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로 Apr 12. 2023

봄은 게으르지 않다

게으른 것은

봄은 한 번도 게으른 적이 없었다. 


분홍의 꽃을 피우고, 초록의 잎을 틔우는 봄을 기다려온 이들은 안다. 봄은 한 번도 게으른 적이 없다는 것을. 그 봄을 기다렸을,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은 봄이면 잠이 아닌 삶을 다시 시작한다. 작은 씨앗은 조금은 보드라워진 흙을 뚫고 뿌리를 내린다. 차가운 바람이 잦아들면 작은 잎들이 커다란 나무 곳곳에서 고개를 내민다. 보이지 않는 땅속의 뿌리들은 힘껏 양분을 끌어올린다. 그렇게 소리 없이 힘을 다 하는 계절이 바로 봄이다.


그런데 나에게 봄은 게으름을 떠올리게 했다. 햇살은 나른함을 가져오고, 50킬로의 속도를 30킬로로 줄이게 만든다. 마치 봄날 꽃구경을 위해 속도를 줄이는 자동차처럼 말이다. 그래, 나는 어쩜 그 꽃길의 자동차일 수도 있다. 햇살을 느끼며 초속 5cm로 낙하하는 꽃잎을 보기 위해 속도를 줄인 자동차말이다. 그러다 문득 '아차차!' 가던 길을 떠올린다. 늦어진 속도만큼 게으름을 탓한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냐고 말이다. 스스로를 채근하며 손 놓았던 것들에 눈을 돌린다. 


그러다 깨달았다. 눈에 보이는 무언가의 속도가 늦어졌다고 해서 게으르다는 것이 아님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결과물이 당장 보이지 않을 뿐이지 나는 무언가를 계속해서 하고 있으며, 그것은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요즘 나는 매일 아침 새벽 달리기를 한다. 아주 짧은 거리이지만 뛰었다 돌아오면, 몸은 뛰었다는 생색을 무척이나 낸다. 숨은 헉헉 입을 통해 나오고, 발목부터 종아리까지 욱신함이 올라오며, 모자 속 이마에는 땀이 샘솟는다. 사실 새벽시간은 나에게 꽤나 소중하다. 처음 새벽기상을 시작했던 2년 전, 새벽 달리기는 새벽시간에 정당한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1년이 지나자 새벽에 하고자 하는 일들이 계속 생기면서 달리기의 지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렇게 1년을 보냈더니 몸에서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둔해진 몸은 물론이고 수치적으로 속일 수 없는 숫자가 나를 놀라게 했다. 그래서 다시 뛰기를 선택했고, 나는 뛰고 있다.


이렇다 보니 그전 1년 동안 새벽에 하던 일들이 달리기에게 밀려나며 자리를 못 잡고 헤매기 시작했다. 정착하지 못하고 점점 속도를 잃으니 성과도 떨어졌다. 그러다 보니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하지 않은 듯한 찜찜함에 게으름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게으르지 않았다. - 물론 진짜 게으름이란 이름을 붙일 만큼의 뒹굴거리는 시간을 가지기도 하지만, 이것 또한 필요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소리 없이, 봄처럼 힘을 다하고 있었다. 사실 달리기는 뛰고 왔을 때의 상쾌함 말고는 눈에 보이는 결과를 당장 가져오지는 못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지금 열심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뿌리가 자리를 잡고 양분을 끌어올리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잎이 나고 꽃이 피리라는 것을 안다. 혼자 앞서가던 것들의 속도를 조금 늦추어 함께 가야 할 것들에 에너지를 나누어준다. 


혼자 가면 빨리 가고, 함께 가면 멀리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조금 늦더라도 지치지 않고 함께 갈 수 있도록, 서로의 에너지를 나눈다. 나에게 봄은, 시작에 관대한, 그럴 수 있는 계절이니까.





작가의 이전글 또 보고 싶은 것이 생긴다는 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