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말 많다 Oct 24. 2024

트라우마라는 말

생각보다 사람들이 쉽게 꺼내쓰는 말

사람들이 무언가를 극단적이면서 극적인 효과를 주고싶을 때 주로 '트라우마'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나는 이런 것에 트라우마가 있으며 이런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땐 조심해라고 하거나 자신의 트라우마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조금 더 특별하다는 것처럼 꼭 말하고는 한다. 내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사람들을 일반화시키는 이유는 바로 내가 그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내가 기억하고 있는 트라우마는 내 손에 다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고 생각된다. 어린시절 나는 그저 활달하고 밝은 아이였다. 7살도 안되던 아이는 남몰래 자판기에 남아있는 동전을 찾으러 다니며 모으는 재주가 있었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서울 어린이대공원에서 나만의 보물찾기 놀이를 하며 자판기를 뒤지고 있을 때, 거스름돈 나오는 구멍에서 영롱한 은색빛을 발견하고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 때 커다랗고 주름진 손가락이 내 얇은 손목을 덥석 잡았다. 선글라스를 끼고 립스틱을 진하게 바른 아주머니였다. 

"이거 내 돈인데, 왜 너가 가져가니?"

그 때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동전을 그 주름진 손에다가 올려놓은 채 도망갔다. 별일 아닌 일일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 날부터 모르는 사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나에게 지나가는 모든 행인이 마치 괴수처럼 느껴졌다. 다시 생각해본다면 내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헤어나오지 못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시의 일이 나에게는 트라우마가 되었다. 이후부터는 대인기피증이 생겼던 것 같다. 


그리고 어느 날은 엄마의 심부름을 하고 오던 길이었다. 나는 또다시 잔돈을 받아들고 유유히 집에 가고 있었는데, 주로 놀이터에서 같이 놀던 동생과 마주쳤다. 그 때 동생은 잔돈을 움켜쥔 내 손을 가리키며 3천원을 달라고 하였다. 나는 어린시절 위인전이나 책들을 읽으면서 언제나 착하게 살아야한다. 누군가를 도우며 살아가야한다라고 내 몸에 새기며 살았다. 그래서 나는 나보다 어린동생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내 남은 잔돈을 다 털어주었다. 당시 금액이 어느정도였는지는 기억이 나지않는다. 그저 거스름돈이었을지 아니면 내 용돈 전부를 주었던건지 말이다. 집으로 돌아와서 엄마에겝 자랑스럽게 이 이야기에 대해서 말했을 때 내게 돌아오는 것은 모진 말들이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서 느껴본다면 그저 비난이라고 생각된다. 내 뜻대로 행동한 것에 대해 이런 비난을 들어야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엄마가 나를 지칭하는 언어가 바보였었다는 것에 나는 어린나이의 인생관이 흔들렸다. 엄마는 거스름돈을 돌려받기 전까지 올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고, 나는 닭똥같은 눈물을 훔치며 그 눈물들로 내 마음의 상처를 지우려고 노력했다. 그 때 일이 지금까지도 내 기억애 남아있는 것을 보면 상처가 깊게 패여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상처는 아스팔트 도로에 매꾸어지지 않은 구멍이 되어서 삶을 살아갈 때마다 쿵쿵하면서 울린다. 쿵쿵하는 소리는 내 머리를 메아리치고 울려서 너가 하는 이 일이 정말 맞는 거야? 라며 뾰족한 송곳이 되어 나를 찌른다. 내가 하는 결정에 자신감을 잃었고,. 동시에 나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렸다. 당시의 엄마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너무 순진했었기 때문에 돈에 대한 관념을 일찍이 알려주려 그런 충격요법을 썼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그 아이는 엄마가 생각한 것보다 더 여린 아이였다. 그게 트라우마가 될지는 꿈에도 모른 채 모진 말을 감정과 섞어 토해내었을 것이다. 나는 트라우마에 대해서 조금 더 민감하고 조심하면서 커왔다. 대부분의 트라우마는 내 가까운 사람의 말에 담긴 가시에서, 또는 모르는 사람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되었다. 기회가 된다면 남은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도 더 꺼낼 수 있을 것 같다. 이상으로 내 이야기를 마치겠다. 

작가의 이전글 꿈을 파는 소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