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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tros Jun 15. 2024

조조의 아들 조비(1)

이 녀석도 사실은 불쌍한 녀석이었어.

"조조의 아들 조비, 그가 요절하지 얂았다면 삼국지의 엔딩은 바뀌었을까?" 라는 궁금증을 가지고 글쓰기를 시작해보았습니다. 이번 글도 '정미현 작가님'과 함께 하였습니다.


나름 이야기할 꺼리가 많은 인물이라 글이 길어져서 1편과 2편으로 나뉘어 올립니다.


1편에서는 조비의 곡절 많은 성장 및 즉위 과정에 대해 다뤄보겠습니다.




삼국지의 주역 중 하나인 조조의 아들인 조비는 [연의]에서 단순한 역입니다. 헌제에게 선위를 강요해 제위에 오른, 위의 초대 황제. 거기에 후계자의 자리를 다투던 동생 조식을 죽이려다가 시 짓는 솜씨에 말문이 막혀버린, 뭐 그런.


하지만 2, 3차 매체에서는 다릅니다. 물론 영화 [황제의 반란]이나 웹툰 [삼국지톡] 등에서는 악당이라기에도 애매한 수준의 찌질한 역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비교적 현대에 나온 많은 매체에서는 유능한 군주로 그려집니다.


고이데 후미이코의 [삼국지 인물사전]과 그 영향을 받은 듯한 최훈의 웹툰 [삼국전투기] 등에서는 인격의 결함을 고려하더라도 무척이나 유능한 지도자로, 코에이테크모의 [진삼국무쌍] 게임 시리즈와 진모의 만화 [화봉요원] 등에서는 냉혹한 미남으로 나왔지요. 이학인의 조조 찬양 만화 [창천항로]에서는 진정한 간웅으로 나왔고요.


진삼국무쌍 7 조비. 출처 – 나무위키.


심지어 기타가타 겐조의 소설 [영웅 삼국지]나 드라마 [삼국] 등에서는 복합적인 캐릭터로 그려집니다. 그러더니 비교적 최근 나온 중국의 드라마 [대군사사마의지군사연맹]에서는 1부의 진주인공이나 다름없는 등장인물로서, 그럴듯한 서사를 보여주었습니다.


매체에서 이렇게까지 밀어주는데도, 팬덤의 여론은 전반적으로 싸늘합니다. 최악의 인간성을 지닌 소인배로서, 잇따른 남정의 실패로 천하 통일의 기회를 놓쳐버린 황제 ㅡ 그렇게 보는 시각이 대부분입니다. 특히 이릉대전이라는 대형 호재에도 손권의 칭신에 넘어간 부분은 크게 비판을 받곤 합니다.


내치의 공이나 문학적 소양, 몇몇 훈훈한 일화를 강조하며 그래도 제법 괜찮은 군주였다는 의견도 없지는 않습니다. 심지어 왕샤오레이는 정사와 사서를 바탕으로 집필한 소설 [삼국지 조조전]에서 “조비가 촉한과 동오의 대립을 틈타 공격을 가했다면 손권과 유비는 즉각 손을 잡고 위나라를 쳤을 것이다. 반면, 방관 입장을 고수했을 시 최소한 손권이든 유비든 어느 한쪽의 세력 약화를 유도할 수 있을 것이므로 적절한 방책이라 볼 수 있다”라며 이릉대전 당시의 외정에도 합격점을 주었습니다.


염립본의 제왕역대도권 중 위문제 조비 부분.



그렇다면 조비는 실제로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여기서는 조비의 복합적인 성격에 영향을 미쳤을 법한 사건을 중심으로, 조비의 발자취를 좇아가봅니다.


조비는 조조의 삼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조조가 가장 총애하던 첩 변 씨(후일에 태황태후까지 이르는 무선황후 변씨)에게서 나온 첫 번째 아들이었죠. 난세에 누가 아니 그렇겠냐마는, 조비도 상당히 혼란스러운 유년 시절을 보냈을 것입니다.


조조가 동탁이 내린 벼슬을 거부하고 처자식도 버린 채 도망쳤을 때입니다. 원술이 조조의 집에 찾아와 조조가 죽었다는 오보를 전하자, 조조의 첩들이 당황해 고향으로 가려 했습니다. 


이때 가솔을 보존한 것은 조조를 기다리자며 떠나려는 첩들을 말린 변 씨였습니다. 당시 조비는 만 3세였으니, 아버지가 자신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기억, 혹은 그로 인한 감정은 남았을 지도요.


만 7세에는 여포가 조조의 근거지인 연주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조조에게는 3현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연주가 9개군 80현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니, 그야말로 세력이 와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조비 역시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 목숨을 잃을지 두려움에 떨었을 것입니다.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 2년을 보낸 끝에, 조조는 연주를 수복했습니다.


오래지 않아 만 9세가 되었을 무렵, 아버지가 폐허가 된 낙양에서 황제를 줍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근거지 허창으로 도읍을 이전하죠. 도망이나 다니던 전에 비하면 제법 근사한 아버지의 모습이었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전에 없는 평화로운 시기였고요.


혼란과 평화를 거치며, 나름대로 교육은 잘 받은 모양입니다. 본인의 자서전이나 다름없는 [전론]에 따르면, 이미 여덟 살에 글을 짓고, 각종 경전과 제자백가를 꿰뚫었으며(이래서 문황제(文皇帝)라는 시호를?), 말을 탄 채 활을 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의 과장은 있을 수 있지만, 조씨의 위가 멸망한 후에도 기록의 허풍을 지적하는 사가(史家)가 없었던 것을 보면 완전한 거짓은 아니겠습니다.


코에이의 [삼국지 조조전]에서도 활을 잘 쏘았다는 기록을 반영해 궁기병으로 설정되지요. 비중이나 성능은 처참하지만요.


이러한 영재교육이, 반드시 후계자의 자리를 노려서는 아니었습니다. 위로 최소 열 살 이상 차이나는 맏형 조앙과 이미 아들까지 낳은 차형 조삭이 있었거든요. 


조앙과 조삭은 둘 다 첩 유 씨의 소생이었지만, 유 씨가 일찍 떠나 정실이었던 정 씨의 양자, 즉 조조의 적자가 됩니다.


그러던 중, 조조가 유표의 세력이었던 장수를 정벌하러 갑니다. 맏아들 조앙과 조카 조안민도 따라갔는데요, 당시 열 살에 불과했던 조비도 함께였습니다. 열 살짜리 아이가 스스로의 기마술과 궁술에 자부심을 느끼며 전장에 따라가겠다 조르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제법 귀엽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재주를 보일 기회는 없어 보였습니다. 장수가 빠르게 조조에게 항복했기 때문입니다. 들떠 있던 조조는 장수의 숙모이자 장제의 미망인을 취하게 되는데요, 장수는 여기에 한이 맺혔답니다. 이를 안 조조가 은밀히 장수를 죽이려는 계획을 짰다고 해요.


서진 시대의 사서 [부자]에 따르면, 조조가 장수의 부하 호거아의 용맹함을 높게 사 금을 주었다고 합니다. 장수는 자신의 측근을 포섭하려는 조조를 의심했다고 전합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불안해진 장수는 조조를 불시에 습격합니다. 조조는 총애하던 부하 전위는 물론, 맏아들 조앙과 조카 조안민마저 잃습니다. [세어]에 따르면 자신의 말을 아버지에게 바쳐 아버지는 살리고 본인만 죽었다고도 하지요.


[코에이 삼국지(게임)]에 등장하는 조앙의 일러스트. [세어]에서의 일화 때문인지 조조에게 말을 바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적장자마저 잃을 정도였으니, 조비를 챙길 정신도 없었겠지요. 조비는 [전론]에서 “당시 나는 10세였는데, 말을 타고 벗어날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조비는 추후 조앙을 풍도공으로 추봉하는데요, 여기서 도悼는 슬퍼하다, 애도하다는 뜻입니다.


화살비가 쏟아지는 전장에서, 형의 시체를 지나치는 10세 소년이 그려지지 않나요? 그렇게나 믿고 따르던, 열 살 이상 차이 나는 장형의 시체를요.


이 사건은 조조 집안에도 큰 변화를 불러일으킵니다. 조앙의 양어머니이자 조조의 정처였던 정 씨가 분노해 이혼을 선언했거든요. 조비의 친어머니 변 씨가 대신 정실이 됩니다. 차남이었던 조삭 역시 당시에는 사망했는지, 조비는 실질적인 장남이 됩니다.


원소와의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장형 조앙과 종형 조안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장수가 가후의 조언에 따라 조조에게 항복합니다. 조조에게는 엄청난 호재였어요. 덕분에 남쪽의 유표를 견제할 수 있게 되었거든요. 조조는 장수와 사돈을 맺으며 과거를 덮습니다. 열세 살의 조비는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열세 살 소년의 머릿속이 어떻든, 조조는 원소와의 결전을 위해 관도로 향했습니다. 실질적인 장남 조비도 아버지를 따라 참전하게 됩니다.


5년 후 업이 함락되었을 때, 조비는 원희의 처 견 씨를 발견합니다. 첫눈에 반한 조비는 견 씨를 데려다가 정실부인으로 맞이합니다.


견희의 초상, 훗날 황제가 되는 조비의 황후로서 문소황후(文昭皇后)라고 칭해집니다. 피부가 옥과 같고 얼굴은 꽃과 같은 자태를 지닌 미인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그녀의 최후는…


일견 순수해 보일 수도 있는 장면입니다만, 어느 정도는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도 있지 않았을까 추측만 해봅니다. 패장의 부인이니 마음에 들었다 한들 첩으로 들이면 그만이거든요.


실제로 조조는 이에 대한 사대부의 시선을 크게 걱정했습니다. 해당 사건에 대한 공융의 말에 좌지우지되는 조조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이 반항심을 알 수 있는 일화가 또 있는데요, 바로 귀순했던 장수의 죽음입니다. 장수는 관도대전 및 원소의 장자 원담 격파에 공을 세우며 식읍을 무려 2,000 호나 받았어요. 참고로 순욱(빈 찬합좌…)의 식읍이 2,000 호였고, 종요(앞서 나왔던 70대 득남 신화의 주인공)의 식읍이 1,800 호였으니 엄청난 후대였죠. 물론 문관보다는 무관의 식읍이 많은 편이긴 합니다만, 그렇게 따져도 여전히 엄청납니다. 조조의 인척이자 개국공신이었던 하후연은 최종 식읍이 800호에 불과했거든요. 정말 엄청난 공을 세웠다기보다는, 정치적, 상징적인 의미로 보는 편이 옳겠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후대를 보면서도, 조비는 장수를 증오했습니다. [위략]에 따르면, 조비는 장수를 수 차례 모임에 초대해놓고는 "내 형을 죽여놓고 무슨 면목으로 남을 쳐다보는가"라며 화를 냈다고 합니다.


[정사]에 따르면 장수는 오환 정벌에 참가하다가 가는 길에 죽었다고 하는데요, [위략]에 따르면 조비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자살했답니다. [위략]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그만큼 형의 죽음이 사무쳤다는 방증이겠지요.


24세가 되었을 때는 한수와 마초의 난에 종군, 공을 세워 오관중랑장이자 부승상이 되었습니다. 이대로라면 무난히 조조의 후계자가 될 듯했습니다. 하지만 조조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조비의 열한 살 어린 이복 동생인 조충에게 마음이 가버렸기 때문입니다.


조충은 어렸을 때부터 특출 날 정도로 총명했는데요, 인품도 훌륭했습니다. [정사]에 따르면 수십 명이 조충 덕에 목숨을 부지했다고 하네요.


[위략]에 따르면 조비는 “조충이 살아 있었다면 나는 천하를 얻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고 하니, 조조는 진심으로 조충을 후계자 삼으려던 모양입니다.


유교에는 두 가지 계승 원칙이 있습니다. 하나는 모두가 알다시피 적장자 계승이고요, 다른 하나는 택현(擇賢)입니다. 적장자가 계승하지 못할 경우, 어질고 현명한 이를 선택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둘째든, 셋째든 상관없지요. 조선에서 양녕대군을 폐한 후, 차남 효령대군 대신 삼남 충녕대군(훗날의 세종)을 세자로 삼았던 것처럼요.


조앙이 죽었으니 조비가 적장자다, 라고 한다면, 조비가 뒤를 이어야 하지요. 하지만 적장자가 죽었으므로 적장자 계승은 불가능하다, 라고 한다면 조충이 아니라 조충의 동생도 후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손권도 같은 명분을 들어 막내 손량을 태자로 삼습니다.


하지만 조충은 열세 살이 되었을 때 병에 걸려 요절하고 맙니다. 조비가 조조를 위로하자, 조조는 말했어요. “이 아이가 죽은 것은 나에게는 큰 불행이지만, 너희들에게는 큰 행운이겠구나.”

부모가 자식에게 하기에는 너무 잔인한 말이죠.


어린 동생이 죽었습니다. 감정적으로도 상처가 되었을 법합니다. 동시에 정치적 선언이기도 했습니다. 반드시 너를 장자로 취급하지 않겠다, 택현으로 후계자를 택하겠다ㅡ 라고요.


본격적인 후계자 경쟁이 시작됩니다. 


조조는 특히나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건안 문학(建安文學-각주 1)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사조를 시작했습니다. 건안 문학이 시작되기 전까지, 시는 유교적 정서만을 지닐 뿐 현실을 반영하지 않았던, 길고 어려운 사대부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조조는 이랬던 시를 짧고 간결하면서도, 현실을 반영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형태로 바꾸었지요. 


이 문학적 재능은 조비와 조식에게도 이어졌습니다. 이 삼부자는 삼조三曹로 일컫게 될 정도로 중국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지요. 특히 조식은 후에 이태백과 두보가 나타나기 전까지 시의 성인으로 추앙받았을 정도입니다.


더군다나 시의 성향에 있어서도, 조조와 조식이 더 잘 맞았던 모양입니다. 조식의 초기 작품은 호방하고 남성적인 데 반해, 조비의 작품은 전반적으로 서정적이고 애틋했습니다. 조조가 두 아들에게 동작대를 주제로 시를 쓰라고 한 적이 있는데요, 조식의 시는 조조와 함께 동작대에 오르는 데서 시작해 천하를 평정함으로써 황실을 보필한 조조의 성덕을 기리는 식이었습니다. 반면 조비의 시는 동작대의 수려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묘사했지요. 조조의 성향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조식에게 끌렸을 수밖에요.


드라마 [대군사사마의] 11화, 조비의 시 [연가행(燕歌行)]의 한 구절입니다. 연가행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칠언시로, 전장에 나간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시.


더군다나 조식의 곁에는 재기발랄한 문인들, 즉 차세대의 인재들이 잔뜩 포진되어 있었습니다. 조비는 아무래도 불안해하는데요, 이때 가후가 조비에게 조급하게 굴지 말고 아들의 도리를 하라 충고합니다. 


그 사이 조식의 곁을 지켰던 재기발랄했던 문인들이, 속된 말로 나대다가 조조의 미움을 샀습니다. 조식 역시 음주 문제를 드러냈습니다. 관우에게 공격받을 조인을 구원하러 가야 했던 상황에서 술에 취해 있었다고 하는데요, 동진의 사서 [위씨춘추]에 따르면 조비가 조식을 억지로 취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사]를 보면, 조식의 술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던 듯싶긴 합니다.


동시에 조조의 초기 공신이었던 모개는 물론, 조식의 장인이자 사대부의 대표격이었던 최염 역시 장자 계승의 원칙을 밀어붙입니다. 마침내 조조는 조비를 세자로 삼습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이때 옆에 있던 신비의 목을 끌어안고 기뻐했다는데요, 시를 보아도 그렇지만 상당히 감정적인 면모가 강해 보입니다.


하지만 조조의 망설임은 조비의 정통성에 흠집을 내게 됩니다. 특히 후계자 경쟁에서 완전히 탈락한 조식과는 달리, 군권을 어느 정도 장악했을 뿐 아니라 군사적 업적까지 있던 조창은 위협이 되었습니다. 오죽하면 조조가 죽자 단 하루 만에 조비의 즉위를 처리했는데요, 이는 조창의 찬탈 시도를 방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청나라 시기에 그려진 조창의 상상화. 문에 좀 더 치우친 조비와 달리 무예에 출중하다는 설정이 반영된 그림입니다.


실제로 조창은 도착하자마자 장례를 주관하던 가규에게 옥새의 행방을 물었답니다. 나라의 후계자가 따로 있는 상황이니 월권에 해당하는 질문이었지요. 찬탈의 의도를 지녔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고요.


정리해보면, 살얼음판을 걷는 삶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있었던 모양인지, 조조가 죽자 너무나 울어 조정이 마비되었다는 [정사]의 기록도 있습니다.


가족에게 양가감정을 갖는 것만큼 스트레스 받을 일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런 스트레스를 조비는 그른 방향으로 풀기도 한 모양입니다. 인간성에 물음표를 던지게 만드는 일화가 제법 있지요. 이를테면 앞서 언급한 조창은 ‘뜬금없이’ 조비에게 소환되었다가 ‘갑자기’ 죽었습니다. 암살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지요. 


마찬가지로 관우에게 항복했던 명장 우금이 돌아오자, 우금을 용서한다고 말하면서 조조의 무덤에 참배케 했는데요. 이 무덤에는 우금이 관우에게 비굴하게 항복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바로 옆에는 방덕이 떳떳하게 죽음을 청하는 모습이 있었죠. 우금은 오래지 않아 분사합니다. 아무리 우금의 항복에 화가 났다고는 하지만, 군주가 할 만한 짓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괜찮은 면모도 보였습니다. 


특히 아버지를 따라 종군한 경험이 여럿 있기 때문인지 보훈제도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으며, 마찬가지로 복지 제도를 정비하기도 했고요. 후한 말을 집요하게 괴롭혔던 외척과 환관을 배척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조비가 채택한 구품관인법은 기존 인사 제도의 폐단을 보완한 것으로, 3세기 후 과거 제도가 시작될 때까지 쓰였습니다. 아니, 과거 제도가 시작된 후로도 후세까지 지속되어, 현대 한국에서는 구품관인법의 영향을 받은 9급 공무원 제도가 쓰이고 있습니다. 물론 부작용이 없지는 않았습니다만, 당대로서는 상당히 진보한 정책임에 틀림없습니다.


경복궁 근정전. 조선 시대에 지어진 근정전 앞에도 1품부터 9품까지의 품계석이 놓여 있습니다. 임금님이나 외국 사절에게 인사를 올릴 때 품계대로 도열하죠(우 문신, 좌 무신).


세계사나 중국사 교과서를 펼치면 삼국지에 관련된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문화적, 문학적 가치는 충분하지만, 역사의 큰 흐름에 남긴 영향은 미미하거든요. 다만 구품관인법만은 예외로, 반드시 나오는 항목 중 하나입니다. 그만큼 큰 족적을 남겼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까지가 조비의 성장과 즉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조비가 겪었던 건강 문제를 의학적인 관점에서 다뤄보겠습니다.







<각주>

1.    건안문학이란 후한 헌제의 건안(연호) 연간(196~220)에 조조와 그의 아들 조비와 조식 밑에서 활약한 문학 집단에 의해 주도되어 생겨난 새로운 문학 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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