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용서한다, 새우 이 녀석을 용서한다.
11살 초등학교 교실의 어느 봄날, 급식으로 나온 짜장밥을 먹고 집에 와서 온 몸이 가려웠다. 급한대로 엄마와 함께 찾아간 동네 병원의 의사 선생님은 주사를 놔주곤 알러지 항원 검사를 해 보는 게 좋겠다고 했다. 몸이 근질대던 와중에도 나는 수시로 코를 파던 의사 선생님, 군데군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얼룩이 진 병상의 시트와 곰팡이 핀 천장 한 구석을 보며 이 병원 참 지저분하다, 생각했다. 찝찝한 기분을 뒤로 한 채 바늘로 눈에도 보이지 않을 자그마한 구멍 여러 개를 팔뚝에 내고 각종 약물을 떨어뜨린 뒤 30분 간 경과를 지켜봤다. 짜장밥을 먹고 난 두드러기와 비슷하게 생긴 모양이 몇 군데 윤곽을 드러냈다. 여전히 새끼 손가락을 한쪽 콧구멍에 집어 넣은 채 다시 등장한 의사 선생님은 말했다. “새우네, 새우야.” 검사 결과 나는 새우를 비롯한 다른 종류의 갑각류, 집먼지 진드기 알레르기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음식 조심하라면서 의사 선생님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알러지란 게, 살아가면서 사라지기도 해요.”
당장 한 주 뒤에 있었던 같은 반 친구의 생일파티에서 나는 혼자 쉬림프 피자를 먹지 못해 서러웠다. 하필이면 토핑으로 새우만 이렇게 잔뜩 올려져 있다니. 새우 이 녀석, 정말 밉다. 오동통하니 맛있는 주제에, 내 입으론 이제 기어코 못 들어간다니. 친구 어머니께선 이 맛있는 피자를 못 먹어서 어쩌냐며 스파게티 같은 다른 음식을 상냥히 건네주셨다. 그렇게 혹시나 내 입으로 새우가 들어가진 않을까, 내 오감의 레이더가 예민하게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 열한 살부터였다.
새우 알러지가 있으면 새우를 못 먹어서 새우에 대해 잘 모를 것 같지만, 오히려 새우를 잘 먹는 사람보다도 그 맛과, 향과, 식감을 잘 기억해야 한다. 본능적인 보호기제로 내 온 몸이 새우를 기억하는 것이다. 감각적으로 굽은 붉은 등, 그 등껍질 안의 하얗고 통통한 속살, 입 안에 넣었을 때 느껴지는 비릿한 바다 냄새…불 위에서 노릇하게 구워지고 있는 새우씨의 고향의 향기를 대신 추억해주며 때론 물 속에서 헤엄치고, 때론 물 밖으로 도약했을 그의 생동감 넘치는 시간을 늘 상상했었다. 그의 고향에 대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10대 시절 종종 기회가 될 때면 새우를 한 마리씩 몰래 먹어보곤 했다. 나를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괜히 죄를 짓는 기분이었고, 나는 소심했던 나머지 다 큰 새우가 아닌 새끼 새우만 먹어댔다. 다행히 10년 간 알러지는 단 한 번도 도지지 않았다. 이렇게 나의 새우씨 고향으로의 일탈은 합법화됐다고 생각했다.
대학을 다니고 있던 스물 두 살, 아빠의 지인이라는 사람이 집으로 대하 두 박스를 보냈다. 새우의 자매품인 대하 역시 공식적으론 여전히 내겐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저녁식사로 큼직한 대하를 구워 야무지게 먹는 다른 가족들을 보며 약이 오르기 시작했다. 결국 다음날 아침에 전날 남은 대하 구이를 먹는 엄마를 졸라 끝내 네 마리나 얻어 먹었다. 역시 과유불급이었을까. 목 점막이 부은 나는 이 날 응급실에 가고 말았다. 몇 주 뒤 있었던 으리으리한 대학병원의 외래 진료에서 만난 우아하고 차분한 의사 선생님은 알러지 항원 검사를 해 보자고 하셨고, 십 년 전 그 날과 같이 바늘로 눈에도 보이지 않을 자그마한 구멍 여러 개를 팔뚝에 내고 각종 약물을 떨어뜨린 뒤 경과를 지켜봤다. 갑각류 알러지가 다시 확인됐다. 선생님이 온화한 미소로 말했다. “알러지가, 살다보면 다시 나타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얼마 전 친구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깜빠스 요리에 나온 새우 한 마리를 무심코 입 안에 넣었다. 오랜만에 느낀 오도독한 새우의 식감과 감칠맛 도는 비릿한 향에 나는 진한 쾌감을 느꼈다. 그래, 이 맛이었지. 이 향이었지. 새우는 내게 한 동안 잊었다가도 결코 잊지 못하는 어떤 기억 같은 것이다. 마침 친구들과의 그 식사 자리에선 우리의 지나간 스무 살 추억들이 식탁 위를 오가고 있었다. 스물 다섯, 20대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나는 요즘 그런 생각을 한다. 청춘은 참 새우같구나. 시간이 지나면 나도 모르는 새에 사라진 것 같지만 어느 날 물 밀듯이 다시 밀려오는 그런 것. 내 몸이 알러지 항원을 기억하는 것처럼 청춘도 내 몸 어딘가에 새겨져 있을 테다. 바다에서 힘차게 수면 위로 뛰어오르던 새우씨처럼 나는 치열하게 공부했고, 고민했고, 사랑했고, 싸웠고, 꿈을 찾아 헤맸다. 그러다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들의 끝에선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린 날도 많았다. 마치 새우씨의 휜 등처럼, 그의 비릿한 향기처럼.
아직도 청춘이 한창인데, 요새 또래들을 만나면 다들 옛날이 그립단다. 우리 나이에 벌써 이러고 있는 게 웃기기도, 슬프기도 하다. 우리도 모르게 기억에서 사라졌다가 어느날 제멋대로 나타나 우리를 울리고 떠나는 청춘. 새우같은 주제에 청춘이 뭐길래. 그래서 야속하고 얄밉지만 나는 새우 이 녀석을 용서해보려 한다. 시간이 흘러도 결코 사라지지 않고 불쑥불쑥 존재감을 나타내주는 게 청춘과 닮아있어서. 괜히 밉지만은 않아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