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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Sep 03. 2022

나는 그날부터 착한 을이 되지 않기로 했다.

마흔 일곱의 갑질


학원 원장이 월급날 돈을 제때 주지 않았다. 이유는 내가 갑자기 그만둔 게 화가 나서. ‘아직 급여가 입금되지 않아 연락드립니다.’ 그랬더니 원장은 ‘ 응 맞아 입금 안 했어. 주기 싫어서 안 했다.’ 내가 갑자기 그만두게 되어 학부모의 불만, 학원 운영에 본의 아니게 피해를 끼쳤다는 것이다. 적어도 미안하다는 사과를 받아야겠다는 것이다.


내가 일한 업무시간에 대한 급여는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 당연히 받아야 하는 금액이다. 그런데 사과하면 돈을 주겠다고? 부당하다. 나는 일부로 그만둔 게 아니다. 그만둘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학원 원장은 대치동 1타 출신이란다. 지금도 꽤 잘 나간다. 한 번 수업하는데 학생 수가 70명은 기본이다. 그 학원 밑에서 나는 조교처럼 일했다. 평일에는 자료 작업, 주말에는 학생들 클리닉 수업을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원장이 업무 외 시간에 연락해 영화를 같이 보자고 했다. ‘탑건 매버릭’이 요즘 핫하던데, 영화관에 안 가본 지 오래되었으니 같이 보러 가 주면 안 되냐는 핑계로 말이다. 문자를 받고 너무 화가 났다. 원장은 내가 남자 친구가 있는 사실도 알고 있다. 심지어 원장은 40대 후반, 아이가 둘 있는 유부남이다. 근데 본인이 ‘아르바이트생’이라 칭하는 내게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한다고? 질문을 받았다는 사실이 자체가 큰 상처였다. 그때의 기억을 곱씹어 써 내려가는 이 순간에도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런데 그렇게 나에게 상처를 준 당사자는 내가 거절했고 본인이 사과했으니 없었던 일이 되나 보다.


영화 보자는 연락을 거절한 후 처음 만나는 근무 시간이 나는 두려웠다. 그 어색함을 어떻게 견디지? 더군다나 평일 자료 작업은 학원에 원장과 나 둘 뿐이었다. 숨 막히는 업무시간이 끝나고 난 곧장 퇴근했다. 아무 일도 없었고, 그래 여름방학특강 기간만 버티자 하고 긴장을 쓸어내렸다.


근무 끝난 후 다음날 저녁, 폰이 울린다. 원장한테 온 전화다. 불길하다. 그리고 그 불길함은 틀리지 않는다. 내 업무실수였다. 하지만 원장은 어느 순간부터 조금만 실수해도 폭언 수준으로 전화통에 대고 고래고래 윽박질렀다. 그날 역시 나에게 과하게 윽박질렀고, 내가 실수하지 않은 부분에 과하게 화를 내어 싸우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무 일 없던 척 학생들 앞에선 존댓말을 써가며 나를 대하는 그 괴리감에 토악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출근 후 나는 갑자기 오한이 생기고, 입술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 공간에 있는 것 자체가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조퇴를 하고 집에 왔는데 열이 39도였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관두기로 했다.


고작 상사가 영화 보러 가자고 한 말 때문에 관두었다고?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아니다. 평일에 원장과 단둘이 근무해야 하는 환경, 그리고 어쩌다 한 번의 승낙이 당연한 것이 되어버려 점심 식사하러 학원 밖 외부로 원장 차를 타고 식사를 해야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원장은 선을 넘어버렸다. 여느 때처럼 외부에서 점심 식사 후 차를 타고 다시 학원으로 돌아가나 싶었는데, 용인 고속도로를 지나쳐 가는 것이었다. 너무 놀랐지만, 애써 차분한 척 어딜 가냐고 물었다. 늘 점심 먹으면 카페를 가질 않았냐고 하면서 더 이상 알려주지 않았다.


혹시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몰라 차 안에서 원장과 평온하게 대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결국 원장은 내 허락은 구하지 않은 채로 충주 카페까지 갔다. 나에게는 최악의 하루였다.


나는 맡은 업무를 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임금’으로 지불받아야 하는 게 마땅하다. 하지만 난 업무시간에 원장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충주에 있는 카페를 가야 했고, 그에 대한 감정노동의 대가로 돈을 받았다. 슬펐다. 임금을 받는 을의 입장인 나는 ‘싫다’ ‘불쾌하다’라는 의사표현을 당시에 정확히 하지 못했다.


어쨌든 그만두는 것으로  고통을 끝내고 싶었으나, 원장은 급여 가지고도 장난을 치며 사과를 해라,  하면 돈을 못주겠다고 어깃장을 놓았다. 실장 남편이 변호사인  말안 했나? 라며 나에게 손해 배상 청구도 이미 조사해봤다며 협박을 했다. 그렇게 나를 공포에 빠뜨렸던 협박과 폭언이 아빠의 전화  통으로 일단락이 되더라. 되려 나에게 제때 돈을 못줘서 미안하다, 그동안 화낸것들 미안하다고 장문의 문자를 남겼다. 원장은 약한 사람에게 강하고, 강한 사람에게는 약한, 못된 상사였다.


‘을’이라고 눈치 보고, 비위 맞춰줬던 순간들이 후회스럽다. 그날부터 나는 착한 사람이 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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