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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래울 Jun 24. 2024

이게 다 천사 때문이다

윌리엄 블레이크, 굴뚝 청소부 -박선주의 영시읽기 강의 및 번역 중심


굴뚝 청소부(Chimney Sweeper)

                                        윌리엄 블레이크    

 

우리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난 굉장히 어렸어요

그리고 우리 아빠가 나를 팔았어요

아직 내가 너무 어려서 내 혀가 weep!라고 밖에 안 될 때

그래서 여러분들의 굴뚝을 내가 청소하게 되었고 그을음 속에서 자게 되었죠     


탐데이커란 아이가 있었는데

그 양의 뒷목에 난 털같은 하얀 곱슬머리를 깎여 울어서 내가 위로했죠

탐 괜찮아 신경쓰지 마, 머리가 없으면

그을음으로 더럽혀지지도 않을 거 아냐, 아예 그게 나아     


그 말을 듣고 울음을 그치고 바로 그날 밤

탐이 잠이 들어 꿈을 꿨는데 놀라운 광경을 본 거죠

수천 명의 청소부 들이 커다란 검은 색 관에 갇혀있는 꿈을 꿨죠

그 꿈에서 반짝이는 열쇠를 들고 천사가 나타났어요

그리고 그 열쇠로 관을 열고 수천 명의 청소부 애들을 자유롭게 풀어주었죠     

그래서 수천 명의 아이들이 푸른 평야에서 뛰어놀면서 웃으면서 달리고

강물에 몸을 씻고 햇빛에 말렸어요

깨끗하게 하얗게 돼서, 일하러 메고 다니던 무거운 가방을 다 팽개치고

구름 위로 올라가서 바람에 노니는 거예요


천사가 탐에게 말해요, 굿보이가 돼라

그러면 하느님이 너의 아버지가 되실 것이고 기쁨이 부족하지 않을 거야     

그런 꿈을 꾸고 깜깜한 새벽에 일어났어요

가방 메고 브러쉬 들고 일하러 나가는 거예요

아침은 추웠지만 탐은 따뜻하고 행복했어요     

자 그러니 모든 사람이 자기 할 일을 다 한다면 나쁜 일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굴뚝 청소부는 19세기 초 영국이 산업혁명 후 도시지형이 바뀌기 시작하며 슬럼화 되고 공장이 생기고 빈민들이 모여들고 경제력이 좋아지니 난방을 위한 굴뚝이 생겨나며 생긴 직업이다. 소제를 안 하면 폭발하는 굴뚝은 적당히 좁아야 열 손실이 적으니 3-4살, 많아야 6살까지의 아이들이 들어가 청소를 했다. 아이들 몸집이 커지면 끼워 죽는 경우도 발생했으니 고용주 입장에서는 일을 못하게 될까봐 제대로 먹이지도 씻기지도 않았다. 사각 굴뚝의 그을음이 아이들이 보는 세상의 전부였으니 그 아이들은 당연히 오래 살 수 없었다.     

 이 마지막 행의 해결책을 비웃을 만한 것이 이백 년 지난 지금은 나왔는가? 이런 연약한 약자를 착취하는 야만적인 노동현장은 19세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아직도 존재하는 어린이 노동착취의 부조리를 공정무역이나 불매운동으로 없애기에는 턱없이 미약하다. 이 시의 천사처럼 be a good boy라고 말하는 외에 다른 방법이 있는가?

 

 천사가 기껏 풀어내고 놀려주고 말 잘 들으면 하느님이 너의 아버지가 될 거라고 위로하는 꿈속 장면도 아이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신이신 아버지나 엄마가 죽었을 때 나를 버리고 배신하여 나를 팔아넘긴 친아버지는 크게 다르지 않다. 마지막 문장은 고용주 말을 잘 들으라고 화자가 어디선가 주워들은 얘기이고, 천사가 하는 말의 반복일 뿐이다.     

 천사의 빛나는 열쇠는 애초에 가둔 사람이 천사이고 이 상황을 초래한 자라는 것을 암시한다. 왜 천사를 이렇게 묘사할까, 탐의 하얀 머리는 순결한 양과 일치하는 하느님의 이미지이고 머리 하얀 탐에게 있는 신성이 천사에 의해 갇혀서 죽어간다. 그러니까 천사는 아이들을 가두고, 달콤한 말로 유혹하고 세뇌시키고 비참한 상황을 받아들이게 만들고 스스로 죽어가게끔 독려하는 자이다.

 

 브레이크는 시를 이미지화하여 동판화를 제작해 팔았으므로, 당시 이 시를 읽는 사람은 밥깨나 먹는 사람이었다. 1연의 weep는 ‘울다’라는 뜻이어서 발음이 어려운 어린 나이란 뜻 위에 비참한 이미지가 덧입혀진다. 이런 아이들이 이 시를 읽는 중산층 '여러분의 너의 당신의' 굴뚝을 청소하는 것이다. 기부도 자선도 하면서 나름대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중산층 '여러분의 너의 당신의' 그 마음이 바로 ‘천사’라고 찌르는 것이다.      

 이런 부조리한 일은 거대한 악이 아니라 바로 ‘너’ 때문이야, 이들 없이 하루도 지탱이 안 되면서도 평온한 마음으로 돌아와 자위하는 네가 이 아이들을 서서히 죽게 만드는 것이야, 그러니 마지막 행은 내가 하는 말이야, 아무런 이슈 없이 받아들인 말, 그 말을 하는 나는 얼마나 위선적인가,     



 비판의 수위가 근본적이지 않고, 위정자나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비난도 아닌 일상적인 우리 마음, 자족하는 마음, 이 불쌍한 아이들과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외면하는 마음을 푹 찌르고 들어와 나는 깜짝 놀랐다. 결국 ‘너’가 변하지 않으면 이건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아직 비판의식이나 미운 감정이 자라지 않은 어린아이가 원망없이 담담하게 얘기하는게 너무 끔찍하고 슬퍼서 오랫동안 멍해 있었다.

     

 19세기 초반이 배경이라지만 현대적인 의미가 넘치게 적용되는 시, 이야기를 통해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 분노를 일으키는 시, 흔히 하는 사회적 비판뿐 아니라 자신의 맨얼굴을 얼얼하게 대면하게 하는 파워풀한 시였다. 끝내 외면하고 들추고 싶지 않은 포장 속을 뒤집어 날리는 토네이도급 임팩트로 괴로워지게 만드는 시다.


 이 시를 읽으면서 떠오른 톨스토이의 스노비즘에 대해 찾아 보았다. 스노비즘은 허위의식으로 자기에게 있지도 않은 것을 있는 것처럼, 그게 자기인 것처럼 살아가는 후기자본주의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한다. 점잖고 품위있고 편안한 것을 얻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허위의식으로, 상류사회에 대한 선망과 하류 사회에 대한 무관심(경멸)의 두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상류사회 의식에 대한 선망은 판단 정지적이고 무조건적인 순종으로 나타나지만 본인은 그것을 순종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찾아간다고 본다. '난 참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자기 보호 전략으로 죄 안짓고 부끄러운 짓 안하고 심성도 악랄하지 않아 외려 칭찬받는, 잘난척 안 하고 품성 좋아 어리석은 짓도 안 하는 그런 사람들이 속물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사는 것만도 얼마인가? 세상이 마구잡이로 험하게 굴러갈 때는 이런 교양인의 허위의식이라도 장착하는 것이 미덕이다 싶지만 톨스토이는 죄 안 짓는다고 죄가 없는 게 아니라 선한 행동 안하면 죄라고 야유했다는 것이다.

 봉사 자선 선행 착함 같은 것 때문에 당연스럽게 드러나야 할 문제들이 안 드러나고, 살 만하지 않은 세상이 그 사람들을 통해 세상은 살 만한 것으로 바뀌게 되어 그런 사람들의 기능을 이 사회가 알게 모르게 '기능화'하여 이용한다는 점에서 톨스토이는 사회악의 뿌리로까지 간주하고 있다.

 

 경멸 역시 대단히 교양적이어서 하류계급 사람이 법률적 문제를 가져오면 잘해주지만 일 끝나면 두번 다시 보지 않고 차갑게 경멸하는 이 직업모랄은 자기 정당화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이반일리치의 죽음>에서 이반의 행동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 사회 현실에서 이 이상을 기대할 수 있을까, 대놓고 무시하지만 않아도 양반이다.


 어느 영상에서 이효리가 의자 밑을 열심히 고치며 마무리하는 이상순에게 "오빠 대충해, 누가 거기까기 본다고?" 하니까 "내가 알잖아"하던 장면이 오래 마음 속에서 재생되었다. '내가 알잖아...'

 나이가 드니 남들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내가 나를 속이지 않는 게 너무 중요해진다. 나와 잘 지내야만 할 시간이 얼마 남았는지 모르는데 연극으로 생을 마칠 순 없다는 생각이다.

  

 굴뚝 청소부 같은 이렇게 첨예한 현실문제의 대면에서도 자기를 기만하는 허위 의식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신이다. 끝내 세상에 들춰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기에게 하는 거짓말로 내 삶의 어디가 텅 비고 헛돌아갔는 지를 자신은 감지한다. 관습적으로 습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말들로 포장하거나 너절한 내 모습을 나에게 둘러대며 설득하지 말자고 이 시에 강력한 거 한 방 맞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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