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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프생 1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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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투안 Jul 01. 2023

포트폴리오가 뭔데요? 프랑스 미대 입시 준비의 기록

프생 1막 6장

어학원을 다니면서도 마음 한 편에 항상 더 큰 숙제가 남아있었다. 바로 미대 입시 포트폴리오였다. 어학이야 정해진 커리큘럼에 따라 성실히 수업을 듣고, 한 단계 한 단계 넘어가면 될 일이지만, 포트폴리오는 정해진 가이드라인이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미대 입시를 앞두고 불어를 배우던 다른 한국인 학생들은 이미 한국에서 미술을 했거나, 혹은 홍대 근처에 있다는 프랑스 미대 전문 입시 학원을 다니며 포트폴리오 가방을 두둑하게 채워서 온 상황이었다. 총알을 넉넉히 장전하고 전장으로 떠날 채비를 하는 그들과 달리, 제대를 한 지 갓 세 달 만에 프랑스로 훌쩍 떠나온 나로서는 그런 '총알' 준비 학원이 있는 지도 몰랐다.


아무개: "도시에(dossier)는 어떻게 준비하셨어요?"

앙투안: "도시에가 뭔데요?"

아무개: "⋯."


모두가 처음인 한국인들끼리 통성명을 하고 각자의 계획을 공유하던 어느 날, 나의 상황을 엿들은 다른 미대 입시생이 황당하다는듯 내보이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도시에(dossier)는 포트폴리오와 입시에 필요한 서류들을 아우르는, 그러니까 미술 대학에 떡하니 내놓고 나 이런 사람이올시다, 나를 받아주시오!라고 보여줄 수 있는 '내 파일의 총체'와 같은 의미였다. 입시 미술 짬밥이 좀 되어 보이던 그가 '도시에'라 일컬었던 건, 그중에서 제일 중요한 나의 작업 모음, 즉 포트폴리오를 말하는 것이었다. 도시에의 '도'자도 모르고, 포트폴리오의 '포'자도 모르는 일자무식 나를 두고,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어이가 없다는 그의 속내가 표정으로 그대로 드러났다. 


지도 똑같은 입시생 주제에 어디서 평가질이야! 큰소리치고 싶었지만 사실 그의 생각이 맞았다. 나는 입시 미술의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고 내 '작업'이라고 부를 만한 것 하나 없이 빈손으로 터덜터덜 프랑스에 도착한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기분이 나빴지만 누굴 탓하랴.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마치 앞에 다가올 전장의 환난을 모른 채 나 왔쪄욤 뿌잉! 다 덤벼, 이얍! 이러고 내달린 젖내나는 신병의 형국이었다.


그렇다고 총알을 가지러 한국으로 돌아갈 상황이 아니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여기서 닦아야 했다. 그러나 전혀 감이 안 잡혔기 때문에 누군가의 조언이 절실했는데 그렇다고 그 입시생에게 부탁을 하는 건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나의 사정을 들은 누군가가, 같은 도시의 미대에 다니고 있는 한국인 유학생이 있다고 일러주었다. 몇 다리 건너 그의 번호를 알려준다고 했다.




그래서 포트폴리오가 뭔데요?


전해 받은 번호의 주인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그가 산다는 주소를 찾아갔다. 내가 살던 기숙사보다 훨씬 시내의 중심에 위치한 작은 아파트였는데 유학생이 사는 집이라 아주 작은 원룸이었다. 대낮인데도 커튼을 치고 낮은 조도의 조명을 켜둔 집이었다. 방의 한 쪽에는 싱글 침대 하나, 다른 쪽에 작은 싱크대가 위치하고 그 외의 대부분의 공간을 겹겹이 세워진 큰 캔버스들과 테이블 하나, 캔버스를 얹는 이젤과 작은 의자 하나가 차지하고 있었다. 집에서도 그림 작업을 하는 모양이었다. 


모르는 사람과 마주했지만, 도움이 필요했던 나는 나의 상황을 감출 필요가 없었다. 이래저래 해서 미대를 다니고 싶어서 프랑스에 와서 어학을 하고 있는데, 작업이 하나도 없어요. 조언 좀 해주세요. 포트폴리오는 어떻게 만드는 건가요? 질문을 막 쏟아냈다.


"작업으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가요?"


그가 나에게 되물었다. 그렇다. 그림이든 사진이든, 또 다른 매체든, 그것은 단지 그릇일 뿐이고 그 안에 어떤 내용물을 담을지가 더 중요했다. 그러나 살면서 골똘히 생각해 보지 않은 질문이었다. 꾸며내서 잘 보일 이유도 없었으니, 아직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답했다. 


"그럼 표현 방식으로서 어떤 도구가 가장 익숙하고 편한가요? 그림? 사진? 그림 그려본 적 있나요?"


세상에 태어나서 그림 안 그려본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그의 질문은 '작업으로서 그림'을 그려보았냐는 질문이었다. 그림은 아니지만 취미로 필름 사진을 찍어 봤지만 '작업'으로서 어떤 특정 주제를 다룬 것은 아니라고 답했다. 이런 문답들이 이십여 분간 오갔지만, 여전히 '포트폴리오'는 나에게 짙은 안갯속에 실루엣조차도 흐려 보이는 대상처럼 가물거렸다. 일방적으로 조언을 구하는 입장이라 그의 시간을 많이 빼앗고 싶지는 않았고, 그도 대화를 마무리하려는 눈치였다. 


"뭐든지 다 표현해 보세요. 그게 그림이고 사진이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최대한 많이, 다양하게 보여주는 게 중요해요."


내 처지에 대한 그의 진단과 처방이었다. 그는 포트폴리오 준비는 자신이 도움을 줄 수도 있다고, '과외'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도 그런 의도를 넌지시 내비쳤지만 절약, 절약, 절약 삼창을 외치며 살던 유학 초기의 나로서는 네, 나중에 연락을 드릴게요라고 답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그 집을 나서면서 음료 같은 것으로라도 보답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지만 다음에 올 때 가져다드려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후로 다시 뵌 적도 없고, 마음의 빚은 당장 갚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엔 당시 나는 너무 어렸다. 그렇게 배은망덕의 흑역사 하나를 추가한 것이다. 그의 조언이 없었다면 그 후로 나는 또 얼마나 많은 길을 헤매었을까. (번호도, 이름도, 얼굴도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진 나의 의인, 어디서든 행복하게 잘 살고 계시기를.)




일단 뭐든지 다 표현해 보자


프랑스 미대 입시 선배의 과외 제안을 슬쩍 피했던 것은, 그 비용조차 아껴보려는 구두쇠 마인드가 바탕이긴 했지만, 뭔지 모를 자신감도 생겼기 때문이다.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왠지 혼자서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뭐든 자유롭게, 다양한 방식으로 다 표현을 해보라는 그의 조언이 나에게는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가이드라인이 되었다. 


한국에서의 짧은 대학시절, 필수로 들어야 했던 강의 중에 '교양 국문학' 수업이 있었다. 어느 날, 교수님이 3분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단어를 생각나는 대로 다 적어보라고 했다. 아마도 '자유롭게 생각하기' 이런 목적의 수업이었을 것이다. 맥락이나 주제 상관없이 시시각각 떠오르는 단어들을 연달아 적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3분이 지난 후, 가장 많은 단어를 적은 학생을 오름차순으로 추려내자 마지막에는 내가 남았다. 아흔 개 남짓 적었던 것 같다. 야한 단어까지도 빠뜨리지 않고 모조리 적었던 터라, 교수님이 그 단어들을 하나씩 읽어보라고 했을 때에는 좀 민망스러웠지만 뭔가 기분이 좋았다. 그 많은 사람들 중 내가 '자유롭게 생각하기' 1등이라니. 상대평가 교육의 폐해긴 했지만, 어쨌든 묘한 성취감이 따라붙는 기억으로 남았다.


문득 그 기억이 떠올랐다. '자유롭게 생각하기'에 자신이 있으니, 그렇게 생각한 것들을 '자유롭게 표현하'면 되지 않을까 이런 단순한 결론에 다다랐다. 어학원에서의 마지막 학기는 온전히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데에만 집중했다. 선생님께 미리 양해를 구해 어학원에 나가지 않고, 기숙사 방에만 틀어박혀 작업을 했다. 천 파는 가게에서 검은 천을 두 마 정도 떼어다가 창문을 가려서 밤처럼 어둡게 만들었다. 침대를 책상 밑으로 밀어 넣어 작업할 공간을 만들었다. 2.7평짜리 작은방은 생활 공간이자 작업실이 되었다.


일단 화방에 들러 큰 종이 묶음과 스케치북, 아크릴 물감, 연필 등을 사 왔다. 뭘 그려야 할지 몰라서 일단 연습 삼아 잡지에 나온 사람들 얼굴을 따라 그렸다. 키우던 화초를 모델 삼아 정물화도 그렸다. 어차피 입시에서는 완성도보다 작업을 만들어 간 과정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해서, 스케치북 두 권을 그런 연습용 그림으로 채웠다. 본격적으로 큰 도화지에 그려낸 '내 그림'이라고 할 만한 것들은 왠지 모르게 우울한 색감 투성이었다. 하지만 그걸 감춰야겠다는 부끄러움보다도 온통 그 마음을 색과 모양으로 풀어내는 데에만 몰두했다. 


가지고 있던 디카로는 저화질 영상 작업을 몇 개 만들고, 장을 보러 나갈 때에는 땅에 떨어진 꽃만을 찾아다니며 사진 시리즈를 만들었다. 그 사진을 어떻게 보여줄까 궁리를 하다가 인화를 한 것을 복사해서 작은 책을 만들었다. 애초에 제본 테크닉은 없었으니 군 시절 연마한 바느질로 종이를 엮었다. 거기에 이런저런 오브제 몇 개를 더 만들었다. 큰 주제에서 출발해 다양한 방식으로 구체화했다기 보다, 그냥 마음 끌리는 대로 마구 만들어냈다.


어둡게 만든 방이니 낮과 밤의 구분은 사라지고,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자고, 자고 일어나면 작업을 하면서 그렇게 몇 개월을 보냈다. 포트폴리오라는 건 이렇다 할 공식이 없었으니, 시험을 치르러 다닐 때 캐리어에 넣어 다닐 만큼의 양이면 되겠다 싶었다. 완성의 기준 또한 없었기 때문에, 시험 일정이 코앞에 닥쳤을 때까지도 뭔가 자르고 붙이고, 그리고를 반복했다. 그렇게 휘뚜루마뚜루 나의 미대 입시 포트폴리오, 나의 도시에가 '완성'되었다.


시간이 흘러, 미대를 졸업하고도 생계에 집중하느라 특별히 개인적인 '작업'에 진전이 없는 요즘, 그때의 이야기를 들은 작가 S가 나에게 말했다. 


"너한테 그런 경험이 있어서 다행이야. 결과로 평가받는 것에 크게 좌지우지되지 않고, 너무 생각하지 않고, 개념에만 치중하지 않고, 자유롭게 마음껏 표현했을 때의 그 만족감을 알고 있잖아. 언젠가 반드시 그렇게 작업을 할 날이 다시 올 거야."


그렇다. 결국 미대 교수들 앞에 펼쳐놓고 결과를 평가받을 목적이긴 했지만, 그 평가의 기준을 몰랐으니 하고 싶은 대로 창작을 할 때의 만족감을 잊을 수는 없다. 스스로 잘 하고, 못 하고의 기준도 없으니 흔히 말하는 창작의 고통도 덜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경험치가 쌓일수록 오히려 수월해지기 보다 선뜻 한 발짝을 내딛기 망설여지는 일들도 있나 보다. 나에게는 작업이 그렇다. 잘 하고 싶으니 오히려 못 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자꾸만 맞닥뜨리는 것이다. 




내 '작업실'



반려식물 '빌베르기아'의 초상화



땅에 떨어진 꽃들을 찾아다녔다.



사진을 모아 작은 사진첩을 만들었다.



난장판이 되어가는 방. 뭔가 기록을 남기고 싶었는지 비슷한 구도의 사진이 많다.



청사초롱 모양의 검은 조명 오브제도 만들었다. 조명이 밝아야 할 필요가 없었던 시기라서 그랬는 지도.



일상에서 찾은 재료들로 이런 것도 만들었다. 허브티 상자의 구멍을 들여다 보면 바다가 보이는 뭐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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