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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 Oct 12. 2023

노르웨이 재즈의 미스터리


지구상 가장 위도가 높은 지역 중 하나인 북유럽. 그 중에서도 노르웨이.


노르웨이는 1905년까지 약 500년 이상 덴마크와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고 독립 직후에는 세계대전에 휘말려 독일의 지배를 받았다. 척박하고 춥고, 식민지 신세를 전전하며 주권행사도 거의 하지 못한, 그런 환경을 가진 나라에서 1970년대에 어떻게 갑자기 유럽재즈의 한 축을 형성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노르웨이 재즈의 미스터리가 여기에 있다.


1. 초기 노르웨이 재즈


노르웨이에 재즈가 전해진 시기는 생각보다 훨씬 이른 1920년대로 전해진다. 당시는 재즈의 종주국인 미국의 상황과 유사하게 부유층이 즐기는 댄스 음악으로 연주되었다. 아직 미국에서도 재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즉흥연주가 등장하기 전이었으므로,노르웨이에서는 호텔에서 흑인 음악, 하와이 음악과 함께 그리그, 쇼팽, 베토벤을 연주했다고 전해진다.


1930년대.

미국에서는 1929년의 대공황으로 대규모 밴드로는 밴드를 꾸리기 힘든 상황이 되어 소규모 밴드가 부상하게 되었고, 그와 함께 재즈의 특징인 즉흥연주가 점차 확산되기 시작한다. 그에 따라 노르웨이 재즈도 역시 사교계에서 멀어지며 점점 연주 중심의 음악이 되어갔다.


1963 한국을 방문한 루이 암스트롱

1933년 Louis Armstrong은 노르웨이 최초의 미국 재즈 공연을 했고, 그 무렵 색소포니스트 콜맨 호킨스, 피아니스트 듀크 엘링턴, 기타리스트 장고 라인하르트가 노르웨이를 찾았다. 콜맨 호킨스의 유럽투어에 노르웨이 출신의 드러머 Per Gergersen이 함께할 정도였으니 노르웨이 뮤지션들의 수준도 성장하고 있었다.


세계대전 이후 노르웨이는 NATO의 창설멤버로 가입하면서 합동훈련을 통해 미국과 피부로 맞닿는 교류가 이뤄질 수 있었고, 1950년대 노르웨이에서 재즈의 인기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제1회 Molde 재즈페스티벌

1960년에는 노르웨이 전역에 30개 이상의 재즈 클럽이 영업을 했고, 1961년에는 유럽에서 세번째, 북유럽에서 최초인 재즈페스티벌 몰데 재즈페스티벌이 개최되었다. 그러나 꾸준히 늘어가는 인기에 비하면 노르웨이 재즈씬에서는 눈에 띄는 성과가 없었는데.


재즈를 낳은 건 미국이지만 재즈를 키운 것은 프랑스라는 말이 있듯이 1960년대 유럽으로 이주한 미국 재즈 뮤지션들 상당수가 첫째로 프랑스 파리, 둘째로 덴마크 코펜하겐에 자리를 잡았고 그 다음으로는 스웨덴 스톡홀름 정도가 꼽힐 뿐 미국 뮤지션이 노르웨이로 이주한다는 일 자체가 없는 수준이었다.


노르웨이 로컬 연주자 중에도 내수용 레벨을 초월한 연주자는 거의 없었다. 만약 있었다 할지라도 국제적으로 알려지며 주류 시장으로 진출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록이 등장하면서 세계 재즈 시장 전체가 초토화되었다. 북유럽의 중심국가라는 인식이 있는 스웨덴에서는 재즈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일찍이 재즈뮤지션협회 EMANON을 결성했고, 재즈전문 음반사도 발족되어 딴에는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노르웨이는 가만히 앉아서 방관하고있는 꼴이었다.


그렇게 1965년 노르웨이의 재즈클럽 2/3이 폐업하는 수준에 이르자 노르웨이에서도 재즈뮤지션협회 Norsk Jazzforum을 창립했는데, 이 협회는 정부지원제도를 이끌어냈으며, 재즈 어워드 Buddy Prize와 재즈경연대회인 아마추어 재즈컨테스트를 만드는 성과를 보였다.


그리고 재즈가 위기를 맞은 이 60년대 중반, 미국의 피아니스트, 이론가인 George Russell(1923-2009)이 스톡홀름으로 이주해왔다.


2. George Russell

George Russell

2023년은 조지 러셀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


조지 러셀은 1953년 The Lydian Chromatic Concept of Tonal Organization이라는 이론서를 집필했으며, 이 것은 재즈 역사상 최초로 클래식 음악이론과 구분되는 재즈만의 독자적인 이론을 제시한 것이었다.


Bill Evans, John Coltrane, Miles Davis, Eric Dolphy, Ornette Coleman, Don Cherry 등 조지 러셀의 동료, 제자, 밴드멤버 등 직접적으로 그의 영향을 받은 음악가들이 재즈 역사에서 하나의 큰 획이었던 Modal Jazz 를 탄생시키며 그의 이론을 현실 세계로 구현해냈다.


조지 러셀은 두가지 음의 진동수 차이에서 발생하는 배음을 연구하면서 바흐 이전의 교회음악에서 사용되었던 Mode(선법)를 발굴하였고, 그를 기반으로 리디안 크로매틱 컨셉을 집필했다. 1949년에는 최초의 모달 재즈곡 'Cubana Be, Cubana Bop'을 작곡했고, 따라서 그를 모드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대중적으로 이해되기에는 너무 난해했고, 더군다나 재즈 시장의 초토화라는 암울한 미래 속에서 1964-1965년 사이 자신을 열렬히 환영해 준 북유럽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조지 러셀은 4~5년 동안 스웨덴과 노르웨이에 머물렀고, 이들 지역을 순회하며 세미나를 진행했다.


그는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서도 리디안 크로매틱 컨셉을 가르쳤으며, 그곳의 재즈 교육 인프라에 투자를 했다. 이것은 노르웨이 재즈 역사에서 굉장한 일이었는데, 그 때 까지의 노르웨이 재즈는 대부분 아무런 기반없는 하면된다 멘땅에 헤딩 정신의 독학으로 일궈오고 있었기 때문.


조지 러셀의 첫 노르웨이 공식활동은 1965년 몰데 재즈페스티벌의 George Russell Sextet으로 알려져있다. 그곳에서 색소폰의 Jan Garbarek과 드럼의 Jon Christensen을 처음 만나고 3개월 후 두 사람을 자신의 그룹으로 영입했으며, 이후 콘트라베이스의 Arild Andersen과 기타 Terje Rypdal이 합류했다.

Jan Garbarek (1), Terje Rypdal (2), Arild Andersen (3), Jon Christensen (4)

북유럽 거주 당시 조지 러셀의 작품들은 대부분 스웨덴 라디오 재즈오케스트라 또는 노르웨이의 젊은 연주자들 4명과 녹음한 것이었다.


조지 러셀의 체류기간 동안 노르웨이 4인의 음악은 상당한 변화를 보였는데, 1965년 몰데 재즈페스티벌을 포함, 적지않은 활동을 같이 해온 색소폰연주자 얀 가바렉과 드러머 욘 크리스텐센의 당시 음악은 흡사 전설적인 색소폰연주자 존 콜트레인과 드러머 엘빈 존스의 음악을 연상시켰고, 기타리스트 테르예 립달은 오슬로 대학 재학 중 지미 헨드릭스에 심취하며 록과 블루스에 뿌리를 두고 밴드활동에 열심이었다.

John Coltrane (1), Elvin Jones (2), Jimi Hendrix (3)
George Russell :
노르웨이의 한 축제에서 늦은 시간에 한 연주를 들었는데, 마치 뉴욕 125번가에 있는 것 같았죠. 노르웨이 밖으로 나가본 적도 없는 연주자들인데. 그런 연주를 하더군요. '정말 여기 노르웨이에서, 어떻게 이런 어린애가, 콜트레인같이 불지?'

조지 러셀과의 4~5년 동안 이들은 그에게 리디안 크로매틱 컨셉을 전수받았고, 이 기간 조지 러셀 앨범에 녹음된 이들의 음악을 들어보면 주어진 형식을 거부하는 프리 재즈 스타일을 구사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계속해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탐구해갔고, 이전의 노르웨이 연주자들과 비교되지 않을 수준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1969년 설립된 ECM레코드가 없었다면 그들의 음악이 세계에 알려질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3. ECM Records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였던 독일의 한 청년 Manfred Eicher가 설립한 음반사 Edition of Contemporary Music.


ECM레코드는 만프레드 아이허 본인이 자기 마음에 드는 음악가들의 앨범을 제작하려 만든 음반사였기에 설립 초기부터 프로듀서 만프레드 본인이 음악가들을 찾아다니면서 녹음을 했고, 열렬한 팬이자 프로듀서의 입장에서 작품에도 깊게 관여하는 방식으로 음악을 제작해왔다. 그런 식으로 탄생한 ECM의 음악들 중에는 그 예술성을 높이 인정받은 작품이 많았고, 그러길 50년, ECM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음반사들 중 하나가 되었다.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태어난 Jan Erik Kongshaug(1944-2019)는 노르웨이 라디오 재즈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한 기타리스트였지만 사실 음대에 진학한 것은 아니었고, 그의 전기공학 전공을 살려 1969년부터는 Arne Bendiksen 스튜디오의 음향기술자로 일하고 있었다.


1970년 노르웨이 연주자 4명의 ECM 데뷔앨범 "Afric Pepperbird"를 녹음했던 것을 계기로 ECM 전속 엔지니어가 되었으며, 프로듀서 만프레드 아이허 본인과 함께 차갑고 쓸쓸한 ECM 특유의 사운드를 창조한 인물로 알려져있다.

Terje Rypdal :
1970년, 나는 오슬로 외곽에 위치한 Høvikodden 아트 센터에서 얀 가바렉의 ECM 레이블 데뷔 앨범인 'Afric Pepperbird'를 녹음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조지 러셀과 함께 녹음을 하고 있었는데, 만프레드 아이허는 녹음된 음악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지 몰랐죠. 드러머 욘 크리스텐센이 "얀 에릭 콩샤우그라고 괜찮은 기술자가 하나 있는데요."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고, "아르네 벤딕센 스튜디오로 가져와보세요, 오늘 밤 11시 쯤에는 시간이 될 겁니다." 라고 했었죠. 그래서 거기로 다 들고가서, 밤을 새워서 녹음을 끝냈어요. 얀 에릭은 본인이 하고 있는게 무엇인지 전부 다 아는 것처럼 녹음은 거의 순식간에 진행되어갔고, 그 뒤 ECM 정규 기술자가 됐습니다. 완성된 녹음이 만프레드 마음에 쏙 들었거든요.

1968년 이탈리아 볼로냐의 한 콘서트를 보러 간 만프레드 아이허는 조지 러셀 섹스텟을 통해 이들 노르웨이 연주자들을 접했다. 만프레드는 ECM레코드 설립 후 조지 러셀에게 러브콜을 보냈으나 그의 계약조건을 맞추는데 신생 음반사로서는 한계가 있었던 탓에 대신에 그의 밑에 있던 신예 노르웨이 연주자들에게 눈을 돌렸다. ECM Catalog 1007 Afric Pepperbird, 그렇게 ECM의 7번째 앨범이 만들어졌다.

Afric Pepperbird (1970)

프로듀서 만프레드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본인이 직접 섭외하는 ECM의 유구한 전통 탓인지 음악가의 일정에 맞춰서 그 근처로 녹음스튜디오를 정하는 관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1983년 콩사우그가 노르웨이 오슬로에 Rainbow 스튜디오를 건립하고서 그의 녹음 상당수는 이 곳에서 진행되었고, 이것이 ECM의 음악을 오슬로 사운드라고 부르게 된 계기가 되었다.

Jan Erik Kongshaug :
제 명성이라고 한다면 제가 ECM에서 했던 것들이 만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저는 어느 누구의 음악을 녹음하더라도 항상 똑같은 방식으로 녹음해요. 어떤 소리가 있다고 하면 그걸 오디오 품질로 살리는데는 별로 초점을 두지 않죠. 한 앨범이 다른 것보다 좋게 들리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좋은 음악가가 좋은 악기를 연주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믹싱이나 녹음을 하러 세계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여기로 오곤 하는데요. 제가 믹싱만 하면 과거에 여기서 했던 것들과 똑같은 사운드가 나올거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불가능해요. 좋은 사운드는 좋은 음악가와 좋은 악기가 만드는 겁니다.


4. 조지 러셀 이후의 노르웨이


조지 러셀이 북유럽을 떠난 연도에 대해 정확히 전해지는 바는 없다. 그가 미국의 음악대학 New England Conservatory 교수로 초빙된 것은 1969년이지만, 그 후 1970년에도 북유럽에서 녹음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는 그 즈음 미국으로 돌아갔고, 북유럽은 이제 남은 자들의 몫이 되었다.


노르웨이 네 연주자는 계속해서 활동을 했고, 1970년대를 지나며 이들의 음악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성장해갔다. 그리고 함께한 동료 및 선후배 음악가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고, 노르웨이 재즈씬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달라져 있었다.


조지 러셀은 북유럽 활동 중 오슬로 대학에서 독일의 현대음악가 Karlheinz Stockhausen과 함께 세미나를 열고, 교육 인프라에 투자하는 등 많은 기여를 했으나 당시 노르웨이 음악대학은 교회음악이 중심이었다. 팝음악은 물론 재즈 연주는 금지되어있었으며, 실수로라도 색소폰을 갖고 들어오면 강의를 하지 않는 교수도 있었다.


1979년 노르웨이 중부의 해안도시 Trondheim.

그곳 트론하임 뮤직콘서바토리의 교수였던 Terje Bjørklund.


그는 음악원의 재정이 열악할 때를 틈타 정부지원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학교에 없는 재즈교육과정을 개설해야 한다며 교육부 국무비서와 함께 대학에 주장했고, 노르웨이 최초의 재즈음악과 Jazzlinja가 개설되었다.


조지 러셀이 떠난지는 약 10년이 되었지만 노르웨이 재즈 교육의 시작은 그의 리디안 크로매틱 컨셉 세미나였기에 Jazzlinja (이하 트론하임 음악원) 에서도 그것을 가르쳤고, 지금도 여전히 리디안 컨셉의 강의가 이뤄지고 있다.

Jan Garbarek :
조지 러셀은 나에게 음악을 연주하는 또 하나의 길을 일깨워줬습니다. 그의 분석 기법을 통해 나는 혼자서도 계속해서 음악을 학습할 수 있게 되었죠.
Arild Andersen :
조지 러셀은 입버릇처럼 "그건 여러분 자신의 예술적 판단에 맡겨야 합니다" 라고 했어요.

조지 러셀의 세미나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과 예술세계를 찾아가는 것이었고, 때문에 최종 결과물을 모두 다른 형태로 가져갔으며, 이론적 학습은 그 다음이었다고 베이스연주자 아릴드 안데르센은 기억한다.


트론하임 음악원은 매년 파트무관 10명이 되지 않는 입학정원으로 소수 정예 운영을 추구하고 있으며 Arve Henriksen, Tord Gustavsen, Trygve Seim, Mats Eilertsen 등 현재 국제적으로 활동중인 노르웨이 재즈음악가 상당수가 이곳 트론하임 음악원에서 배출되었다.


5. 결론


노르웨이 재즈음악가들의 특이사항이라고 한다면 독학으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이다. 얀 가바렉은 14살에 라디오에서 색소폰연주자 존 콜트레인의 음악을 듣고 색소폰이 자신이 걸어야 할 길임을 직감했고, 그 길로 색소폰과 교본을 사서 연습한 결과, 이듬해 1962년의 노르웨이 아마추어 재즈 경연에서 대상을 얻었다.


기타리스트 테르예 립달은 13세부터 독학으로 기타를 연습해 오슬로대학교에 진학했고, 대학원에서 조지 러셀을 만난다. 드러머 욘 크리스텐센도 노르웨이 아마추어 재즈경연에서 대상을 수상했으며, 역시 독학으로 드럼을 배웠다.


덴마크, 스웨덴, 그리고 나치 독일에 의해 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주권을 빼앗긴 노르웨이는 북유럽 국가들 중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가장 열심히 재즈를 사랑한 국가이다. 스웨덴에는 있던 인프라가 노르웨이에는 없었고, 재즈음악가협회 또한 스웨덴을 따라 만든 것이었다. 다만 1960년대 이래로 상황이 바뀌어 스웨덴에서는 팝음악 분야에서 뛰어난 음악가들이 많이 등장했지만, 노르웨이는 1961년 북유럽 최초의 재즈페스티벌을 개최했고, 이는 스웨덴 최초의 재즈페스티벌에 20여 년 앞선 것이었다.

 

노르웨이 재즈는 자연주의적인 것이 특징이다. 차갑고, 어딘가 쓸쓸하지만 자연을 사랑하는 북구의 정서를 그대로 담은 노르웨이 재즈는 북해와 피요르드, 깎아지르는 산맥과 함께 적은 인구라는 노르웨이의 환경과 전혀 무관하지만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북유럽의 정서가 전후 현대 예술사조를 어느 정도 관통했던 면 덕분에 유럽 북쪽 끝의 노르웨이에서도 유럽 재즈계를 선도하며 전세계인들을 감동시킬 수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비주류 재즈 중에서도 손에 꼽는 괴인들만 배출하기를 외길 45년, 트론하임 음악원의 음악이 궁금하시다면...

시릴 말메달 헤게 & 키에틸 물레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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