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에 대한 개인적인 해찰
얼마 전에 심야영화로 <엘리멘탈>을 보았다. 이 영화는 '원소들이 사람이면 어땠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애니메이션이다. 원소세계관을 바탕으로 불, 물, 공기, 흙이 사는 엘리멘탈 시티에서, 절대 섞일 수 없어 보이는 불인 앰버와 물인 웨이드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이 작품의 매력은 엘리멘탈 시티라는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누구보다 현실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점이다. 앰버 가족의 삶은 이민자들의 삶을 보여주고, 절대 함께 할 수 없어 보였던 앰버와 웨이드의 만남은 사랑에 대한 희망을 느끼게 해 준다.
피터 손 감독님이 한국계 미국인이라 그런지, 한국인의 정서나 문화를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한국 특유의 '고생' 정서, 아빠를 부르는 호칭이 한국어 발음과 비슷한 '아슈파'라는 점, 고향을 떠날 때 큰 절을 올리는 모습 등 애니메이션에서 한국 문화를 보는 건 신기한 경험이었다. 색감, 영상미, 창의적인 발상들을 보며 너무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했고, 흐뭇하게 영화를 관람했다.
그렇게 영화가 끝나고 "너무 재밌지 않아?"라고 하며 언니를 봤는데, 울고 있는 언니를 발견했다. 오잉? 대체 어느 부분이 그렇게 슬펐지?라는 생각에 물어보니, 부모님의 고생을 생각해서 어쩔 줄 모르는 앰버의 마음과 부모님의 사랑에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다. 영화를 다 보고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사진과 함께 '오랜만에 웃으면서 본 영화'라는 멘트를 써서 올렸더니, 다들 울면서 봤다며 "혹시 너 T야?"라는 DM을 여러 번 받기도 했다.
'혹시 너 T야?'는 요즘 가장 유행하고 있는 밈이다. 공감을 잘 안 해주거나, 영혼 없이 리액션할 때 손가락으로 알파벳 T를 만들어 '혹시 너 T야?'라고 물어본다. MBTI의 유행이 이제 좀 잠잠해진 줄 알았는데, 어느 유튜버가 시작한 이 밈으로 다시 한번 재점화된 듯하다.
MBTI의 4가지 알파벳 중 T/F는 공감능력에 대한 상징으로 쓰이고 있다. T는 이성적, F는 감성적인 사람이라고 흔히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T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공감능력이 부족하다는 편견은 조금 억울한 면이 있다. <엘리멘탈>을 보고 울지 않았던 나도 T 95% 인간이긴 하지만, 여기에 대해 변명 아닌 변명을 해보자고 한다.
먼저, '공감'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자.
공감 : 대상을 알고 이해하거나, 대상이 느끼는 상황 또는 기분을 비슷하게 경험하는 심적 현상
(출처 : 네이버 사전)
사람을 이해하고, 그 사람이 느끼는 기분을 비슷하게 느끼는 것. "한 사람을 이해하는 게 과연 쉬운 일일까?"에 대한 질문으로 '공감'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 본다. 흔히 공감능력이란 일상생활 속에서 리액션으로 치환되기 십상이다. "아 진짜? 그랬어?" 혹은 "힘들었겠네/ 재밌었겠네"와 같은 공감의 말을 해주지 않아서 영혼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감의 본질은 리액션, 즉 말이 아닌 마음에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공감은 눈에 쉽게 보이지 않는다.
내가 가족 외에 깊이 '공감'이라는 것을 했던 첫 기억은 친구의 강아지가 무지개다리를 건넜을 때다. 정말 아끼고 오래된 친구였고, 그 친구와의 시간만큼 강아지와의 추억도 쌓여 갔다.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우는 친구를 보며, 정말 슬프고 가슴이 아팠다. 몇 날 며칠을 그 친구 모르게 울었다. 집에서, 학교에서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났다. 주변 친구들은 너 강아지도 아닌데 왜 이렇게 우냐고 했지만, 그 친구의 슬픈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최근에 느꼈던 또 다른 공감의 순간은 학교 축제에서, 싸이가 부르는 '언젠가는'이라는 곡을 들었을 때다. 앞에는 '챔피언', '강남스타일'을 부르며 신나게 뛰어놀다가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순간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바로 가사 때문이었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하지만 이제 뒤돌아보니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헤어진 모습 이대로
지금도 취업을 준비하고 있긴 하지만, 이땐 취준을 위해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시작한 때였다. 불안정한 미래를 최대한 생각하지 않으려고 나를 더 혹사시키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때 싸이가 나이가 들어서, 비로소
과거의 힘들었던 자신에게 해주는 이야기인 것 같아 눈물이 핑 돌았다. 지금 힘들지만 젊은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순간인지, 나중 되어서는 이 순간이 싸이처럼 그리워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공감은 현재와 과거, 시점을 가리지 않는다. 다만, 싸이의 과거와 현재의 나의 상황이 다르지 않기에 공감할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이 있을 때, 혹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상황이 다른 사람에게 보일 때 공감은 발생한다. 하지만 사람이 다른 사람을, 다른 상황을 100% 이해하고 공감하기엔 오랜 시간과 공이 들어가는 일이기에, 내가 느낀 공감들도 나만의 생각 안에서 한 공감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사람에게 공감을 한다는 것은 귀한 현상이자, 조심스러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마음과 상황을 내 기준에서 생각하여, 나와 비슷하지 않냐고 슬쩍 손을 내미는 일. 그래서 나의 공감은 누구보다 신중하고 진지하다. 그래서 나는 '공감능력이 없는 사람' 이라기 보단 '공감하는 것에 신중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