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모도 서러운데 단명까지...
1부에 이어, 우여곡절 끝에 제위에 올랐지만 여전히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조비의 건강 이야기를 다뤄보겠습니다.
드디어 위나라의 2대 왕이 된 조비... 하지만 나라를 다스리면서도, 소년기와 청년기에 쌓인 스트레스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겠지요. 조비는 이런 스트레스를 단 것으로 풀었던 모양입니다.
특히 포도는 맛을 상세히 표현하면서, 그 어떤 과일도 포도에 비교할 수 없다며 예찬했습니다. 포도뿐 아니라 다른 과일도 전반적으로 달달한 것을 좋아해, 지역 특산물이나 식재료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촉의 맹달이 귀순 후 촉에서는 고기 요리에 엿이나 꿀 등을 더해 달달하게 먹었다고 하자, 신나서 신하들에게 말한 적도 있답니다
그러나 단 것으로도 스트레스가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았겠습니다.
탈모가 있었다는 기록을 고려하면요.
의서 [외대비요(外臺秘要)-당(唐)나라 왕도(王燾)가 752년에 지음]에는 탈모약을 만드는 방법이 나오는데요, 조비의 탈모가 심해졌을 때 사용했답니다.
주 원료는 천궁, 건지황, 방풍나물, 신이, 고본, 혜백, 지마유, 황기, 당귀, 땅구릅, 백지, 작약, 망초입니다. 약재를 깨끗이 씻어내 으깬 후, 약불로 끓이다가 물이 끓어오르면 지마유를 넣고 잘 저어줍니다. 약이 완성되면 머리를 깨끗하게 씻은 후 두피에 바르고, 4-8시간 후 씻어내면 된답니다.
이중 망초(학명: Erigeron canadensis)는 독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심한 독성을 나타내지는 않는다고 하며, 이 식물 안에는 사포닌, 클리코사이드, 플라보노이드, 타닌 등의 성분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망초는 항염증, 항산화, 항균 등의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2).
조비의 탈모 양상에 대해 외대비요에 “조비는 30세에 발증(发症)을 얻어 머릿기름이 샘처럼 솟았고 머리털이 빠지는 게 그치지 않았다(发脂如泉,脱发不止).”라고 묘사되어 있던 것을 미루어 보아 ‘지루성 피부염(Seborrheric dermatitis)’과 동반된 탈모 증상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지루성 피부염은 홍반(붉은 반점)과 가느다란 인설(비듬), 딱지 등을 주요 증상으로 하며, 주로 40~70세, 그리고 남성에게서 좀 더 호발하는 피부 질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생후 3개월 이내의 어린 아이에게서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원인은 아직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으나 말라세지아(Malassezia)라는 곰팡이균의 감염, 면역 기능 이상, 기름기가 많은 피부 등이 연관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스트레스, 우울증과 같은 정신 건강 문제, 피로, 파킨슨병과 같은 신경계 질환 등이 발병의 위험 요소로 작용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지루성 피부염이 두피에 발생한다면, 염증과 가려움증으로 인해 모근이 약해지며 일시적으로 많은 머리카락이 빠지는 증상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증상이 나타나면 탈모가 생겼다고 오인할 수 있습니다.
조비는 즉위 전에도 불안정한 계승 구도와 아버지와의 갈등(이복 동생인 조충에 대한 편애 등)으로 인해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게다가 평소에 단 음식도 좋아했던 조비의 식습관도 지루성 피부염 발생 위험도를 높였을 것이라 생각됩니다(혈당이 높아지는 식사로 인해 인슐린 저항성이 증가되면 염증 유발이 더 잘 되어 지루성 피부염 발생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3-4).
조비의 아버지인 조조나 형제인 조창, 조식 등에게서는 탈모 관련된 기록이 보이지 않는데요, 유전성 탈모 가능성도 떨어지므로, 위와 같은 두피염에 의한 2차성 탈모였을 가능성이 더 높을 것으로 생각되며, 두피염에 의한 탈모였기에 약을 이용하여 증상의 호전을 얻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현대에는 이러한 지루성 피부염에 의한 두피 문제는 항지루성 샴푸(2.5% selenium sulfide-말라세지아에 대한 항균 작용이 있음)를 사용하여 치료하는데, 고대 중국에서는 외대비요에 나온 것과 같은 다양한 약초를 배합하여 만든 약물을 바르는 방식으로 치료를 시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루성 피부염이라는 개념을 몰랐기에 ‘기름기가 솟아나오며 나타나는 탈모’에 효과적인 비법이라고 전승 되었겠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머리카락이 빠질 만큼의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도 나름대로 위를 부강하게 만들던 조비는 3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납니다.
반드시 갑작스러운 죽음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정사]에 따르면 전해 음력 10월(양력 12월), 독한 추위로 물길이 얼었다고 합니다. 두 달 후인 음력 1월(양력 3월), 허창성의 남쪽 문이 이유 없이 저절로 무너져 내려 조비가 이를 불길하게 여겼다는데요. 사서에서 이러한 징조가 지니는 의미를 생각해보면, 이때부터 조비의 몸이 나빠졌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유례없던 추위 때문일 수도 있고요.
후계자를 바꾸려 들었으나 예상치 못한 중병에 조예를 황태자로 확정했다는 기록도 있으니, 본인 스스로도 이겨내지 못할 병임을 직감했다는 뜻이겠지요.
같은 해 5월(양력 6월), 조비는 유조를 내립니다. 다음날 붕어했고요.
조비의 사망 원인은 무엇일까?
허창성의 남문이 무너졌다는 기록으로부터 3개월여만에, 불과 39세라는 나이의 조비는 사망하게 됩니다. 아무리 고대의 평균 수명이 현대보다 짧았다고 해도, 39세는 죽음을 당연시 여기기에는 너무나도 젊은 나이입니다.
조비의 아버지인 조조는 사망 시에 65세, 어머니인 무선황후 변씨는 대략 70세까지 살았으며, 그의 할아버지인 조숭 역시 살해당하던 당시의 나이가 65세였으므로 단명의 원인이 되는 유전 질환이 있을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인터넷 상에 떠도는 정보로는 주색잡기에 빠져서 일찍 죽었다고도 하나, 실제 사서에서는 주색에 빠졌다는 묘사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군주가 지양해야 하는 ‘사냥’ 정도는 즐겼다고 합니다.
[연의]에는 현대의 독감에 해당하는 ‘한질’에 걸려 사망했다고 기술되어 있으나, 이 역시 사서에는 없는 내용이며 조비의 이른, 그리고 불명확한 죽음의 원인을 설명하기 힘들었던 나관중이 적당히 가져다 붙인 병명으로 보입니다.
어려서부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특히 형 조앙의 죽음 당시에는 거의 PTSD 수준의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됨) (5), 또한 평소 단 음식을 즐겼다는 사서 속의 기술을 바탕으로 ‘당뇨’에 걸렸으나 치료하지 않고 지내다가 합병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도 고려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서 속의 조비는 당뇨와 같은 만성 질환을 오래 앓은 사람 특유의 쇠약한 모습이 묘사되지 않고 있어서 39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하는 원인으로 당뇨만을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당뇨로 사망했을 것이라 추측되는 조선의 세종대왕도 52세까지 살았으며, 이미 그 전에 다양한 당뇨 합병증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럼 과연 새로운 황조를 연, 의욕적인 39세의 남성을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사서에서 주목해 볼만한 부분은 조비가 사망 전 세 차례의 남정(남쪽에 위치한 오나라 정벌)을 시도했다는 것입니다. 결과만 놓고 볼 때, 조비가 야심차게 시도한 세 번의 정벌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기에 그 자체만으로도 군주였던 조비에게 스트레스 요인으로 작용했겠지만, 단순히 심리적인 압박이 조비를 죽음으로 몰아가진 않았을 겁니다.
정벌의 결과보다는 정벌 자체가 조비에게 문제를 일으켰을 가능성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삼국시대에 오나라가 위치한 중국 남부는 덥고 습한 기후 및 늪지가 많은 환경으로 인해 인해 원래 황하 근처에서 살았던 한족들에게는 방문이나 거주가 상당히 부담이 되는 지역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후 및 환경 조건에서는 고금을 통틀어 ‘전염병’이 창궐하기 쉽습니다. 이로 인해 한족의 남방 진출이 늘어나기 시작한 위진 시대(魏晉, 220∼589)를 거치며 장(瘴)병이란 용어가 생겨났는데, 이는 중국 남부 지방에서 발생하는 풍토성 열병을 아우르는 표현입니다(6).
현대의 관점에서는 말리리아나 뎅기열, 장티푸스, 세균성 이질, 기타 다양한 바이러스 감염증, 그리고 기생충 감염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열성 질환들이 이에 속할 것입니다.
삼국시대까지는 장병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기에 정확히 묘사되지 않지만, 적벽대전, 이릉대전, 그리고 조비의 1차 남정 등에서 군대에 ‘전염병’이 돌았다는 기술이 등장합니다. 무슨 질환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남부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전투에서는 전염병에 대한 언급이 반복되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위생 관념의 한계로 음식이나 물에 대한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모기와 같은 곤충에 물리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 잘 인지하지 못했던 병사들이 다양한 질병에 시달렸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러한 남부 지역에, 222년~225년 사이에 세 차례나 정벌을 감행한 조비 역시 풍토병과 전염병의 감염되었을 가능성이 높지 않았을까요? 물론 사서에는 조비가 병에 걸렸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지만, 첫번째 원정에서 ‘역병’에 대한 언급 이후 위나라의 장수 ‘조인’이 사망헸다는 내용이 있어 무언가 전염병이 고위 관직자 급에게도 돌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려줍니다.
두번째 원정에서는 조비가 강에 빠질 뻔했다는 표현(그 당시 깨끗하지 않은 물에 빠지는 것 역시 수인성 전염병 감염 가능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이 있었는데, 이 역시 조비의 건강 상태에 악영향을 주는 일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듭니다.
이 세 번의 원정마다 조비는 건강 상의 문제를 겪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처음 두 번의 원정까지는 본인은 큰 탈이 나지 않았을 수도 있으나(군대나 주위 장수들은 역병을 겪었다 해도) 세 번째 원정에서는 그 동안의 패전 스트레스와 전쟁 준비에 따른 피로로 인해 지친 몸에, 또 다시 머나먼 남쪽 땅으로의 이동이라는 부담, 그리고 그 지역에서 얻은 질병이 겹쳐 커다란 타격을 입지 않았을까 라는 추측을 해봅니다.
남정 중에 얻을 수 있는 질병 중에 사서에 ‘역병’으로까지 기록되지 않았지만, 전반적인 전쟁 수행에 문제가 될 수 있는 질환들이 무엇이 있을까 고려를 해보았을 때 수인성-식품 매개 감염병 계통이 가능성이 가장 높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요즘으로 치면 노로바이러스 감염증 등으로 인해 장염이 발생하면 아주 심한 고열까진 안 나더라도 복통과 설사, 구토 등으로 전쟁 수행에 차질을 일으키는 인원이 늘어날 수 있으니까요.
물론 이러한 추론을 하더라도, 이러한 질병 발생이 있었다는 사서의 기술을 없고, 조비가 이와 비슷한 질병을 얻었다는 확실한 증거 역시 없습니다. 그래도 남정이라고 하는 특수한 정황 상 조비가 수인성-식품 매개 감염병을 얻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특히 ‘물’에 의해 감염될 수 있는 병 말이죠.
식품 섭취에 의한 감염 가능성이 낮다고 보는 이유는, 비록 남방 지역에 방문해서, 조비가 양자강에서 얻을 수 있는 민물고기 음식 등을 즐겼을 가능성이 있으나(아버지인 조조가 전복을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었으니 아들인 조비도 그 입맛을 배웠을 가능성이…), 당시 기주에 기근이 들어 전반적인 군량 수급 상황이 좋지 않을 시기에 딱히 폭군이나 암군도 아닌 조비가 자신의 식사를 잘 차리길 원치 않았을 수도 있고, 혹여 여러 가지 민물고기를 활용한 음식을 준비한다 해도 강물이 얼어붙을 만큼 추운 날씨(당시 오나라 수도 근처에 음력 10월에 도착)에 굳이 날 음식을 먹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음식보다는 식수 매개 감염의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데, 중국 사람들이 예전부터 차를 마시는 문화가 있으니 어느 정도 감염에 방어가 되었을 수도 있으나 차는 끓여 마신다해도 모든 식수를 끓여서 준비한다는 개념은 부족했을 것이고, 또한 식수는 최대한 깨끗이 준비한다 해도, 식기를 씻거나 할 때 쓰는 물은 그냥 근처에 있는 강물이나 우물물을 가져다가 사용했을 것입니다.
이러다 보면 아무리 왕이라 한들, 수인성 감염병에 노출될 수 있는 것이지요.
이제부터는 정말 추측의 영역이지만,
조비는 추운 날씨에 강물이 얼어붙어 오나라 수도로의 진군이 어려워진 문제 + 기록에 남지는 않지만, 병사들에게 영향을 줄 정도로는 슬금슬금 돌았던 수인성 감염병(바이러스성 장염이나 장티푸스 등등)으로 인해 회군을 결정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회군하다가 허창성에 도착했을 즈음엔 본인도 병사들과 비슷한 장염 증상 등이 좀 심하게 나타나서 정말 불길하다 여기고 빨리 낙양으로 돌아간 것이지요(안정가료도 해야하고, 자기가 병을 얻어온 것으로 보이는 남쪽 지방에서 멀어지고 싶은 마음에…).
그런데 낙양으로 돌아온 지 2~3개월쯤 지나서 몸 상태가 매우 나빠지더니, 본인이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음을 느끼고 그 때까지도 후계자로 확정하지 않았던 조예를 차기 황제로 지명하고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이 부분이 기이했기에 나관중도 ‘한질’이라는 질환을 슬쩍 집어넣었던 것이겠지요.
지금 명확한 증거를 제시할 수는 없지만, 전쟁터를 떠난지 4~5개월여 정도 지나서 몸이 나빠지기 시작한 것이라면 잠복기가 상당히 긴 수인성 감염병에 걸렸던 것일 수도 있으며, 그 중 가능성이 높은 것은 ‘이질아메바 감염증(Amebiasis, amoebic dysentery)’ 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질아메바 감염증은 잠복기가 수주에서 수년씩 될 수 있으며, 주로는 무증상이거나 가벼운 장염을 일으키지만 드물게 ‘전격성 장염(fulminant colitis)’를 일으킬 수 있으며 이 경우에는 치사율이 40%까지 상승하게 됩니다. 전격성 장염 증상으로는 초기에는 복통이 있다가 피가 섞인 설사가 나오기 시작하며, 증상이 심해질 경우 혈변의 횟수가 증가하여 하루에 10~20회 가까이 나오기도 하며, 오심, 구토 증상과 몸무게 감소, 발열이 나타나기도 하며 빈혈이 초래되기도 합니다.
현대라면 이런 증상이 나타날 때 원인균을 감별하고 적절한 항생제(메트로니다졸)를 사용하며, 탈수와 빈혈에 대한 적절한 대증치료를 통해 질병을 극복하도록 도울 수 있겠지만, 조비가 살던 시대인 고대 중국에서는 이와 같은 치료가 불가능했으므로, 전격성 장염까지 진행했을 경우에는 사망에 이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지속된 복통과 설사, 체중 감소와 빈혈을 앓다 보면 어느 순간 본인이 다시 일어나기 힘들어질 것이라는 예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조비는 조예를 후계자로 지목하고 사망한 것은 아닐까요?
사서에 전염병에 대한 기록이나 기타 질병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없었기에 어디까지나 추측과 상상의 영역이지만, 조비가 남정 이후 사망한 정황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이와 같은 추정 진단도 한 번쯤은 고려해려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각주>
2. 참고문헌: Ali Esmail Al-Snafi, PHARMACOLOGICAL AND THERAPEUTIC IMPORTANCE OF ERIGERON CANADENSIS (SYN: CONYZA CANADENSIS). 2017. Indo American Journal of Pharmaceutical Science.
3. Sevil Savaş Erdoğan, Tuğba Falay Gür, Ezgi Özkur, et al. Metab Syndr Relat Disord. 2022 Feb;20(1):50-56. Insulin Resistance and Metabolic Syndrome in Patients with Seborrheic Dermatitis: A Case-Control Study.
4. Aysegul Ozgul, Nihal Altunisik, Dursun Turkmen, et al. North Clin Istanb. 2023; 10(2): 271–276. The relationship between seborrheic dermatitis and body composition parameters
5. Lindsay Huffhines, M.S, Amy Noser, M.S., and Susana R. Patton, Ph.D. The Link Between Adverse Childhood Experiences and Diabetes. Curr Diab Rep. 2016 Jun; 16(6): 54.
6. 전염병만큼 무서운 미움의 물결. 안동섭. 2020년. 동아비즈니스 리뷰. 6월호 Issue 1. https://dbr.donga.com/article/view/1306/article_no/9638/ac/magaz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