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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zy Cow Society Jun 09. 2024

이탈리아 두 거장이 여름으로 부른 시절

루카 구아다니노와 파올로 소렌티노의 여름

여름을 사랑한다. 우기에 가까운 장마는 끝이 막연한 겨울의 새벽만큼이나 나를 침잠시키지만 결국 알베르 카뮈 [이방인]에 담긴 작열하는 태양으로 기억된다. 절로 찡그려지는 미간, 따가운 살갗. 죽일 듯이 나를 노려보는 햇볕 아래에선 아무리 도망쳐도 벗어날 수 없고 실내의 어디론가 숨는 일이 최선이다. 그러다 슬그머니 햇볕 한가운데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이유는 여름의 감각에 중독되어서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여름이 아닌 대부분의 시간 동안 여름을 기다리고 여름의 한복판에선 여름이 지나갈까 두려워하며 일년을 보낸다. 여름은 파올로 소렌티노와 루카 구아다니노의 영화에서 어쩌면 인물보다 더 주인공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리고 두 감독이 모두 이탈리아 출신이라는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눈부신 광량과 바다가 함께 떠오르는 두 감독의 영화는 다른 방식으로 여름을 차용한다. 파올로 소렌티노에게 여름이란 돌아오지 않는 과거이자 순수고, 루카 구아다니노에게 여름이란 폭발하는 현재의 욕망이자 정체성이다.

파올로 소렌티노는 <그레이트 뷰티>, <그때 그들>에서처럼 화려함과 천박함이 공존하는 파티 장면 연출에 독보적인 감독인데, 영화에서 가장 시각적으로 즐거운 이 순간 역시 뜨거운 여름을 닮았지만 그가 궁극적으로 여름이라 명명하길 허락하는 순간은 이를테면 <그레이트 뷰티>에서 죽음을 향해가는 젭이 소환한 첫사랑의 시절, 여름 바다에 뛰어든 젊은 남녀의 눈맞춤이랄지 감독의 자전적 영화 <신의 손>에서 어른이 되어야 할 파비에토가 소년으로 남을 수 있었던 나폴리에서의 마지막 시절이랄지 이미 청춘을 오래 지나버린 자가 반추하는 과거의 청춘이다. <아버지를 위한 노래>는 죽음을 앞둔 아버지를 30년 만에 찾아간 뒤 과거의 진실을 추적해보는 뮤지션의 이야기이고, <유스>는 정상에 오른 두 노년의 예술가가 삶의 의미를 예술과 함께 곱씹는 이야기이다. 그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늙었다. 기대되는 미래보다 그리운 과거가 많고, 지루한 현재를 뜨거운 여름의 파티로 채워보지만 늙어버린 주인공처럼 닳고 닳은 화려함은 이탈리아의 바다와 햇볕 외엔 아무것도 없었던 청춘의 여름보다 아름답지 않다. 그의 여름은 냉소적이거나 쓸쓸하다. 재차 진정한 아름다움을 묻고, 어설프지만 가공되지 않은 여름의 순수로 회답한다.

루카 구아다니노는 파올로 소렌티노보다 집요하게 여름을 포착한다. <서스페리아>를 제외한 모든 영화가(국내 개봉작 기준) 여름의 이야기라는 사실. 태양이 한도 없이 타오르는 계절, 사회적으로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욕망을 가진 인물들이 그의 영화 안에 모인다. 욕망의 근원은 결핍이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타인의 기준에 맞추느라 외면했던 내면의 소리에 가깝다. 인물들은 갈등한다. 지금처럼 보편적인 한 사람으로서 살아갈지, 자신마저 속이는 일을 그만둘지. 욕망을 해방시킴으로써 그들은 자신을 되찾을 것이고, 타인에겐 영원한 이방인이 될 것이다. 사실상 선택의 문제가 아닌 숙명이다. 이상적인 아내, 엄마 역할에 충실한 엠마가 모든 옷을 벗어던지고 사랑을 향해 뛰쳐나가는 <아이 엠 러브>, 여름 휴가동안 찾아온 강렬한 첫사랑과 첫 상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식인을 하는 ‘이터’로 살아가야하는 매런과 리의 <본즈 앤 올>은 직접적으로 이방인으로서의 나를 선언하는 영화다. 성적 긴장감과 충동 또한 그의 영화 전반에 흐르는 주요한 감정선인데 얽히고 섥힌 4명의 남녀가 욕망과 질투로 인해 파국을 향해가는 <비거 스플래쉬>, 테니스로 연결된 기이한 삼각관계 <챌린저스>에서 한여름 헐거운 옷차림의 수영장, 땀과 에너지가 폭발하는 스포츠로 육감적 에너지를 폭발시킨다. 그의 영화에선 도덕적 판단보다는 본질 자체가 우선되며, 욕망을 통해 내면의 실체를 발견하는 인물들은 추악함까지도 정체성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일종의 성장영화와 같은 플롯을 지난다. 파올로 소렌티노의 영화에서 청춘이란 젊음의 몫이지만, 루카 구아다니노는 정체성의 발견 시점을 기준으로  청춘을 부여한다. 혼돈과 불안마저도 그 과정에 기꺼이 포함시킨다. 차가운 독일의 겨울이 배경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필모그래피 중 독특한 위치에 있는 <서스페리아>조차 햇빛이 비친 벽의 클로즈업으로 마지막 씬을 채운다는 점에서 그의 남다른 여름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번외로 이탈리아의 여름 하면 영화 <태양은 가득히>와 <리플리>를 빼놓을 수 없다. 사랑과 질투와 분노와 살인, 열망에 기인한 모든 감정에 대한 영화다. 햇빛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사건은 벌어진다. 때때로 나는 쨍한 햇빛 밑에서 시야도 소리도 모두 아득해지곤 했다. 정신이 몸을 잠시 떠나는 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대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방인]의 뫼르소는 법정에 서서 살인의 이유로 ‘햇빛이 눈부셔서’라고 답한다. 종종 자동차 엑셀러레이터나 스피커 음량의 계기판이 끝까지 닿는 상상을 해본다. 여름은 도시 한복판에서 스피커가 찢어질 듯 최고 음량으로 노래를 틀도록 부추기고는 이로 인해 벌어진 어떠한 결과에도 책임 없이 방관할 것 같다는 점에서 신화적 존재같기도 하다. 넘쳐난 모든 감정과 행동을 삼켜버릴 것만 같다. 바야흐로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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