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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tros Sep 23. 2024

삼국지 속의 기생충학?!?

회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남자, 진등의 이야기

오늘도 정미현 작가님과 삼국지 속 의학(+음식)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은 회를 위해 목숨을 불태운 상남자... 진등입니다.



"두 발 달린 건 사람 빼고, 네 발 달린 건 책상과 의자 빼고 다 먹는다"는 우스갯소리, 들어보셨나요? 

중국의 식문화를 표현하는 문장입니다. 

그만큼 고기 요리가 발달했다는 뜻이겠지요.



두 발 달린 것부터 그렇습니다. 궁보계정, 라조기, 깐풍기…. 중국은 아무래도 닭 요리에 진심인 모양입니다.

닭 요리는 삼국지와도 인연이 깊습니다. 


하후연의 복수를 위해 귀 큰 놈의 한중을 침공한 조조. 하지만 전황은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습니다. 

고민하던 조조는 “계륵(鷄肋), 즉 닭갈비라는 영을 내립니다.


뜬금없는 소리에 모두가 당황하던 그때, 오로지 양수만이 군장을 꾸리며 회군할 준비를 합니다. 사람들이 왜 그러냐고 묻자, 양수는 답합니다. "무릇 계륵은 버리기에는 아깝고 먹기에는 얻을 살이 별로 없으니, 대왕께서는 이를 한중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왕께서 환군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양수가 이 때문에 처형되었다는 것은 <연의>의 각색이나, 조조가 “계륵”이라는 영을 내렸다는 것은 사서 <구주춘추>에도 나온 실화입니다. 아마 닭고기를 먹고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실제로 조조는 닭고기를 좋아했습니다. ‘조조닭’이라는 요리가 있을 정도입니다.


밤낮으로 일에 치인 조조가 두풍으로 자리에 몸져눕게 되었을 때입니다. 오늘날로 따지자면 취사병 한 명이, 군의관의 제안에 따라 현지의 토종닭에 약재와 술 등을 넣어 통닭 요리를 만들었답니다. 그 닭을 먹은 조조는 금방 병상에서 일어났고, 그 후로도 몸이 피로할 때면 이 요리를 찾았습니다. 건강식으로 만든 이 닭 요리는 조조의 이름을 따 ‘조조닭(曺操鷄, Caocaoji)이 되었는데요, 오늘날까지 합비의 명물 요리로 유명합니다.



이 요리에 대해 “불그스럼한 닭고기가 기름기 반지르르하고 고기맛이 고소하며 모양이 이쁘다. 통닭을 먹으려고 닭다리를 들면 뼈가 스스로 물러나고 고기를 맛 보면 연한데 맛의 여운도 은은하게 오래 간다.” 라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진> 조조닭 요리(사진 출처 - PANDA translation).




물론 후한 말 사람들이 닭만 먹었을 리 만무합니다. 그렇다면 또 무슨 요리를 먹었을까요?


관련 사서에는 고기에 대한 기록이 종종 등장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요리법보다 통상적인 (사냥을 나가느라 혹은 제사를 지내느라) 고기를 잡았다, (검소하여) 고기를 먹지 않았다 또는 (사치스러워) 고기에 질렸다 등의 이야기지요. [후한서] <동탁열전>을 보면, 동탁이 죽자 “장안의 선비와 부인들이 금은보화를 팔아 술과 고기를 마련해 잔치를 벌였다”는 내용도 있으니, 고기는 잔치에서의 필수 메뉴였을지도 모릅니다.


재미있는 표현도 하나 있는데요, 채옹이 하진에게 변양을 추천하면서 한 말입니다. “책에 이르기를 ‘소를 삶는 솥에 닭을 삶으면 물을 많이 넣어 묽어져서 먹을 수가 없거나, 물을 적게 넣어 타서 먹을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큰 그릇을 작은 일에 써버리니 마땅치 않게 사용한 셈입니다. 이런 보배와 같은 솥에 제사용 소를 넣어 제삿상에 올릴 소고깃국을 끓이는 대신, 저민 고기를 오랜 시간 한가로이 볶아서 졸이고 있으니 이 채옹은 근심하며 분하게 여길 뿐입니다.”


할계우도(割鷄牛刀) 혹은 우도할계(牛刀割鷄), 즉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쓴다는 속담이 떠오릅니다. <연의>에서는 화웅이 관우에게 목이 썰리기 전 호기롭게 외쳤던 말이기도 합니다. 소고기 요리법을 주장에 재치있게 사용했어요. 동시에 채옹만한 명사도 고기 조리법의 차이를 아는구나 싶어 흥미롭습니다. 어쩌면 대화의 상대자인 하진이 도축업을 통해 성공한 인물이라 일부러 고기 요리법을 예시로 들었을지도 모르지요.

물론 삶거나 볶는 것 외에도 다양한 요리법이 있었습니다.



매운 맛으로 잘 알려진 사천(촉한) 요리를 봅시다. 

아마 후한 말에서 위진 시대에는 조리를 조금 달리 했을 것입니다. 고추는 청나라 대에나 도입되었으니까요. 다만 후한 말, 그리고 위진 시대부터 매운 맛을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아마 그때는 생강이나 산초 등의 향신료를 썼겠지요. 지금도 사천은 산초의 산지로 유명합니다.


산초. 열매를 감싸고 있던 불그스름한 껍질을 갈아서 요리에 사용. 출처 - 동아일보(20191104)



매운 맛뿐 아닙니다. 촉은 고기를 상당히 달게 조리해 먹었습니다. 촉 출신의 맹달은 투항 후 조비에게 촉의 고기는 밋밋해 꿀이나 엿을 많이 쓴다고 설명해 단맛성애자 조비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지요.

중국 요리 하면 어패류도 빠질 수 없습니다.


조조는 전복을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조식은 아버지를 추모한 <구제선주표>에서 조조가 전복을 무척 좋아해, 서주자사로 근무하는 동안 전복을 200개나 구해다 바쳤다고 한 바 있습니다.


사실 조조는 미식가로 유명했습니다. 

<사시식제(四時食制-사계절의 음식 제도)>라는 글에서 각종 식재료와 요리법에 대해 다뤘을 정도로요. 현재는 생선에 대한 부분만 전해집니다. 조기는 가시가 연하고, 메기는 찜으로 먹을 수 있으며, 전어는 식초로만 요리할 수 있고…. 등등이요. 일반적으로 여름 전어는 초절임으로, 가을 전어는 구이로 먹는데, 여름 전어만 먹었나 봅니다.


구이나 찜, 절임뿐 아닙니다. 현대 중국인은 잘 먹지 않는 도 당시에는 제법 흔한 요리법이었습니다.





회(鱠)”라는 한자의 어원



회를 먹는 문화는 주 왕조(기원전 1046년 – 256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수세기에 걸쳐 점점 더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식당과 의사들이 여러 가지 질병을 생선 섭취와 연관시키기 시작하면서 인기가 시들해지긴 했지만, 일부 지역, 특히 남부 지역에서는 중국의 생선회 섭취 전통을 유지해 왔습니다.


한나라(기원전 206년~서기 220년)에 주로 출판된 주(周)나라 시대의 사회와 정치에 관한 문헌집인 예기(禮記 - 礼记)에는 생선회, 양고기, 쇠고기를 얇게 써는 방법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총칭하여 "膾(kuaì)"는 진나라(기원전 221~206년) 이전부터 고대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요리 중 하나였습니다. 생고기와 생선은 종종 炙(zhì)라고 알려진 구운 고기와 함께 귀족을 위한 연회에 제공되었습니다.


삼국지의 배경이 되는 후한 말, 그리고 위진시대에도 회는 인기였습니다.

특히 바닷물과 민물고기가 풍부한 남부와 강남 지역에서 인기를 끌었습니다. 얇게 썬 날생선을 구체적으로 지칭하기 위해 새로운 문자(간체로는 鲙이며, 여전히 kuai로 발음)를 발명했을 정도로, 이는 원래 있던 글자 도膾(간체 - 脍)에 생선 부수 鱼를 추가하여 만든 것입니다(1).


실제로 강남의 손권이 첩의 오라비인 조달과 함께 어느 생선회가 제일 맛있는지에 대해 논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조달의 답은 ‘숭어회’. 심지어 손권이 촉의 생강과 함께 먹으면 맛있겠다며 아쉬워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출처는 [신선전], 동진 시대에 쓰여진 지괴소설(기괴한 이야기의 모음으로 훗날 소설의 원형이 되는 문학의 한 갈래)입니다. 저 이야기의 결론은 조달이 회를 다 뜨기도 전에 촉에서 생강을 구해오는(?) 식이니, 신빙성에는 의문을 표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도 그만큼 회를 즐겨 먹었다는 방증이지요.



하지만 삼국지에서 회와 관련해 가장 유명한 인물은 따로 있으니, 바로 진등(陳登, ?~?)입니다.



KOEI 삼국지 12,13,14에 등장하는 진등의 일러스트



진등.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연의>를 읽은 사람은 기억할 만한 이름입니다. 

상당히 초반부에 나와, 아버지 진규와 함께 유비에게 큰 도움을 주는 인물이거든요. 조조와 손을 잡고 여포의 밑에서 일하는 척, 여포의 수족을 하나하나 자르는 솜씨가 예술입니다. 그 후에는 조조를 배신, 유비를 서주의 주인으로 만들죠.


물론 <정사>에서는 다릅니다. 조조를 배신한 적이 없거든요.


진등은 본디 서주의 호족(지방에 근거지를 둔 친족집단) 출신이었습니다. 황건적의 난 등으로 인해 중앙정부의 힘이 강하지 않은 시절이었으니, 호족의 위정 능력이 중요했습니다. 진등은 아버지 진규의 뒤를 이어 서주를 성공적으로 통치했던 모양입니다.


서주목 도겸이 죽자 진등은 사신으로서 유비를 찾아가 서주를 맡아달라 청합니다. 이때 유비는 원술에게 넘기라며 사양하지만, 진등은 원술이 교만한 자라며 유비의 통치를 고집합니다. 도겸의 유언도 있었겠지만, 실제로도 유비를 고평가했던 모양입니다. 훗날 “유비는 패왕의 재력이 있다”고 했으니까요. 내로라하는 각 세력의 수장에 비하면 별 볼일 없던 유비를 패왕이라고까지 표현하다니, 통찰력이 뛰어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유비와의 연은 깊지 않았습니다. 오래지 않아 여포가 유비를 배신하고 서주를 점령했기 때문입니다.

진등은 여포의 사신이 되어 조조를 찾아가 서주목의 지위를 요구합니다. 조조는 그 대신 진등을 포섭했지요. 진등은 조조와 내응, 여포 토벌에 앞장섭니다. 여포는 결국 목이 떨어지지요.


그뿐 아닙니다. <연의>에는 나오지 않지만, 상당히 중요한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손책이 허도 급습을 위해 광릉의 진등을 공격했을 때입니다. 이때 조조는 원소와의 결전 중이었기 때문에, 손책과 싸울 여력이 없었습니다.

광릉태수 진등 역시 손책과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손책은 진등군의 열 배나 되는 병력을 끌고 왔거든요. 모두가 성을 비우고 피하자고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손책에게 복수를 맹세했던 진등은 이를 수락하지 않았습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진등은 역시나 손책에게 쫓겨났던 엄백호의 잔당을 이용해 손책을 암살했다고도 합니다. 물론 허공의 빈객에게 죽었다는 기록도 있지요.

어느 쪽이든, 손책은 암살당했고, 진등은 그 기회를 틈타 손책군을 급습해 패퇴시켰습니다. 만약 손책이 허도 급습에 성공했다면 조조는 돌아갈 곳을 잃게 되었을 것이고, 원소는 어렵지 않게 방랑군이 된 조조 세력을 궤멸했겠지요. 그렇게 되었으면 역사가 바뀌었을 테고요.


손권군을 물리친 전적도 있습니다. 땔나무 묶음에 불을 붙이고 대군이 온 듯 환호하니, 원군이 온 줄로 착각한 손권군이 놀라 도망갔다고 합니다. 손권이 공격에 약했던 것인지, 진등이 수비에 강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요.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진등은 향년 39세, 한창 젊은 나이에 죽고 맙니다. 그 이유는 바로 생선회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후한서> 광릉태수 진등은 갑자기 근심이 생겨 가슴에 번민이 가득하니 얼굴이 붉게 되어 먹지 못하게 되었다. 화타가 맥을 짚어 보고는 “당신의 위 속에 벌레가 있어 안에서 종기를 만들기 시작했으니 이는 날음식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즉시 탕약 두 되를 지어 두 번 먹게 하니 잠시 후 삼 되 정도의 벌레를 토했다. 그 벌레는 머리가 붉었으며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 몸의 반은 생선회와도 같았다. 그렇게 진등의 고통은 사라졌다. 화타가 이어 말하길, “이 병은 3년 뒤에 재발하겠지만, 좋은 의사를 만나면 치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기일에 이르러 진등의 병이 재발되었으나, 화타가 없어 결국 죽고 말았다. <화타열전>


진등은 대체 무슨 회를 먹었길래 사망에 이르렀을까요?

그 전에, 고대 중국인들이 어떠한 민물생선을 회로 만들어 먹었을지 찾아볼 필요가 있겠지요. 

주나라 시기에도 회로 먹었다고 하며 춘추 시대에도 상서롭고 귀한 물고기로 언급되는 잉어와 [후한서]에 등장하는 민물농어 등이 그 대상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민물농어의 경우는 후한서 속에서  조조가 베푼 잔치에서 좌자가 도술을 부려 놋대야에서 낚아 올린 쑹장(송강, 松江 - 오나라 땅에 위치)의 농어를 회쳐서 나눠 먹는다는 식으로 언급됩니다(2). 


이러한 기록 등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진등이 살던 시기에는 이미 잉어나 농어 등의 민물생선을 이용한 회 요리가 상당히 잘 알려져 있고 즐기는 사람들도 꽤 있었을 것입니다. 

진등이 태수로 있었던 광릉은 해안지방인 서주의 일부입니다. 앞서 조식이 전복을 조조에게 진상한 장소도 서주입니다. 그러니 횟감으로 쓰일 물고기가 많이 잡혔을 겁니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현대 중국의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양저우 시의 북서부에 해당합니다. 근처에 ‘장강(양쯔강)’이 흐르고 있으므로 민물고기 회를 접하기 굉장히 좋은 환경이죠. 장강에는 수많은 해양생물이 살고 있는데 현재 기준으로는 ‘잉어과 잉어목’에 속하는 다양한 물고기들이 서식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잉어 종류 외에 메기, 은어, 가물치, 그리고 철갑상어(현재는 멸종)도 장강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양저우 시의 수로(출처-위키피디아)



아마도 광릉에서는 ‘잉어’를 구하기가 쉬웠을 것이며, 진등이 즐긴 생선회는 잉어를 이용하여 만든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잉어회를 즐기던 진등은 왜 사망에 이르게 되었나?



삼국지 정사에 기록된 진등의 증상과 죽음에 대한 묘사를 분석해볼 때, 그의 사망원인으로 가장 강력히 의심되는 질환은 간흡충증(Clonorchiasis) 입니다. 기생충 감염증의 일종이죠. 


이 질환의 원인이 되는 기생중인 간흡충(肝吸蟲)의 학명은 Clonorchis sinensis(‘간디스토마’라고도 불립니다)이며, 중국 또는 동양 간흡충(Chinese or Oriental liver fluke)으로도 알려져 있는 흡충류입니다. 이 기생성 감염은 한국, 중국, 그리고 베트남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가장 흔히 발견되지만, 러시아의 극동 지역에서는 풍토병의 형태를 띄기도 합니다(3).


간흡충증은 민물고기를 날로 혹은 덜익혀 먹을 때 걸립니다. 붕어, 잉어, 향어, 모래무치, 피라미, 꺽지의 근육에 있는 간흡충의 metacercaria(피낭유충)가 원인이 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의 추측대로 진등이 즐겨먹던 민물생선이 ‘‘잉어’라면, 이를 ‘회’의 형태로 섭취한 진등이 간흡충의 피낭유충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아집니다.



간흡충의 성체. H & E 염색을 하여 붉은색을 띈 상태 (출처 - 위키피디아)



간흡충에 감염될 경우, 그 증상은 감염의 강도와 기간에 비례하여 나타나게 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얼마나 심하게 감염되었는지를 판별하기 위해 기생충의 양을 측정해야하는데, 이는 환자의 대변에 있는 알의 수를 통해 추정할 수 있으며, 보통 의심되는 음식 섭취 3~4주 후에 대변에서 알이 검출됩니다.


간흡충증의 증상은 환자가 감염된 물고기를 섭취하고 10~30일 후에 나타나며, 적어도 2~4주 동안 그 증상이 지속됩니다.


섭취한 간흡충의 양이 100마리 미만이라면 초기에는 거의 증상이 없지만, 환자가 2만 마리 이상의 간흡충을 섭취했다면, 급성 담관염(acute cholangitis)의 증상들인 황달, 우상복부 통증, 구역, 구토, 발열, 식욕부진, 몸살 등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4). 만성화가 되면 담석증과 같은 증상도 발생할 수 있죠.


만약 간흡충의 만성적인 감염 상태에 처한 환자가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방치되면 결국 담관암(Cholangiocarcinoma)이 발생할 위험성이 증가하게 됩니다. 담관암으로 진행하는 기전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지만, 담관이 기생충에 의해 지속적으로 손상되고, 간흡충이 부분적으로 축적되는 것에 의해 담즙의 정체 및 반복적인 담관염이 발생하는 것, 그리고 염증에 의해 분비되는 물질의 독성 등에 의해 암이 발생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5).


‘장강에 흔히 서식하는 잉어의 생식으로 인한 간흡충 감염’이라는 역학적인 추측 뿐만 아니라, 사서 속에 묘사된 진등의 증상도 간흡충증을 의심해 볼 만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앞서 언급했던 사서의 기술내용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1) <후한서> 광릉태수 진등은 갑자기 근심이 생겨 가슴에 번민이 가득하니 얼굴이 붉게 되어 먹지 못하게 되었다.   

  -> 이는 진등의 소화기 계통이 불편하며(가슴이란 표현에서 상복부 통증을 추측 가능, 구역질 동반 가능성) 이와 함께 식욕 부진이 발생(먹지 못하게 되었다)했다는 것으로, 간흡충증에 의해 발생하는 급성담관염 증상과도 비슷합니다. 


(2) 화타가 맥을 짚어 보고는 “당신의 위 속에 벌레가 있어 안에서 종기를 만들기 시작했으니 이는 날음식 때문입니다.”

  -> 맥을 짚어 기생충 감염을 진단했다는 것이 신기하지만(현대에는 대변 내 충란 검사법, 피부 반응 검사(C.S. skin test), 내시경 역행 췌담관 조영술(ERCP), 초음파, 혈액 검사, CT 등을 이용해 진단 합니다), 이 부분은 고대의학의 영역이나 넘어가겠습니다. 

화타는 위 속에 벌레가 있다고 하는데 실제 간흡충은  간, 담관, 혹은 담낭 쪽에 살며 감염 증상을 일으킵니다. 위장에 주로 기생하며 위염이나 위궤양 같은 염증을 일으키는 것은 고래회충(Anisakis)인데, 이 기생충은 고등어와 같은 바다에 사는 생선을 먹어서 감염되는 경우가 흔하므로 민물고기를 섭취했을 가능성이 높은 진등에게는 맞지 않는 내용일 것 같습니다. 

어찌되었든 전체적으로는 날음식의 섭취를 통해 들어온 벌레가 염증(종기)을 일으키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을 보아 회를 먹어서 발생한 기생충 감염에 대한 언급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3) 그러고는 즉시 탕약 두 되를 지어 두 번 먹게 하니 잠시 후 삼 되 정도의 벌레를 토했다. 그 벌레는 머리가 붉었으며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 몸의 반은 생선회와도 같았다. 그렇게 진등의 고통은 사라졌다.

  -> 탕약의 성분은 알 수 없지만, 내용 상 ‘구토’를 유발하는 약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간흡충의 성체가 1 cm 크기 정도이므로, 급성 담관염을 일으킬만큼 많은 수(2만 마리 이상)의 간흡충이 진등의 몸 안에 있었다면  세 되에 가까운 양의 벌레가 나올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담관에 서식하는 간흡충이 밖으로 나올 정도면 녹색빛을 띄는 담즙성 구토였을 것 같으나 구토물의 색상에 대한 묘사는 없습니다. 

그러나 구토와 함께 나온 벌레가 머리가 붉었으며 반은 생선회와 같다는 기술은, 담홍색(옅은 붉은색) 혹은 황갈색을 띄며 나뭇잎 모양을 지닌 간흡충의 외형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4) 화타가 이어 말하길, “이 병은 3년 뒤에 재발하겠지만, 좋은 의사를 만나면 치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기일에 이르러 진등의 병이 재발되었으나, 화타가 없어 결국 죽고 말았다. <화타열전>

  -> 현대라면 진등은 프라지콴텔(praziquantel)이라는 구충제 복용을 통해 성공적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진등이 살았던 시대에는 그와 같은 약품이 없었기에, 화타는 일종의 구토제 처방을 통해 일시적으로 대량의 기생충을 제거하고 감염의 원인을 피하는 방법(잉어회를 먹지 않기)을 제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완벽히 제거되지 못한 기생충이 만성감염을 거쳐 담관암으로 진행했거나 혹은 잉어회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회 매니아가 3년이나 참은 건 크게 노력한 것?) 진등이 다시 간흡충을 섭취하여 급성 감염으로 사망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기생충으로 인해 죽은 사람이 진등뿐은 아니었겠지요. 그래도 기술했듯 수당송 시기까지도 회는 인기 메뉴였습니다. 금나라와 원나라 때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명나라 때는 생선회의 명맥이 끊긴 모양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병사들이 생선회를 먹는 조선인의 모습을 보고 야만스럽다고 한 적이 있으니까요. 

즉 원나라 혹은 명나라쯤부터 생선회의 섭취를 중단했다는 것이지요.

아마 원명시대에 흑사병을 비롯, 여러 전염병이 돌면서 회의 섭취가 줄어들다가 없어지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전염병이 돌면 익혀 먹는 것이 상식이니까요.

그래도 식문화가 사라지는 데 꽤 걸린 것을 보면, 진등을 제외한 역사적 주요 인물은 회를 먹고 죽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IF] 진등이 사망하지 않았더라면?


“원룡(元龍)처럼 문무와 담력, 포부를 갖춘 자는 고대에서나 구할 수 있을 뿐, 창졸간에 그와 비견될 자를 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유비가 유표와 함께 천하인을 논할 때 했던 말입니다. 유비는 사람 보는 눈이 매우 뛰어났던 사람입니다. 초야에 묻혀 있던 제갈량을 삼고초려한 사례나 막중한 한중태수의 자리에 바로 그 장비 대신 일개 병졸 출신이었던 위연을 한중태수로 임명한 사례만 봐도 알 수 있지요. 바로 그 ‘읍참마속’의 주인공, 마속을 평가한 이야기는 거의 예언 수준입니다.


그런 유비가 그렇게나 높게 평가했던 이 ‘원룡’이란 사람이 바로 진등입니다. 원룡은 진등의 자거든요.

문무와 담력, 포부라니, 그야말로 만능형 인재입니다. 실제로 서주에서 선정을 베풀기도 했거니와, 손책을 무찌르기도 했으니 그런 것도 같습니다.



이런 진등이 요절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의외로 큰 차이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진등의 인생을 살펴보면, 진등의 목표는 ‘서주의 안정화’였습니다. 서주 출신 호족으로서 서주의 백성들에게 책임감을 지니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수비의 기록은 있지만, 정벌의 기록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서주가 진등 사후에도 위협을 받았느냐 하는 점을 살펴보아야겠지요. 진등은 208년과 2011년 사이에 죽은 것으로 추측됩니다.


서주는 200년, 관우가 조조에게 투항한 시점부터는 쉽게 진압된 소소한 반란 정도를 제외하면 대체로 무탈히 위, 그리고 위의 뒤를 이은 진의 차지였습니다. 그러니 진등이 살아 있었다 한들 큰 차이는 없었을 듯합니다.

이런 반박도 가능하기는 합니다. 진등은 도겸 사후 유비를 선택했을 정도로 유비를 좋아했습니다. 그럼에도 조조의 사람이 되었던 것은, 당시 유비의 힘이 난세를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보잘것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입촉에 성공하고, 자신의 기반을 마련한 유비와 내통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반박 말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서주의 위치입니다. 



후한 13주 지도 (출처 - 옐로우의 삼국지 역사지도: http://yellow.kr/sammaps.jsp)



서주는 청주와 연주, 예주와 양주(강동)에 맞닿아 있습니다. 청주와 연주, 예주는 조조의 세력권이었으며, 양주는 손권의 세력권입니다. 유비의 촉과는 완전히 반대 방향입니다. 그러니 유비와 손을 잡기는 어려웠겠지요. 애초에 유비에게 호감이 있다고 해서, 저가 쌓아 올린 모든 업적과 저만 믿고 따르는 백성들을 버리고 유비에게 갈 사람은 아니기도 하고요.


물론 역사가 바뀌지 않았더라도, 인재덕후 조조에게 진등의 죽음은 여전히 아쉬운 것이었습니다. 

[정사]에 따르면 조조는 장강에 이를 때마다 진등의 계책을 쓰지 않아 손권이 힘을 길렀다며 탄식했답니다. 

무슨 계책인지는 모르겠지만, 손권의 힘이 커지기 전에 처치할 방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렇게 보자면 또, 손책을 암살했듯 손권을 처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문헌>  

 (1) 출처 - China's Long History of Eating Raw Fish, https://www.theworldofchinese.com/2021/06/chinas-long-history-of-eating-raw-fish/

(2)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21614

(3) Victoria Locke, Alexander Kusnik, Melissa S. Richardson. Clonorchis Sinensis. StatPearls. December 19, 2022.

(4) Qian MB, Utzinger J, Keiser J, Zhou XN. Clonorchiasis. Lancet. 2016 Feb 20;387(10020):8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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