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에는 상자가 크기별로 아홉 개나 있다. 아주 어릴 적 잡지에서 가지고 싶던 것을 오려서 넣어둔 상자와 여행 후 남은 티켓과 기념엽서를 담아둔 상자, 눈에 띄지 않도록 구분 없이 잡동사니를 숨겨둔 상자 등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편지함이다. 가장 활발히 편지를 주고받았던 여고시절 때는 물론이고, 스무 살이 넘은 후에 받은 것들까지 모두 이 상자에 들어있다. 그래서 편지함의 뚜껑을 열 때면 항상 설레이고, 덮을 때면 늘 미소가 번진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행복이 번진다.
오늘은 방 청소를 하며 잡동사니 박스를 모두 꺼냈다가 역시나 편지함을 열었다. 그러다 A3 공책 반장을 칼로 댕강 잘라낸 편지 하나가 눈에 띄었다. 고 3 때 받은 생일 축하 편지였다.
생일이네.
umm.. 우선 생일 축하하고! …(중략)
내 생각인데 넌 진짜 노력파인 것 같어. 진짜로. 열 달 동안 널 관찰해온 결과론이야. 비록 디테일하게는 못했지만..
솔직히 처음에 아 너랑은 친해지기 좀 벅차겠다.. 큰일이네 젠장... 이랬는데 미술이 나를 도왔어. 신이시여 T^T
미술에 대한 열정은 물론이고 공부도 포기 안 하고 뭐든 열심히 하려는 너 보니까 공부에 대해 많은 집착 없었던 내가 집중하고 그랬거든. 모.. 그랬었다고 ^^..ㅋㅋㅋ
너 되게 냉랭할 줄 알았는데... 역시나!!
장난이고 그럴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내가 공부가 잘 안 되거나 자신 없어할 때 친한 친구도 안 해주던 진로 얘기해주고, 위로해주고 아.. 감동이었어 넌 임마!
난 니가 진짜로 잘 되길 바라. 그래서 나중에 커서 이왕이면 모르는 사람보단 아는 사람하고 일을 같이 하는 게 더 나으니깐 아 좀 제발 둘 다 잘나자.
넌 분명히 성공할 거야 임마. 니 노력과 열정 보면 내가 뛰는 놈이면 넌 나는 놈이었어.
아.. 팔 아프다. 이렇게 팔이 닳도록 널 칭찬하고 있는데 넌 자고^^..
어쨌든 얼마 안 남은 거 힘닿는데 까지 열심히 해. 나도 할게.. 나도.. 해.. 해볼게..ㅋㅋ 생신 축하드려요.
아! 명심해. 넌 나는 놈이란 걸. 알았지 임마! 그럼 이만 쓸게.
- 미술 동급생이 -
P.S 나중에 잘 되면 꼭.. 밥 한 끼 사줘...
보통 여고 시절에 받은 편지들을 보면 마냥 재밌었다. 중요한 것이라곤 수능 밖에 없었던 순수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섞인 웃음을 짓느라 바빴다. 여태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이 편지를 읽는데 눈물이 났다. 툭 흐른 것이 아니라, 볼이 부르르르 떨릴 만큼 북받쳐 올랐다. 다소 과하게 밝은 말투를 읽어 내려가는데도 눈물이 멈추지를 않는거다. 나도 기억 못 하는 내 모습을 누군가가 진심을 담아 적어주었다는 것이 고마웠고,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와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주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거만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무엇을 하면 대부분 평균 이상은 했었다. 그래서 평생을 자만했다. 의도했든 안 했든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하질 않았다. 그래서 내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한 것이 무엇이냐 물으면 선뜻 대답하기가 힘들다. 내 인생 안에서 열심히 한 것들에 순위를 매길 수는 있어도, '죽도록 열심히 했다'라고 하는 절대적인 의미의 노력을 한 적이 있던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저 친구의 말대로 나도 내가 나는 놈인 줄 알았나 보다.
그런 내가 이십 대 중반이 넘어서면서 실패를 겪고, 점점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게 되니 열정이 사라지면서 얼마 없던 노력마저 게을리했다. 그리고는 내가 무언가에 부딪힐 때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며 쓰러져버렸다. 쓰러진 나를 남 보듯 보며 그냥 원래부터 열정이라곤 없는 의지박약이라고 치부해왔던 것 같다.
그런 내게 열정이 있다고,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나를 보고 영향을 받았고, 자신이 힘들어할 때 가장 친한 친구보다 나에게 위로를 받았다고 하는 친구를 만난 것이다. 비록 12년 전의 신원미상의 친구이지만 위로를 받았고, 용기도 얻었다. 그녀의 추신대로 아직 잘 되지는 않았어도 이 친구에게 꼭 밥 한 끼 사주고 싶어졌다. 내일 같은 반이었던 친구에게 연락해 해맑은 말투의 미술 동급생을 기억하느냐고 물어볼 참이다.
언젠가 한 친구가 내게 물었다. 너는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냐고. 나는 내면의 것을 잘 들여다보면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 상자는 가득 차있어야 하고, 그것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여전히 오늘처럼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