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6.18-6.28
위트있는 최민석 작가의 <베를린 일기>를 패러디해 일주일 동안 베를린 일기를 썼다. 다시 읽어도 재밌는 나의 2018년 베를린 일기 큐!!
베를린 일기 #1 (2018년 6월 18일)
여행 막바지(그러니까 지금부터 11일 후에) 수영복을 입어야 하는 일정 탓에 한국시각으로 새벽 2시에 제공된 첫 번째 기내식을 과감하게 패스했다. 대신에 남아프리카산 레드와인 작은 한 병을 재빨리 비우고, 그 덕에 춥고 불편한 가운데서도 제법 한숨 잘 자고 일어났다.
등받이를 세우고 스트레칭을 하면서 이 비행기에선 처음이자 마지막일 기내식을 먹던 중 문득 어제 전반전 0:1이었던 독일과 멕시코의 월드컵 예선 결과가 미친듯이 궁금해졌다. 왜 기내에선 와이파이가 안될까? 네이버를 아무리 새로고침해도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없습니다'라는 얄미운 메시지만 뜬다.
지금 나는 독일행 비행기를 타고있고, 어제 밤 인천공항 2터미널 253번 게이트에서 자국의 첫 번째 월드컵 경기를 못 볼까봐 안달난 독일 청년들을 위해 TV 채널 변경 문제를 멋있게 해결해 주고 박수와 함성, 심지어 과자까지 받았는데... 미안하게도 마음 속으론 독일이 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미안하다'를 독일어로 익히지도 못했다. 경유지인 스키폴 공항에 도착하게 되면 독일:멕시코 경기결과를 검색해 본 후, 독일어로 '미안하다'를 찾아봐야겠다.
베를린 일기 #2 (2018년 6월 19일)
별다른 이유도 별다른 정보도 없이 그저 베를린에서 일주일 지내고 싶다고 생각했고, 결정했고, 그리고 지금 나는 베를린에 있다.
거리를 가득 채운 커피향과 혼자여도 외롭지 않게 말을 붙여주는 사람들, 4잔을 마셔도 10€가 넘지 않는 맥주와 형형색색 자전거들... 아직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지만 나는 여기 모든 것들이 마음에 든다.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풀 색깔도 마음에 든다. 스타벅스에서도 축구를 보는 이 사람들이 좋다. 그리고 지금 듣고 있는 비투비 신곡 '너 없인 안 된다'도 너무 좋다.
오늘도 구글맵, 데이터 로밍, 보조 배터리와 함께 즐겁고 자신감 넘치는 여행이 되길~ !
베를린 일기 #3 (2018년 6월 20일)
1년 동안 팬텀싱어 덕질을 하며 무수한 날들을 *피켓팅(피튀기는 전쟁같은 티켓팅)으로 단련한 결과, 마침내 베를린필 사이먼 래틀 고별 연주 *취켓팅(취소표 티켓팅)에 성공했다.
취켓팅을 위해 근 한 달간 아침, 저녁으로 베를린필 홈피에 들어가서 수시로 *산책(혹시나 취소표 나온 게 있나 둘러보는 것)을 일삼다 출발 3일전 sold out 이 1 ticket remaining 으로 바뀐 걸 발견하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결제했더니, 심지어 중앙블록 1열이었다. (오케스트라 연주에선 1열이 제일 좋은 좌석은 아니지만 베를린에서도 중블 1열길을 걷게될 줄이야 ㅎㅎ)
고별무대 프로그램은 말러 교향곡 6번.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연주하기 정말로 '지랄맞은' 곡이라는데, 사이먼 래틀의 87년 베를린필 데뷔 곡이기도 하니 정말 의미있는 선곡이다.
콘서트홀은 아담했고 오케스트라와 관객의 거리가 매우 가까웠다. 물리적 거리의 가까움 이상으로 이 곳 베를리너들은 베를린필과 래틀 경을 몹시 사랑하고 있었다. 그들의 특별한 날인 고별 무대에서 나혼자 이방인이 된 것 같아 조금 어색했지만, 이런 의미있는 공연을 현장에서 함께 했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라 할 수 있겠지.
오늘은 10시에 요가를 하고 근처 공원에서 급하게 스타벅스 e-프리퀀시 모아 받아온 돗자리를 깔고 맥주를 마시면서 책을 읽을 예정이다. 베를린 사람 다 됐다 ㅎㅎ
*덕질용어 난무 주의
베를린 일기 #4 (2018년 6월 21일)
원래 여행을 가도 한 도시에만 머무는 것을 좋아하고 관광지를 일부러 찾아다니는 편도 아니다. 베를린에 가기로 결정하고 하고싶은 것 10가지를 미리 적어봤을 때에도 거기에 관광지는 없었다. 이렇게 내 스타일 대로 하루하루 지내고 있다.
어제는 오전에는 요가를 하고 오후엔 현대미술관에 갔다가(내 스타일이 아니어서 사진이 하나도 없다) 우연히 발견한 근처 중고서점에 잠깐 들러 책을 한 권 샀다. 스페인어로 된 책들도 있냐고 물어 보았고, 점원이 안내해 준 스페인어 코너에서 'Cocina para vagos(게으른 사람들을 위한 요리)'라는 귀여운 책을 한 권 샀다.
계산대에서 점원이 스페인어로 가격을 알려주는 바람에 스페인어로 잠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베를린의 한 중고서점에서 독일인 점원과 한국인 관광객이 스페인어로 대화를 나눈 역사적인(?!) 순간이다. 역사적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서 스페인 식당에서 스페인 축구를 보면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보통 퇴근하고 6시 반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기분상 한 10시쯤 된 거 같은데 막상 시계를 보면 아직 8시도 되지 않아 큰 안도감을 주곤한다. (단, 자발적 술자리가 아닌 경우는 깊은 절망감의 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술자리 시계는 10시를 기점으로 평소보다 2배 속도로 움직이는데...
화요일엔 그랬다. 베를린에서 한 달 정도 지낸 기분인데 고작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늘 눈 떠보니 벌써 목요일이다. 이럴수가?!?! 베를린에서의 시계가 10시를 넘었다. 이제부터는 이 도시에 더 흠뻑 취해야겠다.
베를린 일기 #5 (2018년 6월 22일)
6월의 베를린은 밤 10시에 해가 지고 새벽 4시에 해가 뜬다. 일년 중 베를린을 여행하기 가장 좋은 시기가 딱 지금이다. 하루는 길고 해는 쨍하고 별로 덥지도 않다. (그리고 여긴 공기도 짱 좋다!)
반대로 겨울 베를린은 오후 3시면 해가 진다. 그래서 겨울에 베를린을 여행한 사람은 좋은 기억을 가지고 돌아가진 못 한다고 한다. 역시 여행의 8할은 날씨다. 나 역시 몇 번의 여행으로 얻은 교훈이다.
뉴욕에 두 번 간 적이 있다. 한여름에 한 번, 한겨울에 한 번. 남은 거라곤 진짜 더웠던 기억, 진짜 추웠던 기억, 그래서 실내 공연만 주구장창 보았던 기억, 그래서 어떤 날은 오후에 뮤지컬을 보고 저녁엔 뉴욕필 공연에 가고 이렇게 하루에 두 탕을 뛰며 공연장에서 꾸벅꾸벅 졸던 기억들이다.
하루가 긴 베를린에서 부지런한 여행객이 되고자 어제는 8시에 요즘 베를린에서 젤 핫한 카페에 가서 아침을 먹고, 베를린 동물원엘 다녀왔다. 시내에 그렇게 크고 멋진 동물원이 있어서 인지 베를린 온갖 어린이집에서 다 소풍을 온 것 같았다.
우산 사모으는 걸 좋아하는 나는 동물원 샵에서 발견한 우산을 펴들고 살까 말까를 5분쯤 고민하다, 광화문 한복판에서 이 우산을 들고 출근하는 내 모습이 누군가에게 찍혀 '광화문 기린녀(마침 키도 큰데)'로 SNS에 도배되는 상상을 하고선 조용히 우산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그 우산을 샀어야 했다. 점심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서 기온이 순식간에 푹 떨어졌다. 스타벅스에서 한참 비를 피하다 호텔로 돌아와 옷을 껴입고 당초 계획을 변경, 근처 카페에 가서 핫초코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베를린에서 커피와 맥주가 아닌 다른 음료는 처음 시켜본다.
베를린 일기 #6 (2018년 6월 23일)
베를린에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침대에서 아이폰 메모장에 (어제의) 일기를 쓰고 있는데, 뭔가 굉장히 생산적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기분이다. 호텔 조식을 신청하지 않고 아침마다 근처 카페에서 커피와 빵을 먹는 재미도 솔솔하다.
오전엔 소소한 쇼핑을 했다. 갑작스레 추워진 날씨에 살기위해 기모 후드티를 하나 샀고, 그러다 보니 그것과 어울리는 가방이 필요해 ㅎㅎ 에코백도 하나 샀다. 역시 뭔가를 사면 기분이 참 좋아진다.
'베를린'이란 도시를 한 단어로 정의하라면 나는 주저없이 '디자인'이라 하겠다. '디자인 서울'을 담당하고 있는 서울시 공무원들은 하루라도 빨리 베를린으로 벤치마킹을 와야 한다. 트램은 컬러풀하고, 오렌지색 길거리 쓰레기통에는 저마다 위트있는 멘트가 적혀있다.
심지어 그 흔한 마그넷 조차 정말 감각적이다. 오전에 6개를 샀는데 너무 마음에 들어 오후에 6개를 더 샀다. 이 곳의 색감과 디자인을 기억해 두었다가 다음번 PPT 만들 때 적용시켜 볼 생각이다.
그리고 어제 나를 절망시킨 소식! 불금을 맞아 베를린 코인노래방(Teledisko, 공중전화부스를 코인노래방으로 변신시킨 것)을 찾아 갔는데, 그 거대하고 힙한 클럽 동네에 텔레디스코가 보이질 않았다. 바텐더 같은 친구에게 내 구글맵이 여기 텔레디스코가 있다는데 어디있니? 하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 lT'S GONE, SUPER SORRY.
비록 텔레디스코는 보지 못했지만 베를린은 아기자기한 디자인의 도시임에는 틀림이 없다. 미니 도서관으로 변신한 공중전화부스도 보고, 스티커 사진기에서 사진도 찍었다. (귀여운 표정을 지었지만, 결과는 공포였지만)
베를린 일기 #7 (2018년 6월 24일)
너무 추워서 히터를 틀고 싶은 프라하 중앙역 근처 허름한 호텔에서 쓰는 마지막 베를린 일기다.
베를린에서의 마지막 날,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짐과의 사투를 2시간 쯤 벌이고, 베를린 중앙역에서 프라하행 기차를 탔다. 춥고 비가 오는 날 차창의 경치로 국경을 여행하는 것도 운치가 있다.
한국에서 가져올 때 19kg 였던 짐은 사투를 벌인 후에도 체감상 23kg 는 족히 넘는 것 같은데, 이 무거운 짐을 차마 머리 위 선반에 올려달라고 부탁하기가 미안해서 1등석 1인용 좌석을 2등석 자유석 느낌 나게 다리를 구겨 타고 왔다.
SKT의 데이터 로밍 안내 문자가 독일에서 체코로 국경이 바뀌는 순간을 알려준다. 체코로 넘어가는 순간 데이터가 자주 끊기고 불안정해졌다.
만약 유럽여행 소매치기 에피소드 경연대회가 있다면 3위 안에는 가뿐히 들 수 있는 역대급 에피소드(트라우마)가 있는 나는, 안전한 베를린을 떠나 관광의 도시, 프라하로 가는 게 걱정 투성이다.
도착한 기차역에서 호텔까지는 걸어서 3분 거리. 무사히 호텔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나니 그제서야 긴장이 풀렸다. 편의점에서 맥주랑 안주거리를 사서 숙소에서 월드컵 멕시코전을 봤다. (밤에 야경투어를 갔는데 멕시코 애들이 국기를 휘감고 노래를 부르고 우리를 보고 조롱했다. 이것들이 진짜!)
야경투어를 하다가 똥을 밟았다. 일기를 쓰고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신발을 버릴까 살릴까 판단이 서질 않는다. 이제 친구가 온다. 같이 맥주를 마시고 사진을 찍고 수다를 떨 수 있다. 신발 문제도 친구에게 조언을 구해봐야겠다.
프라하에 도착했는데도 베를린 생각만 난다.
베를린 일기 #번외편 (2018년 6월 28일)
부다페스트로 가는 기차 안에서 오랜만에 다시 쓰는 베를린 일기다. (여전히 이 일기를 '베를린 일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갑자기 떨어진 기온 탓에 동유럽 여행 내내 베를린 기념품 샵에서 산 베를린 후드티를 입고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뭉쳐야뜬다'라는 여행 프로그램을 보고 한 번쯤은 패키지 여행을 해보고 싶단 생각을 했었는데, 지난 2박 3일동안 '유로 자전거나라'의 '체코/오스트리아 레알투어'를 통해 마침내 패키지 여행의 꿈을 실현했다.
특히, 마지막 날에 갔던 오스트리아의 호수마을 그문덴에서의 평화롭던 반나절은 아직도 꿈만 같다. 프라하고 할슈타트고 이제 사람 많은 관광도시는 기가 빨려서 못 다니겠다. 한국사람, 중국사람 잘 모르는 숨어있는 보석같은 곳이 좋다.
인도에서 국제학교 다니는 8살 세현이부터 멋쟁이 50대 사업가 SB님까지 16명의 멤버와 열정 넘치는 가이드, 베테랑 포토그래퍼가 3일간 찰떡 같은 호흡으로 즐거운 여행을 만들어 냈다. 비가 억수처럼 오다가도 우리가 목적지에 도착만 하면 해가 나는 행운도 항상 함께 했다. 이게 다 내가 프라하에서 거하게 똥을 밟은 덕인 것 같다.
부다페스트에서는 좋은 호텔에서 멋진 경치 보고 맛있는 거 먹으면서 이번 여행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이제는 한몸이 되어버린 베를린 후드티도 역시나 함께 한다.
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