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려오는 졸음과 퉁퉁 부은 눈을 견디며 이 글을 남기는 이유는, 오늘 감히 어느 노장 감독에게서 느낀 가여움이 내게 너무 귀했기 때문이다. 지난 주 개봉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아주 난해하다는 무시무시한 리뷰들에 겁을 잔뜩 먹었었다. 나의 영화 문해력으로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기에 사전 예습을 철저히 하고 가기로 마음 먹었다. 실제로 이 영화는 영화의 축을 잡아주는 스토리라인이 뚜렷하지 않으며, 시퀀스들 사이의 인과관계를 파악하기 어렵고, 인물과 공간, 상황마다 비유와 상징이 가득 담겨 있기 때문에 제작자나 영화에 대한 사전정보가 없다면 감상하기 어려운 영화일 듯싶다. 씨네필들의 조언에 따라, 감상 전 도움이 될 만한 영상들을 통해 어느 정도 감상 가이드를 잡고 관람했다. 덕분에 미야자키 하야오의 일생에 대해 미리 이해할 수 있었고, 그의 45년지기이자 스튜디오 지브리 프로듀서인 스즈키 토시오의 인터뷰 영상을 보며 하야오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사실 이 영화를 남달리 기대했던 이유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았다는 점 때문이었다. '나의 이야기'를 꺼내는 영화, 그 용기 있는 선택과 도전을 응원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마히토를 만나기 전, 나는 올 봄에 이미 새미를 만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새미로 그려진 스티븐 스필버그를 마주했다.
상처와 마주하기, 스필버그의 <파벨만스>
I’ve been hiding from this story since I was 17 years old.
-저는 열일곱 살때부터 이 이야기를 피해왔습니다.
I’ve put a lot of things in my way of this story.
-대신 이 이야기를 다루기 전까지 만든 작품들에 남아냈었죠.
I’ve told this story in parts and parcels all through my career.
-제 유년시절 이야기의 조각들을 제 모든 커리어에 녹여냈습니다.
“E.T.” has a lot to do with this story, “Close Encounters” has a lot to do with this story.
-<E.T.>에도 들어있고, <미지와의 조우>에도 들어있죠.
But I never had the courage to hit this story head on.
-하지만 이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룰 용기가 없었어요.
I think everything I’ve done up to this point has made me ready to finally be honest
-제 생각에는 지금까지 해 온 모든 것들이 제가 솔직해질 수 있도록 도와준 것 같아요.
about the fact that it’s not easy to be a kid, the fact that everybody sees me as a success story.
-아이로 사는 것은 힘들다는 점과 모두가 나를 성공적인 이야기로 본다는 점에 대해서요.
Everybody sees all of us the way they perceive us based on how they get the information.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를 토대로 상대를 바라보곤 해요.
But nobody really knows who we are until we’re courageous enough to tell everyone who we are and I spent a lot of time trying to figure out when I could tell that story.
-그래서 우리가 용기를 내서 우리의 이야기를 직접 말해주기 전까진 그 누구도 진정한 우리의 모습을 알 수 없어요. 저는 제 이야기를 들려주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and I figured out when I turned about 74 years old. I said, “You better do it now.”
-74세가 돼서야 스스로에게 "이제는 진짜 해야 해!"라고 외쳤죠.
And I’m really, really happy I did.
-제가 해내서 정말 기쁩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2023 골든글로브 감독상 수상소감>
<파벨만스(The Fabelmans), 2022> 역시 스티븐 스필버그의 유년시절 이야기를 담은 자전 영화이다. 겉보기엔 성공적이었던 한 영화 감독의 마음 깊은 곳엔, 어린 시절 가족에 대한 상처가 남아있다. 어린 나이에 가지게 된 상처는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었지만, 스필버그는 일생 동안 영화 속에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간다. 상처가 아니었다면 꿈꿔볼 수 있었을 아름답고 따뜻한 가족애(愛)를 여러 작품에서 조각조각 그려가면서 말이다.
<파벨만스>를 영화에 관한 영화가 아닌 스필버그의 인생 그 자체로 받아들였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60년이 넘는 작품 활동 곳곳엔 그의 인생이 묻어나 있던 것이다. 파편화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하던 스필버그에게 영화를 만드는 것은 매번 아픔과 마주하는 고행임과 동시에 상처를 치유하는 행복이었을 것이다. 그 일련의 속사정을 바깥에 꺼내 놓기 위해선 상처와 마주보는 엄청난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나는 스필버그가 그 결심을 한 용기에 큰 박수와 존경을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자마자 바로 <파벨만스>가 떠올랐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번 영화를 통해 뿌리깊은 자기모순과 이를 바탕으로 한 자신의 예술 일생에 대해 솔직하게 회고한다. 그리고 자기모순을 마주하는 하야오의 이야기에, 나는 이번에도 큰 위로와 감사를 느낀다.
하야오가 시달렸던 자기모순
마히토의 아버지는 제 2차 세계대전 중 군수공장을 운영하여 큰 돈을 버는 인물이다. 실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버지 역시 군수공장을 운영했으며, 하야오는 이 덕에 유복한 환경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하야오는 대외적으로도 반전주의를 표명하며 전쟁을 극도로 싫어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본인이 성장하며 먹고 입고 자는 데서 오는 풍요로움은 모순적이게도 자신이 전쟁의 수혜자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바로 하야오가 어린 시절부터 견뎌야 했던 괴로움이었을 것이다.
숨기고 싶은 부끄러움, 그것은 뽑히지 않는 뿌리이다. 한 사람이 평생 스스로 짊어져야 할 무게이다. 영화 초반부에 마히토가 부잣집 도련님인 자신을 못마땅해 하는 학교 친구들로부터 구타를 당한 뒤 돌멩이로 자신의 머리를 쳐 자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모순에 대한 괴로움이 스스로를 파괴하고 싶다는 생각에 미칠 만큼 몸집이 커져버린 것이다. 이게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를 감히 가여워한 이유이다. 이제가 돼서야 꺼내보이는 괴로움은 인생 내내 그를 얼마나 괴롭혔을까. 드러내기까지 얼마나 오랜 두려움에 시달렸을까. 그래서 마히토의 이야기는 귀하고, 감사하다.
환상에서 빠져나오기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마히토가 걸어 들어간 탑은 하야오가 일생 동안 가꿔온 예술 세계로 보인다. 집을 떠나 탑으로 향하는 마히토의 여정은, 곧 자신의 예술 세계와 대면하고자 하는 하야오의 도전이다. 당차고 씩씩한 지브리 캐릭터부터 따뜻한 서사와 포근한 작화까지, 탑으로 대변되는 하야오의 예술 세계는 환상적일 것만 같다. 하지만 이 세계는 순수와 악의가 복잡하게 뒤섞여 있다.
하야오의 순수한 창작의 응집물은 귀여운 와라와라로 표현된 것이지 않을까 싶다. 작중 마히토와 키리코는 바다에서 잡은 거대한 물고기로 와라와라들을 먹이고, 이들이 성숙해 윗 세계로 올라갈 수 있도록 돕는다. 실제 키리코는 하야오와 채색 작업을 함께 해 온 동료 야스다 미치요를 상징한다고 한다. 즉 마히토와 하야오가 윗 세계로 올려보내는 와라와라들은, 하야오와 미치요가 작품을 통해 탄생시킨 지브리 속 인물, 풍경, 오브제들에 해당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탑의 세계에는 와라와라같은 순수한 요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굶주림에 지쳐 선(善)을 잃어버리고 와라와라를 잡아먹는 펠리컨들은, 탑의 세계를 점점 죽음으로 물들이는 존재 중 하나이다.
흡사 일본의 군국주의 시절을 연상케 하는 앵무새 집단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탑의 주인은 아니지만 탑을 무력으로 정복하려는 야욕을 보이고, 앵무새들 간 권력 서열에는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앵무새들은 끊임없는 식탐으로 무고한 존재들을 잡아먹으며, 탑의 세계를 완전히 잠식하려 한다.
펠리컨과 앵무새들은, 하야오가 일생 동안 가꿔온 작품 세계도 오직 선(善)만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환상 세계는 아님을 보여준다. 마히토가 탑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선과 악의 무리들은, 하야오가 자신의 작품 세계 속에서 대면하고자 하는 자기모순을 그리는 듯하다.
그런 점에서 영화 초중반부 내내 신비주의에 가려져있던 큰할아버지가 마히토에게 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큰할아버지는 오직 혈연으로 연결된 후손만이 자신이 만든 탑의 세계를 물려 받을 수 있다며, 마히토에게 탑의 세계를 물려 받으라고 한다. 그러면서 큰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풍요롭고 평화로우며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거라."
하지만 앞서 펠리컨과 앵무새들을 통해 경험했듯이 마히토는 탑의 세계가 온전히 순수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마히토는 탑을 물려 받지 않겠다고 한다. 겉으로는 순수한 환상처럼 보이는 이 세계 안으로 숨지 않고, 현실과 마주하는 것을 택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일생 동안 일궈온 지브리 세계와 자신 간의 모순을 인정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선언과도 같다.
'친구'를 만들 거예요
스즈키 토시오는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최종적으로 결정한 이번 영화의 주제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친구를 발견하는 것'"라고 말했다. 토시오에 따르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속 인물들은 하야오와 그의 지브리 동료들을 각각 상징한다고 한다. 마히토는 하야오, 왜가리(아오사기)는 토시오, 키리코는 야스다 미치오, 큰할아버지는 하야오의 라이벌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타카하타 이사오라 한다.
실제로 작중 아오사기는 마히토를 탑의 세계로 인도한 존재로, 첫만남에서 거짓말로 인해 관계가 삐걱거리긴 했지만 탑으로의 여정에서 둘은 서로에게 좋은 동반자가 된다. 아오사기는 마히토 없이 구멍 뚫린 부리를 메울 수 없었으며, 다시 자태 고운 왜가리로 돌아올 수 없었다. 마히토 역시 아오사기 없이 나츠코가 갇힌 성으로 진입할 수 없었으며, 앵무새들로부터 탈출할 수 없었다.
즉 둘은 서로가 있었기에 탑에서 마주한 역경들을 헤쳐나갈 수 있었다. 이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자신이 벗인 스즈키 토시오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에, 상당히 뭉클했다. 무엇보다 아오사기는 마히토를 탑의 세계로 불러들이는 존재로, 토시오는 하야오가 자신의 작품 세계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동기를 제공해준 인물로 읽히기도 한다.
마히토의 다른 친구인 키리코 역시 마찬가지이다. 마히토가 펠리컨들에게 둘러싸여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해준 인물은 키리코였고, 마치 보호자와 같은 강인한 자태로 마히토를 보살피고 곁을 지켜준 것도 그녀였다. 무엇보다 키리코는 와라와라가 윗 세계에서 탄생할 수 있도록 이들을 정성껏 돌보는 인물로, 실제로 하야오의 상상에 색을 입혀 작품으로 탄생시키던 미치오와 자연스레 연결짓게 된다.
히미는 마히토가 그리워 한 친어머니 히사코의 어린 시절 모습을 하고 있다. 히미는 마히토를 앵무새들로부터 구출하고, 마히토가 나츠코를 찾을 수 있도록 길을 터 주며 좋은 친구가 되어준다. 히미가 없었다면 마히토는 탑 안에서 금새 지쳤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를 늘 아껴주는 히미 덕에 마히토는 탑에서의 여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작중 히미가 마히토를 앵무새들로부터 구출해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후, 잼 바른 빵을 먹이는 장면이 있다. 실제 하야오의 어머니는 하야오의 어린시절 폐결핵에 감염되어 임종 전까지 침대 위에서 힘겹게 생활했다고 한다. 히미와 마히토가 식사를 하는 이 장면은, 마치 하야오가 그리워하던 어머니와의 행복한 시간을 보여준 것만 같아 눈물샘을 자극한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표면적으로 새엄마인 나츠코를 구하러 떠나는 마히토의 여정을 그린다. 하지만 그 여정 속에서 마히토는 히미를 만나 히사코를 잃은 아픔을 치유 받는다. 또한 조카인 자신을 아들로 품은 나츠코의 진심과 사랑을 깨닫게 되며 그녀 역시 어머니로 받아들이는 성장을 보여준다.
이처럼 우리의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사랑에 있다는 것을, 하야오는 진심을 담아 전하고 있다. 아오사기, 키리코, 히미, 그리고 나츠코까지 마히토를 향한 사랑을 바탕으로 그의 삶의 원동력이 되어주는 좋은 친구들이다. "친구를 만들 거예요"라는 마히토의 대사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일생 동안 자신과 함께 작품 활동의 길을 걷고, 그 길을 응원해준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는 고마움 같다. 때문에 이 영화는 '나는 결코 그대들 없이 혼자서 이 길을 걸어 올 수 없었다'는 하야오의 친구들을 향한 편지처럼 느껴진다.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자꾸 느끼는 요즘이다. 외로움에 지쳐 쓰러지다가도 누군가 다정히 걸어준 전화 한 통에, 함께 먹어준 밥 한 끼에, 정성 어린 편지 한 장에, 다시 일어서게 된다. 우리가 삶이라는 고된 여정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은 그 여정에서 손을 잡아주는 친구들이 곁에 있기 때문이다. 서로를 더 아끼고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살기 위함에 있음을, 우린 종종 잊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이렇게 살았다
제목만 보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하야오 할아버지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정답을 알려주는 영화일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영화가 난해하다는 평이 많이 나오는 것도, 삶에서 길을 잃은 수많은 관객들이 하야오에게 인생의 의미나 가치를 전수 받기 위해 영화를 보러 왔다 명쾌한 답을 얻지 못해 실망했기 때문인 것도 같다.
사실 알려졌다시피 이 영화의 제목은 실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어린 시절 감명 깊게 읽었던 요시노 겐자부로의 동명 소설에서 따 온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문 제목은 'How Will You Live'가 아닌 'The Boy and the Heron(소년과 왜가리)'라는 직관적인 제목으로 개봉될 예정이라 한다. 이걸 보며 이 영화는 관객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한 영화가 아닌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과, 사랑하는 주위 사람들을 위해 만든 영화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야오는 우리에게 정말 어떻게 살겠냐고 훈계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렇게 살았다'고 담담히 고백하는 중인 것 같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하야오는 자신이 창조한 환상 속에 계속 갇혀있을지, 오래도록 감춰온 모순을 마주할지 고민했던 자신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그리고 모순을 마주하기로 한 자신의 결정을 영화를 통해 선포해버린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부끄러움 하나 정도는 가슴 속에 품고 살 것이다. 그런 우리 모두에게 하야오는 '나는 이렇게 살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건 명쾌한 가르침보다 따뜻한 말 한 마디보다 큰 위로로 다가온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영화가 세상에 나왔다는 것 자체로, 솔직함이 누군가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를 전하는지 보여줬다는 생각이 든다.
마히토의 머리에 난 상처는 그가 집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 상처는 그에게 탑에서의 기억 그 자체이지 않을까 싶다. 자신이 마주했던 모순과, 그를 마주하는 고통 속에서 손 잡아주었던 친구들, 이 모든 여정을 상처라는 무늬를 남겨 기억하겠다는 하야오의 약속 같다.
예술은 진실을 고백하기에 눈물겹게 아름답다. 매 순간 자신과 마주할 용기가 필요하고, 이를 고백하기까지 괴로움에 시달리지만, 결국 그 고백 덕에 작품 건너편의 누군가는 깊은 위로를 받는다.
삶의 파도를 거쳐 마침내 생의 끝에서 자전적인 회고를 꿈꾸는 나와 같은 이들에게, 미야자키 하야오는 큰 희망과 용기를 건넨다. 비록 지금은 표면적인 나를 지키기 위해 거짓말쟁이로 살고 있지만, 모순을 들키지 않으려는 공든 탑을 내 손으로 무너뜨리는 그 날까지, 견뎌야 한다는 생각을 들게 해 준다. 마침내 각자 삶의 진실을 후련히 고백할 날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야' 한다.
米津玄師(요네즈 켄시) - 地球儀(지구본)
僕が生まれた日の空は 高く遠く晴れ渡っていた
내가 태어난 그날의 하늘은, 높고 먼 곳에서 맑게 개어 있었어
行っておいでと背中を撫でる 声を聞いたあの日
잘 갔다 오라며 등을 어루만지던, 그 목소리를 들은 그날
季節の中ですれ違い 時に人を傷つけながら
계절 속에서 스쳐지나가며, 때로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며
光に触れて影を伸ばして 更に空は遠く
빛에 닿아 그림자를 늘어뜨리며, 하늘은 더욱이 먼 곳으로
風を受け走り出す 瓦礫を越えていく
바람을 맞으며 달려나가, 잡동사니들을 넘으며
この道の行く先に 誰かが待っている
이 길을 걸어가면, 그곳에는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어
光さす夢を見る いつの日も
빛이 내리쬐는 꿈을 꿔, 어떤 날이든
扉を今開け放つ 秘密を暴くように
지금 문을 열어젖혀, 비밀을 밝혀내듯이
飽き足らず思い馳せる 地球儀を回すように
만족하지 못하고 떠올려, 지구본을 돌리듯이
僕が愛したあの人は 誰も知らないところへ行った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떠났어
あの日のままの優しい顔で 今もどこか遠く
그날의 상냥한 표정 그대로, 지금도 어딘가 먼 곳으로
雨を受け歌い出す 人目も構わず
비를 맞으며 노래해, 남 시선은 신경쓰지 않고
この道が続くのは 続けと願ったから
이 길이 계속 이어지는 것은, 이어지기를 바랐으니까
また出会う夢を見る いつまでも
또다시 만나는 꿈을 꿔, 언제까지나
一欠片握り込んだ 秘密を忘れぬように
한 조각을 움켜쥐어, 비밀을 잊지 않기 위해
最後まで思い馳せる 地球儀を回すように
마지막까지 떠올려, 지구본을 돌리듯이
小さな自分の 正しい願いから始まるもの
조그마한 나의 올바른 바람에서 시작되는 것
ひとつ寂しさを抱え 僕は道を曲がる
한 가지 외로움을 끌어안고, 나는 길을 꺾어
風を受け走り出す 瓦礫を越えていく
바람을 맞으며 달려나가, 잡동사니들을 넘으며
この道の行く先に 誰かが待っている
이 길을 걸어가면, 그곳에는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어
光さす夢を見る いつの日も
빛이 내리쬐는 꿈을 꿔, 어떤 날이든
扉を今開け放つ 秘密を暴くように
지금 문을 열어젖혀, 비밀을 밝혀내듯이
手が触れ合う喜びも 手放した悲しみも
서로의 손이 닿을 때의 기쁨도, 손을 놓았을 때의 슬픔도
飽き足らず描いていく 地球儀を回すように
만족하지 못하고 그려나가, 지구본을 돌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