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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tros Dec 30. 2022

영화 [스틸 앨리스] 속의 나비작전

인간이자 의사로서 느끼게 되는 양가감정

어느 새 2022년도 다 지나갔습니다.


제 브런치를 방문해주신 분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2023년은 더욱 건강하고 행복한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약간은 무거운 주제지만, 올해의 마지막글도 재밌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영화 내용 전반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이를 원치 않는 분은 먼저 영화를 감상하신 후에 제 글을 봐주시길 바랍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우리가 가장 두렵게 느끼는 질병은 무엇이 있을까요?

아직 완벽하게 정복되지 못했고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암, 수년 간 전세계 사람들에게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쓰기를 지속하게 만들었던 COVID-19와 같은 전염병, 여러가지 사고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중증 외상, 장기적으로 다양한 합병증을 일으킬 수 있는 고혈압이나 당뇨와 같은 만성 질환…

이런 질환들 모두가 우리에게 큰 부담을 주고 이 질병들을 극복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인간의 평균 수명이 늘어나고 노년의 삶의 시간이 늘어나면서 우리를 가장 두렵고 걱정스럽게 만드는 병은 아마도 ‘치매(Dementia)’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치매의 가장 흔한 원인이 바로, 우리에게도 이름이 익숙한 알츠하이머병(Alzheimer’s Disease, AD)입니다.
이 질환은 뇌 안에 이상단백질(주로 베타아밀로이드타우 단백질)이 비정상적으로 쌓이면서 세포를 죽게 만들고, 이로 인해 기억 장애, 언어 장애, 시공간 지각 능력 장애와 같은 다양한 이상 증상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 질환은 진행성이기 때문에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환자는 점차적으로 일상 생활을 독립적으로 수행할 능력을 잃게 되고 보호자의 도움에 의존하게 됩니다.


알츠하이머병의 병리(좌-정상, 우-알츠하이머병). 알츠하이머병의 경우, 뇌의 신경세포 주위에 베타아밀로이드가 축적되거나, 신경 세포 내에 타우 단백질이 축적되는 모습이 관찰됨.




전세계적으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예방과 치료법을 찾기 위해 노력 중이지만, 아직까지는 완벽하게 알츠하이머병의 발병을 막거나 이미 발병한 환자를 완치시키는 방법이 개발되진 않았기에, 또한 평균 수명의 증가로 발병하는 환자들이 늘어나고 있고, 장기적으로 환자와 주위 사람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 혹은 가족, 친지의 발병에 대해 염려할 수밖에 없는 질환이기도 합니다.





예전처럼 단순히 ‘치매’라는 포괄적인 병명이 아니라 ‘알츠하이머병’이라는 질환에 대한 인식이 증가하면서 다양한 영화나 드라마, 소설 등에서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환자의 이야기가 다루어지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영화 중에서는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년, 한국)], [장수상회(2015년, 한국)], 그리고 2021년에 개봉했던 [더 파더(영국-프랑스 합작)] 같은 작품들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환자와 그를 돌보는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 바가 있습니다.






여러 영화 중에서 제 기준에 ‘알츠하이머병’에 대해 상당히 의학적으로 잘 다룬 작품을 꼽자면 ‘스틸 앨리스’라는 작품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스틸 앨리스는 미국에서 2014년에 만들어져, 우리나라에서는 2015년에 개봉했던 영화로, 주인공인 앨리스 홀랜드라고 하는 50세의 언어학(Linguistics) 교수에게 알츠하이머 치매가 발병하면서 생겨나는 변화들을 담담하면서도 서글프게 그리고 있습니다(각주 1).





2015년이면 제가 신경과 전문의가 된 지 5년 정도 지났을 시점이었고,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며 교수로서 학생도 가르치고 제 세부전공인 파킨슨병과 다양한 이상운동질환 환자들을 만나고 있을 때였습니다. 물론 신경과의 특성 상, 알츠하이머병 환자분들도 외래에서 종종 뵙고 있었죠.

처음에는 이 영화의 내용을 자세히 몰랐으나(제목만 듣고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관련 있는 판타지 영화 같은 거라 생각했었습니다), 친구가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환자에 대한 영화이고 네 전공과 관련 있으니 조금 더 다르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라 설명하며 같이 보러 가자고 해서 저 역시 간만에 영화관으로 향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보통 병원 이야기나 질병에 대해 다루는 영화들은, 의사의 입장으로 볼 때는 좀 애매하다 싶을 때가 많습니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보니 ‘의학 지식’이나 ‘병원의 실제 진료 상황’이 자세히 묘사되기 보다는, 의사/의학/병원은 어디까지나 양념이고 나머지 드라마가 주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큰 기대는 없이 보러 간 영화였는데, 제 예상보다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내용들이 잘 그려져 있어서 상당히 놀랐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영화 주인공인 앨리스는 객관적으로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미국의 명문대 중의 하나인 콜롬비아 대학(2014년에 뉴욕 여행 중 방문한 적이 있어서 더 반가웠던 대학이었습니다)에서 언어학 교수로서 자신의 커리어도 착실히 쌓고 있었고, 의사인 남편과 사이 좋게 살아가며 3명의 자식들도 다 잘 키워 놓은 사람이었으니까요.

배우의 길을 가려는 막내딸과는 약간의 성격과 의견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그것 역시 부모와 성인이 된 자식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일상적인 갈등으로 볼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아직 기억력에 이상을 느끼기 전, 행복했던 그녀의 50번 째 생일파티.




그러나 성공적이면서도 평화로운 그녀의 삶에 이상 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본인의 강의와 조깅 중에 ‘단어’들을 자꾸 기억해내기 힘들어지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언어학 교수였기에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은 단거리 육상선수가 갑자기 뛰는 게 느려지는 것만큼이나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녀가 늘 하던 교내 조깅 중에 전처럼 단어들이 잘 떠오르지 않는 장면을 가지고 만들어진 포스터.



그녀가 의사를 방문하기 전 이런 저런 단어들(상당히 어려운 영단어들이었지만 그녀의 기준에서는 당연히 잘 떠올라야 할 단어들)을 혼자 되새겨보는데, 그것이 전과 같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는 장면도 등장하고, 의사를 방문하여 면담과 ‘간이정신상태검사(Mini-Mental Status Examination, MMSE-각주 2)’ 등을 진행한 후(실제로는 더 다양한 검사를 진행했을 듯 하나 영화에서는 생략된 것으로 보입니다), 알츠하이머병으로 진단받게 됩니다.


남편과 함께 병원을 방문하여 의사와 자신의 증상들에 대해 면담하고 진단명에 대해 듣는 앨리스.



앨리스는 50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였기에, 일반적으로 65세 이후에 발생하는 전형적인 노인성 알츠하이머병이 아닌, 조발성 가족성(Early onset familial) 알츠하이머병으로 진단되었고, 이 경우에는 유전자 이상이 원인이 되는 경우가 있으므로(각주 3) 유전자 검사를 받는 장면과 그녀의 자식들도 유전자 검사를 받아볼지 고민하는 장면들이 등장합니다.

이 때 큰 딸(결국 유전자가 양성으로 나오게 됩니다)과 아들은 검사를 받고, 막내딸은 검사를 받지 않기로 하는데, 현실적으로도 이 검사는 미래의 알츠하이머병 발병 위험도를 판단할 뿐 아직까지는 유전자가 양성으로 나온다 해도 병의 진행을 확실하게 막을 방법은 없기에 막내딸이 하는 선택도 타당한 생각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앨리스의 큰 딸. 결국 유전자 검사에서 양성 결과를 받는 것으로 나옵니다.



영화는 이후 앨리스의 치매 증상이 악화되는 모습들을 계속 보여 줍니다.
앨리스는 여러가지 단어가 쓰여진 종이를 냉장고에 붙여 놓고 외우기도 하고 스스로에 대한 질문들과 답을 반복하며 자신의 기억력을 붙잡기 위해 애씁니다. 하지만 그녀는 점차 기억력과 언어능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결국 자신의 언어학 교수로서의 업무도 더 이상은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이 때쯤, 그녀는 자신이 완전히 인지능력을 상실할 때를 대비하여, ‘자살(약물 과다 복용 방식의)’을 준비하게 되고 이 비밀스러운 자살 프로젝트에 ‘나비작전’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그리고 이 작전의 성공 위해 미래의 자신에게 지시하는 내용의 영상을 미리 찍어 놓습니다.

이러한 슬픈 선택을 뛰어난 교수로서, 사랑스러운 아내로서, 훌륭한 어머니로서 살아오던 자신의 삶의 모습을 다 잃어버린 채로 살아가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들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스틸 앨리스의 원작 소설 표지. '나비'의 이미지가 들어가 있습니다.



나비작전을 준비한 이후로도 그녀의 병은 속절없이 진행되어 집 안에서 화장실을 찾지 못해 실수하는 모습을 보이고(공간 지각능력 장애), 자신의 막내딸이 나오는 연극을 보면서도 딸을 알아보지 못합니다(실인증). 앨리스의 남편은 다른 지역의 좋은 직장에 대한 제안을 받았으나 아내의 증상이 악화되자 그녀를 혼자 둘 수 없어 제안을 거절하고 아내를 간호합니다.

그러나 남편과 다른 가족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증상은 호전 없이 진행되기만 하였고, 전화기를 냉장고 안에 넣어 놓고 그 사실을 잊어버린 채, 자신의 전화기가 없어졌다고 매우 우울해하기도 합니다. 결국 한 달 만에 남편이 그 전화기를 찾아내는데, 정작 앨리스는 전화기를 잃어 버린지 하루 밖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시간 지각능력 장애). 이후에 큰 딸과 딸이 출산한 손주들을 보게 되었을 때도 역시나 그들을 알아보지 못합니다(실인증 악화).


이런 식으로 점차 모든 인지능력을 상실해가던 그녀는 마침내 나비작전을 실행하게 됩니다. 자신이 촬영해 놓은 비디오 속의 자신을 굉장히 낯설어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면서도 그 영상이 지시하는 대로 천천히 움직여 이전에 모아서 숨겨 놓았던 알약들을 찾는데까지 성공하지만, 집에 찾아온 간병인의 소리에 놀라 약병을 떨어뜨리고 결국은 자신이 무엇을 하려던 것인지 기억해내지 못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게 됩니다.


결국 나비작전을 실패하게 되는 앨리스. 영화 첫부분의 모습과 너무나도 달라진 상태를 보여줍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정말 묘한 양가 감정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눈물이 나기도 했던 부분이었는데, 앨리스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그녀가 이루어 내고자 했던 최후의 목표가 병으로 인해 실패했다는 점에서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사실 자살이라는 형태의 죽음이 좋지 않다고는 생각하지만, 앨리스가 깊은 고민 끝에 준비했던 최후가 그녀가 지니게 된 기억력 장애로 인해 실패한 셈이기에 ‘알츠하이머병’이 얼마나 잔인한 질환인지를 다시 한번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왜 ‘나비’라는 이름을 이 작전에 붙인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습니다.
아마 앨리스는 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프시케(Psyche)를 떠올렸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프시케는 이름 자체의 의미도 영혼이며, 사랑의 신인 에로스의 부인이 되어 인간에서 신으로 승격되면서 나비의 날개를 지니게 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앨리스는 나비 날개로 상징되는 ‘영혼’을 지키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영혼을 이루는 모든 기억을 잃기 전에 죽음을 택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요.


남편인 에로스와 함께 나비날개를 달고 승천하는 프시케.



혹은 나비가 되기 전에 번데기처럼 세상과 단절된 상태로 퇴행하는 자신의 모습을 가족들이 보게 하고 싶지 않고, 가족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다는 마음에 ‘나비’라는 이름의 죽음을 준비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이 작전이 실패한 후에도 앨리스의 병은 계속 진행되어 갑니다. 그녀의 상태가 심하게 악화되자 남편은 그녀의 모습을 더 이상 지켜보기 힘들어, 먼 곳에 직장을 얻어 떠나게 됩니다.


극의 종반에 이르러서는, 앨리스는 막내딸이 연극 각본을 읽어주는 것을 멍하니 듣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딸도 알아보지 못하고 딸이 읽어주는 내용을 알아듣는지도 알 수 없으며, 의미 있는 말도 거의 만들어내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딸이 던진 질문(내가 읽고 있는 것이 무엇에 관한 내용 같나요?)에 단 한마디의 대답을 하게 됩니다.

“사랑.” 이라고 말이죠.


                                                                                 



사랑…이라는 짧은 대답은 ‘알츠하이머병’이라고 하는 이상한 나라에 갇히게 되었지만, 앨리스는 여전히 자신으로 남아 있다는 마지막 신호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나비작전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영혼의 근원인 ‘사랑’만은 잊지 않았다고 호소하는 것 같았습니다.



수년 전 영화관에서 나왔을 때도, 그리고 다시 영화 내용을 떠올리는 지금도 여전히 알츠하이머병과의 싸움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터널 속을 지나고 있는 것과 비슷하지만, 그래도 환자, 보호자, 그리고 의료진 모두가 희망을 버리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생각이 다시금 떠오르게 됩니다.

아무리 알츠하이머병으로 인한 시련이 가혹하더라도, 영화 속의 앨리스가 여전히(Still) 앨리스로 남아 있듯이, 우리 역시 포기하지 않는다면 치료의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봅니다.






<각주>
1.     이 영화의 원작은 2007년에 출판되었던 동명의 소설이며, 이 소설의 작가는 리사 제노바(Lisa Genova)라는 신경과학자(Neuroscientist)입니다. 작가가 신경과학에 대한 지식이 있기에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역시 신경과적으로 알츠하이머병을 잘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2.     실제 환자들이 기억력 저하를 호소하며 신경과 외래를 방문할 때 시행하게 되는 검사로 한국에서는 한국형으로 만들어진 버전(K-MMSE)을 사용합니다. 총점 30점인 검사로,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내에 치매(주로 알츠하이머병)를 선별(Screening)하는 목적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지남력, 기억력, 주의집중력과 계산능력, 언어와 시공간 구성능력을 판별하고자 하는 목적의 질문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3.     조발성 가족성 알츠하이머병의 원인 유전자로는 3가지 정도가 잘 알려져 있는데, 베타아밀로이드 생성과 연관되어 있는 PSEN 1 (14번 염색체), PSEN 2 (1번 염색체), APP (21번 염색체)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있을 경우 이른 나이에 알츠하이머병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콜레스테롤과 지질 대사에 관여하는 아포지질단백과 연관된 유전자(19번 염색체)에서, 아포지질단백 E4(APOE4) 형의 대립 유전자를 지닌 경우에 가족성 알츠하이머병이나 만발성 알츠하이머병(65세 이후 발생)의 위험인자로 작용하게 됩니다(마블의 히어로 영화인 [토르]의 주연배우인 크리스 헴스워스가 이 유전자 이상이 발견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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