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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 Aug 30. 2023

클라우스 노미: 섭얼번에 내려온 뉴웨이브의 천사


2020년.

소니뮤직에서는 Klaus Nomi의 음원 사용을 논의하고자 관련 책임자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책임자나 관련자는 그 누구도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클라우스 노미는 19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까지 활동했던 예술가로, 당연히 그때의 계약에는 디지털 음원에 대한 내용은 있을 수 없었다. 따라서 실물음반의 비정기적인 소량 재생산 외에는 그 상태 그대로 음원 사용을 논의하려 했던 2020년까지 방치되고 있었던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당시 클라우스 노미가 음반을 낸 RCA는 현재 소니의 자회사로 편입되었는데도 말이다.


어쨌든 당시 책임자들을 찾아낸 소니의 노력으로 클라우스 노미 음악의 저작권자인 Melissa Moon과 연락을 취할 수 있었고, 완전히 소실된 오리지널 레코딩을 AI로 새로 구성해 리마스터링하는데 3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2023년 3월 클라우스 노미의 음악이 마침내 스트리밍으로 서비스될 수 있었던 것이다.


멜리사는 자신이 음원의 법적소유권자라는 사실에 많이 놀랐는데, 그녀는 1980년 클라우스와 결혼했지만 그것은 독일이민자인 클라우스의 영주권 작업일 뿐이었고, 더군다나 그는 게이였고, 1983년 동료 Joey Arias에게 모든 유산을 남기고 요절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타임머신을 타고 지금으로부터 클라우스가 죽은 40년 전으로 가보자.


KLAUS NOMI

a Suburbian Angel of New Wave

클라우스 노미: 섭얼번에 내려온 뉴웨이브의 천사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40년 전인 1983년, 8월.

뉴욕의 Sloan Kettering 암병원.


클라우스 노미는 3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고, 사인은 에이즈 합병증이었다. 화장된 그의 유해는 뉴욕 거리에 뿌려졌다. 새로운 질병이 의학계에 보고되고 에이즈라는 병명을 얻기 시작한 그 때, 클라우스는 에이즈로 사망한 유명인으로서는 극초창기 인물이었다.


에이즈라는 이름 이전에 게이-암(Gay Cancer)으로 공공연히 불리던 때였다. 클라우스 노미는 동료 Joey Arias의 방문 외 누구도 찾아오지 않은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전염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전세계적으로 만연했다.


클라우스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든 유산을 조이에게 남긴다는 유언을 남겼다.


당시 클라우스 노미는 커리어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1980년, RCA 프랑스와 계약을 체결하고 데뷔 앨범 발매를 기다리는 반년 간, 그는 파리에 살면서 RCA 마케팅 디렉터 Jean-Pierre Bommel의 홍보활동에 동행했고 몇 차례의 지방 공연을 가졌다. RCA 프랑스 국제 팀은 클라우스와의 계약을 만장일치로 동의했고, 무명인 클라우스에게 많은 예산은 아니었지만 앨범에 물심 양면으로 적지 않은 지원을 했다.


1집 Klaus Nomi는 1981년 발매 후 6개월 만에 프랑스에서 플래티넘 디스크(판매기록 30만장 이상)에 올랐고, RCA가 예정보다 앞당겨 곧바로 2집 작업을 착수하고자 했기에 클라우스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 무렵 클라우스는 자신이 뭔가 병을 앓고 있다는 걸 알았고, 다시는 프랑스로 돌아가지 못했다.

Le Palace, Paris (1981)

시간을 조금 더 돌려 이번엔 1979년.

그의 전성기가 시작되던 사건을 살펴보자.


드랙, 게이 예술가들의 공연장소였던 맨해튼의 클럽 Mudd에서 클라우스는 동경해오던 록스타 데이빗 보위와 마주친다. 당시 데이빗 보위는 남성과 여성을 모두 가진 존재, 외계에서 온 존재를 자신의 페르소나로 설정하고 활동 중이었다.


클라우스 노미는 미국으로 넘어오기 전 독일에서부터 데이빗 보위의 열렬한 팬이었고, 그와 같이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될 수 없고, 외계에서 왔으며, 사회 통념과 규칙을 부수는 존재를 표방하고 있었다. 물론 노미는 보위가 될 수 없었고, 마찬가지로 보위도 노미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같은 활동컨셉을 갖고 있었지만 겹쳐 볼 수 없을만큼 둘은 저마다 매우 특징적인 존재들이었다.

보위는 그곳에서 클라우스, 조이 아리아스와 짧은 대화를 나누고 친구의 아이라이너로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클라우스는 이후 보위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 해 SNL에서 보위의 백업보컬로 섭외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그가 RCA의 눈에 들게 되었던 것이다.


클라우스는 이날을 위해 디자인해 보위에게 기습적으로 입혔던 의상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고, 같은 컨셉으로 의상제작을 의뢰해 입은 것이 클라우스 노미의 상징이 되었다.


(자신의 특기인 Linzer Torte를 제공하는걸로 대금을 퉁쳤다고..)

Klaus Nomi : 팝과 록은 규칙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클래식 음악보다 보수적이예요. fuck disco! fuck rock! 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잘못된 일이예요. 인종차별을 하는 것과 같죠.
 
독일에서는 카스트라토 보컬로 오페라를 부르는게 쇼킹한 일이었어요. 그런 일은 아무도 하지 않았거든요. 독일 클래식 오페라를 가지고 록을 하는 것도 쇼킹이죠. 그래서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은 더블 충격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공연장에서의 펑크 청중들은 제가 그들에게 충격을 줄 수 있다는 걸 리스펙해요.
Klaus Nomi : 저는 가능한 한 외계인처럼 보이는게 좋아요. 집단의 아웃사이더로 접근하는 게 마음대로 사회적 통념을 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거든요.
애초에 규칙이라는 걸 누가 정한 건가요?
'Real People' segment: The Window at Fiorucci, NYC (1979)

I'm Klaus Nomi, from the planet Nomi.

I'm wearing black lipstick, so you can see my lips and you can see what I doing with them.

Klaus Nomi : 60년대 말에 저는 엄마 돈을 훔쳐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King Creole을 사왔는데, 그걸 보고는 매우 화내면서 제게서 뺏어가더니 Maria Callas로 바꿔오시더군요. 나중에는 전 BBC 방송을 들으며 영국 록을 들었어요. 엘튼 존, 핑크 플로이드..

보위는 실제로 한 번 봤어요. 베를린에서 모스크바로 향하는 보위의 기차를 천 명의 팬들과 함께 역 플랫폼에서 기차가 사라질 때까지 배웅했었죠..
베를린 역에서 환승하는 데이빗 보위

이번엔 1978년.

클라우스가 공식활동을 처음으로 시작하고, 예명으로 클라우스 노미를 지은 해다.


뉴욕의 New Wave Vaudeville 클럽에서 자정 즈음의 피날레 순서로 첫 데뷔한 클라우스의 모습은 일순간 관중들을 경직시켰다. 투명 비닐우의와 반짝거리는 쫄쫄이와 함께 새하얀 얼굴화장에 관자놀이까지 뻗은 섀도우를 가진,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를 비닐 할리퀸을 본 젊은 뉴웨이브 매니아들은 Holy Shit, What is it?, 비아냥거림 등으로 화답했다.


클라우스는 그곳에서 메조소프라노로 카미유 생상스의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 속 아리아를 불렀고, 쏟아지는 환호 속에서 주최자들이 무대로 나와 "이건 립싱크가 아니예요!" 라고 소리를 질러야 했다.

Joey Arias : 마치 다른 행성에서 내려온 사람 같았고, 부모가 그를 집으로 소환하는 것 같았어요.
연기가 다 걷힌 자리에 클라우스는 사라져 있었죠.

충격적인 데뷔무대 이후 클럽 주최자들과 관계를 맺게 된 클라우스.


그렇게 알게 된 기타리스트 Kristian Hoffman을 필두로 밴드를 조직해 훗날 1집 Klaus Nomi에 들어가게 될 곡들이 탄생했다. 그러나 클라우스의 예술은 맨해튼 이스트 빌리지 밖 일반 대중이 받아들이기엔 너무 게이스러웠던 까닭에 어느 음반사도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의 노래가 립싱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클라우스 노미란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 그는 전보다 많이 가난해졌다. 물론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감정적인 태도로 대하진 않았지만 주변 모두 그가 불행과 좌절을 느끼고 있음을 알았다. 최종적으로 밴드는 음악보다 퍼포먼스에 치중하는 클라우스와의 견해 차이로 해체되었다.


클라우스는 이후 모델, 무용가, 미술가들과 교류하며 록클럽을 벗어나 드랙, 게이, 비주얼 아트 공연장에서 주로 활동하게 된다. 그 덕분에 클라우스는 데이빗 보위와 SNL에 출연할 수 있었고, RCA와 정식음반 계약을 맺는 행운을 얻었다.


하지만 RCA는 클라우스에게 상업성을 요구했다.

저희가 실제 제작 중에 본 건 그냥 록밴드가 록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여전히 멋졌습니다. 그냥 그는 등장하기만 해도 멋졌어요. 하지만 원래의 컨셉은 잃어버렸고 더 이상 노미의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세계와 거리를 두고 더 좋은 일을 위해 떠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클라우스는 너무 독특했고 원래의 그의 모습을 빼고서는 그를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없었어요.


그때부터 클라우스의 전체적인 컨셉은 오로지 돈과 레코드 계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됐죠.
- 다큐멘터리 영화 The Nomi Song, 2004.



1982년.

클라우스와 그의 밴드는 먼저 유럽투어를 진행하고 이후 미국에서의 인기를 차츰 늘려가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RCA에서는 그의 유럽투어에 관심이 없었고, 그저 음반 수익에만 열을 올렸다.


미국으로 귀국한 클라우스의 2집이 발매된 후 그는 혼자서 홍보 투어를 다녔고, 주위의 만류에도 그는 멈출 수 없다며 항생제를 먹고 목소리 보존을 위해 주사를 맞았다. 건강이 빠르게 악화되고, 몸은 한계치를 넘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클라우스는 공연과 일을 쉬지 않았다.

클라우스가 유럽에서 돌아와 아프다는 걸 알았어요. 저녁식사에서 클라우스를 보았는데, 보통 안아주고 양볼에 유럽식 입맞춤을 하곤 했는데 이번엔 망설여졌어요. 그게 전염되는건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죠. 그래서 약간 망설여졌는데, 클라우스가 내게 "괜찮아, 걱정하지마" 하며 손을 내밀어 달랬어요. 그때 저는 울기 시작했죠. 제가 그를 본 건 그 때가 마지막이었을 겁니다.

클라우스는 피부에 난 발진 같은 것으로 병원을 찾아 입원해있었습니다. 그날 밤 11시 채널4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는데, 그때 gay cancer에 관한 뉴스가 보도되고 있었어요. 클라우스와 저는 통화 중이었고 그 순간 "오 마이 갓, 나 이런게 있어 나 팔에 이게 있다고." 이런 식으로 말을 했죠.

클라우스는 병원에 있었고 아마도 그냥 누워서 울고 있었던 것 같은데, 누구든 전화를 받아줄 사람이면 전화를 걸었죠.

- The Nomi Song, 2004.


1944년 독일의 Immenstadt 지방에서 태어난 Klaus Sperber(a.k.a. 클라우스 노미) 는 1960년대 베를린 음악원에 들어가 공부했다. 그러나 그는 음악원을 자퇴하고 이후 오페라 극장 안내원으로 일했다. 그곳에서 가끔 공연이 끝나고 무대 커튼 앞에 서서 동료직원들을 위해 노래를 부르곤 했으며, 베를린의 게이 디스코텍에서도 오페라 아리아 공연을 했다.


클라우스는 1972년 맨해튼 이스트 빌리지로 떠나왔고, 카페알바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틈틈이 노래 레슨을 받았다. 그리고 패션디자이너이자 친구인 Katy Kattelman과 함께 자신의 아파트에서 린처 토르테를 구워 맨해튼 구겐하임 미술관을 포함, 여기저기 납품하는 제빵사업을 시작하며 Tart Inc. 법인을 설립했다.

Klaus Nomi : 제가 뉴욕을 선택한 이유는 내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예요. 내 인생의 도시죠. 꼭 학교에 다니는 것 같아요. 아주 거칠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답니다.
Lady Gaga 2022 Chromatica Ball Tour

https://www.theperfectmagazine.com/features/lady-gaga-chromatica-ball-fashion-outfits-summer-tour-every-look-opening-night

https://www.usatoday.com/story/entertainment/music/2022/08/09/lady-gaga-u-s-chromatica-ball-tour-singer-defends-gay-marriage-abortion/10266229002/

(좌)Klaus Nomi, (우)거울 나라의 앨리스(2016)
저는 미키마우스와 월트디즈니에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디즈니 영화들은 정말 멋졌어요. 그게 제 작은 세계였습니다. 디즈니는 삶을 만화로, 만화를 삶으로 만들었고, 작은 동물과 생물, 가구들 모두 생동감 있게 그렸어요. 저도 만화캐릭터처럼 보이지 않나요? 가끔은 저도 그랬으면 좋겠다 생각해요.
Le Palace Magazine, N9
-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누구인가요?
피노키오. 피노키오는 굉장히 감동적인 영화죠. 작은 목각인형 아이가 자신과 다른 환경에서 좋지 못한 대우를 받고 이해받지 못하다가, 결국 인간이 되고 진짜 눈물을 흘리게 돼요. 너무 잘 만든 영화라 피노키오의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어요. 정말 신비로워요.


클라우스 노미 New Wave Vaudeville 1978

https://youtu.be/kQeWvFPb5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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