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오랜만에 만난 선배와 비건 안주를 파는 술집에 갔다. 선배는 부산에서 글 쓰는 일을 하는데 대략 9개월 만에 보는 거였다. 학교를 다닐 때보다 졸업한 이후에 더 자주 연락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선배는 나에게 딱 그런 사람이다. 비가 많이 올 것 같아 비 구경하기 딱 좋은 술집을 찾아간 건데 정작 비는 별로 오지 않았다. 선배는 비건 만두가 맛있다고 앞으로는 비건 만두만 먹겠다고 하고, 콩단백을 먹고는 이건 어떻게 만드는 거냐 내게 묻기도 하고, 내가 채식 계정을 키워 나중에 어디든 써먹을 거라 하니 그걸 어따 써먹게 하는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내가 열아홉이 된 그때 선배를 만났으니 우리는 벌써 알게 된지 7년이 되었는데도 선배는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많이 담아두고 있었다. 그때 그런 일이 있었구나. 모든 걸 공유하지 않아도 이렇게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관계라는 건 꽤 어려운 것 같은데 말이지. 선배랑은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하거나 그 거리를 좁히려고 애쓰지 않고 적당히 흘러가는 대로 보내왔음에도 무던하게 지내왔던 것 같다. 둘 다 관계에 적당히 무던한 편이지만 사실 생각이 많은 편이라 그런 거라고 일단 멋대로 생각한다.
우리는 세 시간 반 동안 지난 아홉 달간 유선상으로는 하기 어렵거나 귀찮거나 간지러웠던 이야기들을 나누었는데 그러면서 동시에 중간중간 삼천포로 흐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실 그 삼천포가 우리 대화의 핵심인지도 모른다. 이상하게 선배를 만나고 오면 항상 실제로 만난 시간의 딱 두배 정도 되는 시간을 체감하곤 하니까. 같이 일을 할 때는 주로 글 쓰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그다음으로는 그 일을 하는데 쓰이는 혹은 각자가(주로 내가) 갖고 있는 이념 내지는 신념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내가 얘기를 하면 선배는 진지한 눈빛으로 내 이야기를 들은 뒤에 선배의 말로 선배가 나름대로 이해한 것을 정리해서 이야기해줬다. 그게 좋은 게 좋은 거지 같은 따분한 말이 절대 아니었다는 걸 나는 기억한다. 때문에 그런 순간에 선배에 대한 믿음이나 사랑이나 뭐 그런 게 더 커졌던 것 같기도. 그런 게 여러 번 누적이 되었던 것 같기도. 선배가 졸업한 뒤로 학교 밖에서 보기 시작할 즈음부터는 홍상수 영화 얘기를 주로 했고-당시 내 주변에 홍상수 영화를 좋아하는 건 이 선배뿐이었다. 아마 선배도 마찬가지일 거라 예상한다(...) 생각해보니 어제는 홍상수 영화뿐만 아니라 영화 얘기 자체를 안 했다- 여행 얘기를 하거나 뭘 하고 지내는지에 대해 대화를 나눴는데 그 안에 일어나는 어쩐지 홍상수 영화 속 에피소드 같은, 가끔은 그것보다 훨씬 다이나믹한 선배의 일상 이야기를 들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선배는 뭔가를 생생하게 그려지게끔 말하는 재주가 있는데 어제도 그런 광경을 여럿 목격했다. 볼이 지금보다 훨씬 빵빵하던 그녀의 10대 시절 모습이나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2000만 원 정도 한다던 수조의 모습, 벽에 붙어있는 거북이를 지킵시다 포스터 따위들이 눈 뜨고도 그려졌다. 나는 선배가 <헤어질 결심>을 보고 왔기를 바랐는데, 선배는 그 영화를 아껴두고 있다고 했다. <토르>가 개봉해서 곧 막이 내릴 거라고 얘기하니 당황하며 머리를 긁적이는 것도 딱 내가 예상한 선배의 리액션에 가까웠다.
뭔가를 바라고 이야기를 하진 않았는데 어제는 선배가 내가 말하지 않은 부분까지 명쾌하게 내 일상과 생각에 공감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제까지 중 우리의 생각이 꽤 많은 부분에서 일치하는 때가 비로소 어제였다는 것도. 다음엔 부산에 가서 선배를 보기로 했다. 어쩌면 선배가 또 서울에 오는 게 먼저일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부디 선배의 이케아 책장이 완성되어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