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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래울 May 02. 2024

국수 가게

백석, 국수 & 정진규, 옛날 국수 가게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 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 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옆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얀 흰 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녯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녯적 큰마니가

또 그 짚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 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녯적 큰아버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스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백석, 국수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백석'표 풍경에 온 마을이 국수 잔치를 위해 흥성흥성한 분위기에서 꿩사냥을 하고 봄부터 가꿔 온 메밀로 국수를 만들어 사발 그득히 먹는 오래된 전통의 맛이 '반가운 것, 히스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맛으로 기가막히게 표현돼 있는 시다. 곁들여 먹는 쩡한 동치미와 수육과 쩔쩔 끓는 아랫목 등으로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그리움을 가장 지극하게 건드리는 사람이 바로 백석이다. 아름다운 우리말과 옛말을 저다지도 깊고 적확한 곳에 박아 놓아 끝없이 우려내도 한결같은 맛을 내는 장인, 그냥 생각만으로도 아깝고 눈물겨운 시인이다. 1996년에 사망했다고 알려진 노년의 사진에서는 이후 반평생의 이력이 잘 읽히지는 않지만 젊은 시절 그의 사진은 요즘 연예인 여럿을 모아 놓은 듯한 절세미남이다.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 영어강의를 하는 매혹적인 사진을 보면 얼굴천재 언어천재 감성천재인 그와 나타샤들과의 사연 하나하나가 더욱 영화로 다가온다. 아쉬운 대로 꽃무릇 피는 가을에는 길상사라도 다녀올 참이다.


 지금은 교과서에 실리는 국민시인이 됐지만 1988년 해금되기 전에는 정지용시집과 백석 시집을 복사본으로 보며 가슴 뛰던 생각이 난다. 그의 시를 읽는 사람이 엔간해서는 시를 쓸 수 없도록 기를 팍 죽여버리는 시인이다. 그의 시를 읽으면 대번에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시골로' 가서 '굳고 정한 갈매나무'가 되어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옛날같이 늙은' 여승을 보며 '불경처럼 서러워'지고 만다. 그러고는 그 쓸쓸함에 발목까지 다 적시고 나서 '쩔쩔 끓는 아랫목'에서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하게 국수 한사발 그득하게 들이키는 힘을 다시 뭉근하게 받는 것이다.


 숨찬 어머니가 가꾸는 꽃밭 옆 컨테이너가 국숫집처럼 그려졌다. 저런 마당에 저런 공짜 꽃밭, 간판 없는 국수 가게를 나는 좋아한다. 고봉산 너머에 있는 진밭국수 가게와 뇌조리 국숫집이 내가 가끔 가는 옛날 국수 가게이다. 변치 않는 맛과 분위기 그 '고담하고 소박한' 것들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며 어느새 더워지는 여름날의 열무국수를 떠올려본다. 배는 쉬이 꺼지지만 출출한 허기를 채워주던 허연 국숫발이 빼곡히 널린 풍경은 언제보아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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