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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zy Cow Society Oct 28. 2024

아메온나를 아시나요

아메온나. 일본의 비를 부르는 요괴를 뜻하는데요, 어딘가 이동할 때마다 비가 오는 여성을 일컫기도 합니다. 네, 지금까지 자기소개였습니다. 어릴 땐 강의 신인 하백의 딸이라고 불렸어요. 가뜩이나 외출이 두려운 저는 본격적인 장마가 오기 전에 부산 기장의 문동마을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달력을 2주 전부터 여러 차례 확인했고 약간 흐리긴 했지만 비소식이 사라진 터라 안도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장마는 제가 문동마을을 다녀온 다음 주로 예고되어 있었죠. 올 초 온라인에 돌던 어느 올해의 운세에서 날씨운을 뽑았던 일에 대해 생각하기도 했어요. 한 해를 통틀어 점지 받은 운세가 날씨운이라니요. 친구들이 올해 무얼 해도 원하는대로 다 이루어진다는 등 만사형통 류의 길운을 뽑을 때 저는 어딜가도 날씨가 좋을 것이라는 다소 소박한, 하지만 어쩌면 저에게 현실적으로 필요했을 운세를 예고 받았습니다. 제 절박한 기대를 비웃듯 햇볕이 지나치게 타오르던 한 주의 주말 아침이 되자 제 핸드폰엔 호우예비특보 발령 안내 문자가 4통이나 와있었어요. 문자만큼 폭우가 쏟아지지는 않는다는 점을 정상참작 삼아 ‘이만하면 럭키휴리잖아~’를 되뇌이며 문동마을로 출발했습니다.

부산에서도 가장 동쪽에 위치한 기장은 부산에 사는 동안 제 의지로 간 적 없는 동네였어요.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멀었거든요. 생각보다 뚜벅이도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어서 놀랐습니다. 부산역 인근인 부전역에서 울산 태화강역까지 연결된 동해선을 타면 됩니다. 낯설다는 이유로 멀리했지만 실제론 가까이에 꽤 많은 것들이 있었겠죠? 마음을 닫아서 놓쳐버린 것들이 얼마나 될까 새삼 궁금했습니다. 저는 센텀역에서 좌천역까지 7정거장만 이동하면 됐어요. 26분 밖에 걸리지 않더라고요. 문제는 배차간격이 20~30분이니 미리 시간을 맞춰 가세요. 저도 알고 싶진 않았답니다. 마침 막 열차가 지나간 터라 한산한 스크린도어 앞 의자에 앉아 기다렸어요. 지하철도 최단거리를 찾아 출구 앞 승강장에서 내리곤 하는 효율 추구형 인간에게 무용한 시간은 휴일에 할 수 있는 최고의 사치라 설렜습니다. 예를 들어 3박 4일 정도의 시간이 생긴다면 평소 가보지 못했던 여행지나 전시, 영화 등 투두리스트를 지우려 노력할 거예요. 분명 휴가 마지막 날엔 지운 리스트보다 남은 리스트가 더 많겠죠. 제가 바라는 휴가는 리스트를 다 지운 다음에도 시간이 남아 비효율적이고 게으르게 하루를 채우는 거예요. 회사에서도 30분 단위의 스케쥴러에 맞춰 일하거든요. 늘 쫓기는 기분으로 살아온 시간 감각이 문동마을에 가는 동안 누그러지고 있었습니다. 정주행 중인 웹툰을 읽다보니 어느새 좌천역이에요.

역사에서 나오자 길바닥에 고인 웅덩이 위로 빗방울의 파장이 꽤 커져 한눈에 봐도 비의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의 첫 목적지는 좌천역에서 마을버스로 3정거장인 문동 방파제였어요. 마을버스를 좋아합니다. 일반 버스는 출퇴근의 산물 같아 보기만 해도 피로함이 몰려오는 데 반해 마을버스는 저를 동네 구석구석을 탐방하는 소심한 모험가로 만들어주거든요. 약 10분 후 도착 예정인 버스를 기다리며 가만히 두리번거렸어요. 낮은 건물과 그보다 조금 높은 산자락 위로 가득한 해무. 부산 사람들도 알까요? 다른 도시에서 볼 수 없는, 해무가 가장 부산다운 풍경이라는 걸. 저 역시도 부산은 바다의 도시라고 생각하지만 못지 않게 산의 도시이기도 하다는 걸 비 내리는 부산에서 깨닫게 됩니다. 3정거장 전, 2정거장 전, 1정거장 전, 곧 도착으로 변하는 어플 속 버스의 위치를 확인하던 저의 건너편 도로로 기다리던 기장군3번 버스가 지나가버렸습니다. 위치를 제가 헷갈린 거예요. 다음 버스는 37분 후에 온대요. 그거 아세요? 사실 저는 택시를 제일 좋아해요.

참, 이쯤에서 이번 기고에 요청받은 글 주제를 말씀 드려야겠네요. 빛을 따라 가는 문동이었어요. 비가 우산을 때리는 소리가 은은한 솨에서 둔탁한 타다닥으로 바뀌었고 경로를 바꾸어 문동저수지까지 약 30분 정도 걸어가는 동안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자주 멈추지 않는 생각에 빠지고, 특히 부정적 상상력으론 탁월한 재능을 가진 저는 간절히 빛이 필요할 때마다 큰 맘먹고 떠난 여행에서 비가 왔던 날들을 떠올렸습니다. 퇴사 후 일주일 간 떠났던 제주도에서 폭우가 내리는 와중 홀로 흙탕물이 된 바다에서 스노클링을 오기로 했던 21년 여름, 터벅터벅 아무도 없는 풀 무성한 마을길을 반쯤 취해서 걸었던 기억을요. 마음이 번잡해서 동해 삼화사로 2박 3일 명상 템플 스테이를 갔던 23년 가을, 역시나 떠나는 날에서야 해가 떠서 일출도 구름에 가려 보지 못했던 기억도요. 새로 산 니삭스에 샌들로 기분을 낸 저의 발에서는 물이 차 찰박찰박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고개를 들어 옆을 바라보니 익숙한 색상의 바다가 보였어요. 소설 [탱크]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늘 그렇듯 최악의 시나리오는 애쓰지 않아도 술술 풀린다. 어떤 개연성이나 인과도 없이 그럴듯한 장면을 선사하고 믿게 한다. 반면 낙관적인 상상은 어딘가 엉성하다.’ 산발적 우연이 필연이 되어 마음을 괴롭히던 우중산책을 하며 내가 계속 찾고 싶었던 빛은 어디에 있는지 슬퍼졌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연락주신 담당자 님께 이런 글을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정신을 붙들고 바다에서 눈을 돌려 좁은 골목과 낡은 빈집을 카메라로 담기 시작했어요. 일상과는 다른 이색적인 풍경을 담아보려 했던 거겠죠. 문득 타지를 대상화하는 저에 대해서 돌아봤습니다. 철저하게 나의 일상과 분리하여 다른 이미지를 채취하는 행위들. 관광이 아닌 여행을 좋아한다 하면서도 제가 바랐던 건 판타지가 아닐까 싶었어요. <매트릭스>처럼 현실은 판타지보다 잔인하니까요. 고유의 삶이 있는 문동마을에 저를 위한 판타지를 덧붙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동마을과 맞닿아 있는 임랑 초입엔 박태준기념관이 있어요. 저는 빛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림자도요. 공간은 빛을 위해 어둠을 품고 있었어요. 저는 살면서 그림자를 받아들이는 일이 참 힘들었습니다. 그림자 없는 인생엔 빛도 영영 없겠죠? 문동마을의 바다를 따라 걷다 보니 다시 설렜어요. 아나고 거리가 나왔거든요. 차가운 맥주와 아나고와 제피가루를 팍팍 친 매운탕과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사라진 잿빛 오션뷰의 자리를 준비해주신 사장님의 마음이 그날 제 풍경 안에서 반짝였습니다. 참고로 이 날 하루를 마무리할 때까지 받은 안전문자는 총 9통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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