하게 잘 보는 프로그램이니 이왕이면 전쟁 전날이 금요일이었으면 좋겠다. 함께 티비를 보며 웃기도 하고, 요즘 애들은 저런 거 하냐고 묻는 질문에 대답도 하면서 그 순간을 즐겨야지. 그리고 다들 잘 자라며 각자 방에 들어가겠지. 나는 그때 자러 가는 엄마 아빠의 모습을 보며 눈물이 날 것 같다. 눈물을 삼키고 혼자 방에 가서 일기를 써야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하루였다. 다들 잘 자길.” 


 전쟁 전날을 상상해 보니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가족과 행복한 시간뿐이구나’ 생각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원하는 직업도 물건도 돈도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가족 모두, 함께 행복하게 하루를 보내는 것. 덕분에 모두 행복한 기억을 가지고 삶을 마감하는 것. 어떻게 될지 모르는 전쟁 전날, 짐을 싸고 도망을 계획하기보단 아무렇지 않게 행복한 기억을 담는 하루를 택할 것이다. 물론, 불행과 이별은 이렇게 준비된 후에 다가오지 않는다. 현실이 그렇다는 것을 알기에, 상상 속에서나마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이 일이 있고 난 이후, 나는 일상에 감사함을 느끼며 살아간다. 할 일이 많고, 스스로 예민해질 때 그때 아침에 느꼈던 공포와 사이렌 소리를 생각한다. 평화롭게 눈을 뜬 것에 감사하며,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 한여름이 되기 전에, 조만간 가족끼리 서촌에 가야겠다. 늦기 전에 아빠께 맛있는 베이글 사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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