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비인후과 질환의 경우 일상에서 삶의 질이 현저히 저하되는 경우가 많다. 겨울철에 피해 가기 힘든 감기는 바이러스에 의해 코와 목 부분을 포함한 상부 호흡기계의 감염으로 가장 흔한 급성 질환이다. 소홀히 대응할 질환이 아닌 것이 재채기, 코막힘, 콧물, 인후통, 기침, 두통 및 근육통과 같은 증상이 수반되면 38도 이상의 고열과 함께 오한까지 나타난다. 증상도 개인별로 천차만별이고 길게는 2주까지 증세가 지속하기도 하니 참으로 고약하다.
빠르게 맞는 수액주사의 위험성
한국사회 ‘빨리빨리’ 문화 젖어
속도 다르다고 비난받지 않아야
느림은 무능 아닌 기본기와 배려
독감이 유행하는 근간에는 수액주사 처방을 원하며 내원하는 환자 수가 부쩍 늘었다. 감기에 걸릴 때마다 습관적으로 수액에 의존하는 환자도 있다. 그러나 수액주사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이미 몸에 있거나 새로 발생한 질환과 인체 이상을 발견하는 데 큰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 의사 처방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증세가 심각하지 않아 항생제 오남용을 걱정하며 약 처방을 해도 무턱대고 수액주사를 빨리 놔달라 요구를 할 땐 대략 난감이다. 이럴 때 한국인은 급해도 너무 급하다.
한국인은 한반도 특유의 지리적, 사회적 환경에 더해 최근 100년간 일어났던 역사적 비극을 극복하기 위한 변화가 몸에 밴 탓인지 ‘빨리빨리’ 문화는 세계인들에게 익히 알려진 기질이다. 이런 성향은 일부 환자들의 수액주사를 맞는 태도에도 어김없다. 서둘러 일을 봐야 하니 수액주사 맞는 속도를 빠르게 해달라는 환자의 요구는 이제 낯설지 않다.
수액제는 혈관을 통해 직접적으로 투여되어 빠른 반응을 나타내므로 투입 속도는 나이, 체중, 증상에 따라 적절해야 한다. 환자의 요구대로 너무 빠른 속도로 주입하면 혈압 상승과 호흡곤란, 쇼크 등이 유발될 수 있다. 특정 성분에 알레르기가 있거나 체질이 민감한 사람은 특히 주의를 요한다. 그러나 성질 급한 환자 앞에서는 소귀에 경 읽기이다. 잠시 간호사가 자리를 비운 사이 임의로 투여 속도를 빠르게 조절하는 환자가 한둘이 아니다. 이 경우 치명적 위험성에 노출된다. 수액이 투입되는 정상적 과정을 마냥 옆에서 지켜 보고만 있을 수도 없으니 늘 노심초사다.
언제부터인가 상품과 서비스를 누릴 자유를 더 빠르게 주는 행동은 모두 혁명이 되고 있다. 5분이라도 더 빠른 서비스는 혁명이라는 단어를 독점한다. 병원도 속도전의 경쟁에 뛰어들었다. 검사 결과의 속도와 진료 시간의 회전율은 병원 서비스의 경쟁력이 되었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그 혁명은 일상이 되었지만 동시에 자연스러운 일상에서 멀어지고 있다. 피곤하고 경쟁에 지쳐 있다는 방증이다. 기본기에 충실한 느림의 미학은 점점 설 자리가 없다. 빠름과 느림이 공존하며 줏대 있는 기본기 속에 창조적 상상력이 풍성해지는 사람의 마을을 꿈꾸는 것은 세상 물정 모르는 이로 치부되기 일쑤이다.
좀 더 느리게 일해도 뒤처진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속도가 다르다고 비난 받지 않는 사회가 돼야 한다. 모든 사람을 시간에 쫓겨 살게 한 이상한 산업 사회가 우리 앞에 실존해있다. 속도전 경쟁으로 치면 세계 최강 국가다. 자부심 넘치는 국가적 속도전에 취해서 한국 사회 이면의 어두운 현실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모두가 못내 걱정은 하지만 속도만이 경쟁력이라 확신하는 사회적 확신 앞에선 무기력하다.
속도전을 동반하면, 불행한 결과를 수반한다. 느리더라도 제대로 하면 된다고 말해 주지 않는 사회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유기적 결합은 요원하다. 헐떡이는 숨을 잠시 고르고 주변을 돌아보며 삶의 속도를 늦춰야 다른 가치들이 보인다. 그럴 때 자연의 시간을 닮아 갈 수 있고 느리지만 제대로 된 기본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인체도 그렇다. 면역도 느림의 미학으로 더 강화된다.
의사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피상적인 차원에 머물렀다는 반성은 한 적이 있는데, 편향에 빠졌다는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제대로 된 편향을 갖지 못한 것이 맞겠다. 그것은 느리면 뒤처진다는 편향이었다. 한국 사회를 이끄는 힘은 오로지 속도라는 인식의 오류였다. ‘빠름’은 절대적 미덕이며 삶의 모든 면에서 ‘빨리빨리’ 움직이는 것은 능력과 동일시됨을 당연시했다. 돌아보면 빨라서 잘된 일보다 실수한 적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종일 눈코 뜰 새 없이 돌아가는 병원에서 느린 것은 ‘무능력’으로 치부되는 기이한 의료 현상을 성찰하지 못했다
프랑스 작가 피에르 쌍소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느림은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은 삶의 방식임을 이야기한다. 지극히 온당한 말씀. 느림은 빠름의 반대편에 있거나 빠름에 적응할 수 없는 무능력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광란의 속도전에 휘둘리며 모두의 세상살이가 혼미한데 새해엔 아다지오의 미학도 대접받아 마땅하다. 때론 느린 것이 더욱 안전하고 좋은 것일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환자들이시여, 부디 삶이 고달프고 숨 막히게 분주하시더라도 수액주사만큼은 아다지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