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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규리 Feb 06. 2022

편지함

 내 방에는 상자가 크기별로 아홉 개나 있다. 아주 어릴 적 잡지에서 가지고 싶던 것을 오려서 넣어둔 상자와 여행 후 남은 티켓과 기념엽서를 담아둔 상자, 눈에 띄지 않도록 구분 없이 잡동사니를 숨겨둔 상자 등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편지함이다. 가장 활발히 편지를 주고받았던 여고시절 때는 물론이고, 스무 살이 넘은 후에 받은 것들까지 모두 이 상자에 들어있다. 그래서 편지함의 뚜껑을 열 때면 항상 설레이고, 덮을 때면 늘 미소가 번진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행복이 번진다.


 오늘은 방 청소를 하며 잡동사니 박스를 모두 꺼냈다가 역시나 편지함을 열었다. 그러다 A3 공책 반장을 칼로 댕강 잘라낸 편지 하나가 눈에 띄었다. 고 3 때 받은 생일 축하 편지였다.


생일이네.
umm.. 우선 생일 축하하고! …(중략)
내 생각인데 넌 진짜 노력파인 것 같어. 진짜로. 열 달 동안 널 관찰해온 결과론이야. 비록 디테일하게는 못했지만..
솔직히 처음에 아 너랑은 친해지기 좀 벅차겠다.. 큰일이네 젠장... 이랬는데 미술이 나를 도왔어. 신이시여 T^T
미술에 대한 열정은 물론이고 공부도 포기 안 하고 뭐든 열심히 하려는 너 보니까 공부에 대해 많은 집착 없었던 내가 집중하고 그랬거든. 모.. 그랬었다고 ^^..ㅋㅋㅋ
너 되게 냉랭할 줄 알았는데... 역시나!!
장난이고 그럴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내가 공부가 잘 안 되거나 자신 없어할 때 친한 친구도 안 해주던 진로 얘기해주고, 위로해주고 아.. 감동이었어 넌 임마!
난 니가 진짜로 잘 되길 바라. 그래서 나중에 커서 이왕이면 모르는 사람보단 아는 사람하고 일을 같이 하는 게 더 나으니깐 아 좀 제발 둘 다 잘나자.
넌 분명히 성공할 거야 임마. 니 노력과 열정 보면 내가 뛰는 놈이면 넌 나는 놈이었어.
아.. 팔 아프다. 이렇게 팔이 닳도록 널 칭찬하고 있는데 넌 자고^^..
어쨌든 얼마 안 남은 거 힘닿는데 까지 열심히 해. 나도 할게.. 나도.. 해.. 해볼게..ㅋㅋ 생신 축하드려요.
아! 명심해. 넌 나는 놈이란 걸. 알았지 임마! 그럼 이만 쓸게.   

- 미술 동급생이 -
P.S 나중에 잘 되면 꼭.. 밥 한 끼 사줘...


 보통 여고 시절에 받은 편지들을 보면 마냥 재밌었다. 중요한 것이라곤 수능 밖에 없었던 순수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섞인 웃음을 짓느라 바빴다. 여태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편지를 읽는데 눈물이 났다.  흐른 것이 아니라, 볼이 부르르르 떨릴 만큼 북받쳐 올랐다. 다소 과하게 밝은 말투를 읽어 내려가는데도 눈물이 멈추지를 는거다. 나도 기억  하는  모습을 누군가가 진심을 담아 적어주었다는 것이 고마웠고,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와 많이 달라졌다는 을 발견했다. 아주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같았다.


 거만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무엇을 하면 대부분 평균 이상은 했었다. 그래서 평생을 자만했다. 의도했든 안 했든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하질 않았다. 그래서 내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한 것이 무엇이냐 물으면 선뜻 대답하기가 힘들다. 내 인생 안에서 열심히 한 것들에 순위를 매길 수는 있어도, '죽도록 열심히 했다'라고 하는 절대적인 의미의 노력을 한 적이 있던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저 친구의 말대로 나도 내가 나는 놈인 줄 알았나 보다.


 그런 내가 이십 대 중반이 넘어서면서 실패를 겪고, 점점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게 되니 열정이 사라지면서 얼마 없던 노력마저 게을리했다. 그리고는 내가 무언가에 부딪힐 때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며 쓰러져버렸다. 쓰러진 나를 남 보듯 보며 그냥 원래부터 열정이라곤 없는 의지박약이라고 치부해왔던 것 같다.


 그런 내게 열정이 있다고,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나를 보고 영향을 받았고, 자신이 힘들어할 때 가장 친한 친구보다 나에게 위로를 받았다고 하는 친구를 만난 것이다. 비록 12년 전의 신원미상의 친구이지만 위로를 받았고, 용기도 얻었다. 그녀의 추신대로 아직 잘 되지는 않았어도 이 친구에게 꼭 밥 한 끼 사주고 싶어졌다. 내일 같은 반이었던 친구에게 연락해 해맑은 말투의 미술 동급생을 기억하느냐고 물어볼 참이다.


 언젠가 한 친구가 내게 물었다. 너는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냐고. 나는 내면의 것을 잘 들여다보면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 상자는 가득 차있어야 하고, 그것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여전히 오늘처럼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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