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r Braun May 06. 2024

낭만에 대하여

학고재 갤러리 & (영화) Midnight in Paris

 지난주의 일이다. 남에게 큰 관심 없는 캐릭터를 가진 내가 선뜻 무언가를 먼저 하겠다고 나선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선무당이 사람을 잡지만 초심자로서의 선무당의 열정은 대단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전문가는 선무당의 시절을 어찌 됐든 거치지 않을까? 처음부터 잘하면 그건 무당이 아니라 신이겠지.

 부끄러움에 사설이 길어져 간다. 팀원을 대상으로 기초 와인 테이스팅 코스를 진행했다. 아이디어를 내는 것까지의 부끄러움을 지나면 그다음부터는 현실이다. 테이스팅 리스트를 만들고 구매하고 들려줄 이야기를 정리하다 보면 꽤 일이 많아진다. 이번에 행사를 진행하면서 아주 많은 것들을 느꼈지만 그중에 가장 큰 하나는 나의 '로망'에 대해서는 타협이 없다는 사실이다. 내 직업을 내 것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자는 아무리 큰 일을 맡고 있어도 타협이 쉽다. 내 것이 아닌 것에 대한 타협은 옆집 불구경과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그런데 이게 나의 일이라고 느껴지는 순간 집 앞 우체통의 기울어진 1도의 기울어짐마저 신경 쓰이게 된다. 1도를 바로잡는 일은 체력소모가 많은 일이지만 무엇보다 나 자신이 꽉 차게 된다. 이로서 최초의 '로망'이 실현되었다.



 테이스팅 진행 중 재밌는 이야기가 오간다. 한 동료가 '낭만'이라는 단어를 끄집어냈다. 그 뒤로 이런저런 문장이 들린다. '낭만이라는 말은 로맨스에서 나왔을걸? 아마 일본식 표기일 텐데..', '우리 업종에서의 낭만이 있었는데 말이지..' 등등 이야기가 확장된다. 이날의 나는 진행자로서 최선을 다했다. 따라서 참가자들이 이 자리를 즐기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어서 대화에 참여하지 않았다. 업무 이야기로 번지는 것만을 경계하고 잠자코 들으며 '낭만'이라는 게 대체 뭘까?라는 생각을 시작했다. 애초에 처음 '낭만'을 꺼낸 그 동료의 의도대로 대화가 진행되는 건 맞을까? 라며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한 번은 글로 써볼 만한 주제가 아닐까 남겨두었다.



 '낭만'을 검색해 보면 나오는 것들이 가히 신박하다. 가장 좋아하는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가 등장한다. 낭만주의의 일본식 번역을 위해 浪漫(낭만)을 나쓰메 소세키가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실제 일본어 발음은 '로망'인데 한자어가 한국에 사용되면서 '낭만'이 되었다고 한다. 재밌는 것은 '로맨스', '낭만', '로망'이 각기 미묘한 차이를 가지고 사용된다는 점이다.

 이 글에 사용했던 '로망'은 내가 하고자 하는데 못했던 것들에 해당된다. 이 단어도 뒤로 꽤 복잡한 스토리가 있다는 심층기사가 있다. 그렇게 좋은 배경으로 쓰인 것 같지는 않지만 우선 '로망'은 꿈과 비슷한 단어로 쓰인다. 그리고 두 번째의 '낭만'은 우리가 아는 '낭만' 그대로이다. 그런데 이것은 로맨스와는 조금 다르다. 이루어지지 않는 것, 혹은 과거의 것에 대한 향수, 현실에 메어있지 않은 것 등으로 사용된다. 핵심은 현실과는 조금 동떨어진 이상적인 것을 이야기할 때 '낭만'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마지막으로는 '로맨스'이다. 이것의 실제 생활에서 쓰임새는 더 적다. 어느 사람이 본인의 사랑이야기를 1인칭 시점에서 '괜찮은 로맨스'였다라고 평가한다면 손발이 무색해질 것 같다. 3인칭 시점에서 객관적인 상황을 표현할 때 보통 '로맨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영화나 문화콘텐츠 홍보 외의 쓰임으로는 사용성이 저조한 것 같다.

 이렇게 비교해보고 나니 아마도 '로맨스'를  제외하고 낭만과 로망이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점에서 이야기할 만한 주제가 될 것 같다.



 나에게 낭만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으로 상상을 해본다.

 

1. 비 오는 날 한옥(어디든 괜찮지만 내 집이어야 한다)에서 중정을 바라보며 재즈를 들으며 커피를 마신다.

2. 해가 밝은 날 도쿄 지유가오카 구혼부츠료쿠도 거리에서 Henri Vieuxtemps의 Capriccio를 비올라로 연주한다.

3. 아라리오 뮤지엄 공간 사옥 지하층을 빌려 네비올로 특집 와인 테이스팅을 한다.

4. 북촌로 5나 길에 있는 경복궁 방향의 아무 집이나 개조해서 바를 열고 해가 질 무렵쯤 Django Reinhardt의 Nuages의 바이올린을 맡아서 밴드에서 연주하며 중간에 막걸리를 마신다.

 

 4개쯤 쓰다 보니 나 자신이 조금 낯설어진다. 이렇게 구체적인 낭만에 대한 그림을 그려왔다고? 낭만인지 로망인지 몰라도 상당히 비현실적이고 내밀하다. 일단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것들이 많다. 비올라를 약간 배운 적 있지만 어려운 곡을 멋지게 완곡할 능력은 없다. 바이올린은 잡아 본 적도 없다. 중정이 있는 한옥은 가격이 얼마나 할까? 아라리오 뮤지엄 사옥의 지하를 개인에게 빌려줄까?

 다시 곱씹어 봐도 불가능한 문장의 향연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서글퍼진다. 한번 사는 인생인데 저걸 진짜 못해보고 죽는 것일까? 정말 안 되는 걸까? 그렇게 낭만만 쌓아두면서 경험해보지도 않은 과거를 회상하게 되는 걸까?



 낭만이라는 주제를 고민하다 보니 두 가지 경험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1.  'Midnight in Paris' 다시 보기 (n번째인데.. 벌써 7번째인가?)

 2. 갤러리 중에 '옛것을 배우는'의미를 담은, 그리고 한옥으로 되어있는 학고재(學古齋) 갤러리 방문하기


 둘 다 서사의 흐름에서 과거의 것에 힘을 주고 있는 생각의 결과물들이다. 학고재는 처음 방문했고 영화는 N번째 시청이지만 서로 많이 닮아있었다. 과거에 대한 향수 혹은 존경심을 가지고 현재를 이야기하는 이야기 방식이 그랬다. 낭만이라는 주제에서 '과거'는 핵심 키워드다. 낭만은 현실에 없는 것을 그리고 있어서 미래를 떠올리게 하지만 현실에 없는 것은 개인의 경험에 기초하기 때문에 과거다. 나라는 사람이 살아오면서 쌓인 서사 위에서 꼭 해보고 싶었던 것들이 여러 가지가 겹쳐지면서 하나의 낭만을 만들어낸다. 결국 그 낭만 안에서 살고 싶지만 현실에 발을 디뎌야 하는 한계를 알기 때문에 낭만은 더 값비싸진다.


 


 낭만을 뒤로하고 일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일을 하다 보면 자주 하는 생각이 있다.

 ‘내가 받는 월급은 무엇에 대한 대가일까? 시간?'

 직장인 답지 않은 생각일 수 있다. 직장인은 일하고 일한 시간만큼 월급을 받아가는 존재이다. 그런데 이 '일'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점점 더 커리어가 쌓여갈수록 생각이 깊어진다.

 첫 직장 생활에서의 일은 무언가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흔히 운영이라고 부르는데 그곳에 시스템이 있고 그 시스템에 맞춰서 무언가를 작성한다. 어떤 가치를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시작과 끝이 존재하기 때문에 일을 완성했다는 개념에서 마감의 감각이 존재했다. 시간의 흐름과 월급이 일치했기 때문에 어색함은 적었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 영업을 해보니 감각이 달랐다. 영업은 시간의 투자가 무색할 때가 많다. 그러다 보니 내 시간이 무슨 의미일까?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 게다가 내가 영업했던 상품(서비스)은 세상에 어떤 가치를 주는지 몰랐다.

 지금은 기획을 한다. 프로덕트를 기획하는 일인데 크게는 서비스를 기획한다. 점점 시간과 멀어진다. 서비스를 기획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과 일치하지 않는다. 물론 좋은 기획은 많은 시간이 전제된다고 하지만 그때의 시간은 타협이 없는 시간이다. 완전히 집중한 것에 대한 시간을 가치로 환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악이든 최선이든 기획에서의 시간과 월급은 격차가 존재하게 된다. 게다가 기획한 서비스가 생각했던 것만큼 물질적 성공을 보장하지 않을 수 있다. 아니, 보장하지 않는다. 실패하는 서비스가 더 많기 때문에 확률적으로는 그 시간도 무의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날 어떻게 정의해야 나와 나의 시간에 대한 보수를 화해시킬 수 있을까?



  일이라는 주제에 뒤로 미뤄뒀던 낭만을 다시 앞으로 세워본다. 세상에 가치 있는 일은 뻔할 수도 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성공하는 서비스의 공통점은 결국 사람들이 원한다는 점에 있다. 뾰족한 핵심은 없지만 실생활에 정말 필요한 서비스도 성공하고 어떤 한 집단의 꿈을 이루어주는 서비스도 성공한다. 결국 어떻게든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대한 답변을 서비스를 돌려보내는 것이 서비스를 기획하는 사람의 일이 된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낭만은 닮아있다. 원하는 것이 모든 것이 낭만은 아니지만 그중에는 낭만도 많이 존재한다. 혹은 다른 사람의 낭만이 생기는 것에도 내 서비스가 도움을 줄 수 있다. 어찌 되었든 사람이 행복해진다는 것은 인간의 큰 가치에 틀림없다.

 이런 방식으로 내가 가진 낭만 그리고 다른 사람이 가진 낭만을 모두 모아서 이 현실의 땅에서 잠깐이라도 발을 떼고 쉬게 해 줄 수 있는 서비스를 내보낼 수 있다면 나의 시간에 대해서도 정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진다.



 길고도 긴 글이 되었지만 결론은 나와 내 직업에 대한 화해인 것 같다. 최근 3년간 내가 내 직업과 친해질 수 없었던 것은 내가 이 직업을 바라보는 낭만이 없어서였다. 큼직한 덩어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 무시하고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아주 작은 덩어리를 기획하며 타협 없이 굴던 나를 보다 보니 어딘가 어색했다. 거기다 우연히 '낭만'이라는 키워드를 이끌어내 준 동료 덕에 결국 내 시간의 가치와 화해를 해보기 시작한다.

 '낭만'은 비현실에 가깝기 때문에 내 시간의 가치를 투자하는 한 고달플 것 같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고 그 방향이 맞다는 것을 여러 방면에서 증명하고 설득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낭만'에 시도했다는 방향성 만은 확실히 해서 현실을 살게 되면 과거의 낭만에 대해 우는 소리를 하는 일은 없어진다.

 낭만에 대하여의 가사에 실린 '실연의 달콤함' 같은 과거에 집중된 낭만은 조금 더 예술에 맡겨두고 현실이 되는 낭만을 쫓는 서비스를 기획해야 한다. 작게나마 세상을 바꿔보고 싶은 낭만이 있다.



(참고로 이상하게 버킷리스트를 만들고 싶어져서 20개 가량 채워넣었다.)

작가의 이전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