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술사가 나리 Jul 08. 2024

내면과 본질로의 회귀

안건우 작가의 새로운 뱀 그림들에 대한 이야기

     여태까지 우리는 안 작가의 그림 속에서 친구의 집을 찾아 떠나는 뱀들과 마주했었다. 뱀들은 우리가 걸어가는 길 가 어딘가에서 불쑥불쑥 환하고 유연하게 모습을 드러내곤 하였다. 그들은 유난히도 밝고 경쾌한 색채와 형태를 지닌 채,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혹시 그들은 그냥 그림 속 뱀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밖으로 나가는 우리의 또 다른 모습, 우리 자아의 형상화가 아니었을까.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 Blue & Yellow>, 2022, 캔버스에 아크릴, 금박

    

    이번에는 우리가 안 작가가 그려내는 또 다른 뱀들을 만나러 여행을 떠날 차례이다. 어디로 가야 그들을 만날 수 있을지 나도 아직 잘 모른다. 그곳은 태곳적 원시림이 될 수도 있고, 어린 왕자가 살고 있는 우주 공간의 작은 별나라 일 수도 있고, 혹은 어둡고 으스스한 고대 이집트 파라오의 왕궁 같은 무덤 속 이 될지도 모르겠다.

    

   <인류 최초의 키스> (2023)는 두 개의 캔버스에 각각 그려진 두 마리 뱀을 좌우로 나란히 배치한 작품이다. 짙은 녹색 심연의 배경을 뒤로한 채,  화려한 금박 무늬를 지니고 있는 선명한 하늘색 뱀 두 마리가 저만치 거리를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인류 최초의 키스'라는 이 그림의 제목은 성경에 나오는 인류 창조와 원죄, 타락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뱀들이 가지고 있는 날카로운 다이아몬드 형태의 눈동자는 그들의 접근이 결코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 준다. 인류 최초의 여자 하와에게 다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도록 유혹하는 이들 뱀의 역할 수행은 꽤나 성공적인 것이었다. 그 사건 이후로 연약한 인간의 운명과 역사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간교하고 지혜로운 뱀의 유혹에 여인 하와는 심한 내적 동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래. 일단 먹어보자. 내가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데 뭘 주저하는 거야?'

    '아니야,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유일한 열매인데.... 아... 어떡하지?'

드라마 속 주인공이 공존하는 두 가지 생각을 가지고 갈등을 일으키는 상황이 하와에게도 똑같이 생기지 않았을까? 결국, 열매를 받아먹는 하와의 잘못된 선택은 인류 전체를 멸망으로 이끌게 된다.

    안 작가 그림 속 두 마리 뱀의 화려한 금박 무늬는 우리 시선을 끌어당기며 손으로 직접 한 번 만져보고 싶게 만든다. 뱀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금박 가루들은 짙은 초록 공간에 흩뿌려져 아름다운 밤하늘을 수놓는 별빛 가루가 된다.

    그림 속 태초의 공간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안 작가의 뱀들은 작가 스스로 인생의 근원과 자신의 내면에 대한 질문들을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꽤 효과적인 힌트가 되어 준다.

<인류 최초의 키스> , 2023, 캔버스에 아크릴, 금박

   


     처음 <날 삼킨 보아>라는 그림을 보았을 때, 안 작가의 그림이 단순하고 간결한 추상적 형태로 바뀌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다. 반복적인 단순화의 과정을 거쳐서 사물의 본질적 형태를 찾아낸 유영국 화가의 추상화들이 살짝 겹쳐 보이기도 했다.

   안 작가에게 물어보았다. 그림이 추상적 형태로 바뀐 이유가 혹시 있냐고. 이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생략을 통해 집중할 수 있었고, 오히려 본질에 가까워져서요."

    내가 예상했던 대답과 너무나 유사한 그의 답변에 그가 자신의 그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작업하고 있음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추상화가 (요즘은 추상화보다는 비구상회화라는 말을 더 많이 쓴다)들의 경우에도 그들의 작업 초기에는 구상화로 시작한 작가들이 대부분이다. 그림을 그려가면서 점차 그림 속 대상의 형태를 단순화하고, 생략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그림은 자연스럽게 비구상적 형태로 변화한다.  선명하고 정확하게 묘사된 만화 속 주인공 같았던 안 작가의 뱀들은 어느샌가 스르르 모습을 감추고, 이제는 우리로 하여금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들을 찾기 위해 자세히 그림을 들여다보게 만들고 있다.


<날 삼킨 보아> 시리즈, 2024, 캔버스에 아크릴, 공업용 퍼티

    

    '날 삼킨 보아'라는 그림의 제목에 등장하는 보아라는 이름과 무엇인지 바로 알기 어려운 그림 속 뱀의 형태는 동화 <어린 왕자> 속 비행사의 보아뱀 그림 이야기를 생각나게 해 준다. 어린 왕자 동화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어릴 적 화가가 꿈이었던 비행사가 6살 때 그린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그림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마음으로 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어른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린 왕자는 한눈에 보아뱀이라는 것을 알아냈다는 이야기를 여러분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정말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교훈을 알려줬던 어린 왕자의 보아뱀 그림 이야기가 안 작가의 보아뱀 그림에도 적용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외형적인 것과 외면을 중요시하는 우리의 관점과 가치관을 내적인 것, 내면에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작가의 보아뱀들은 우리에게 환기시켜 준다.

    <날 삼킨 보아> 시리즈에서 보아뱀은 자신을 길러 준 주인을 삼켜버렸다. 보아뱀은 배고픔의 본능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고, 그만 주인을 통째로 먹어버린다. 잠시 동안의 포만감은 뱀에게 짧은 행복감을 선사했지만, 곧 이어지는 기나긴 외로움과 후회, 고통의 시간은 어리석은 뱀 스스로 겪어내야 하는 형벌이 되고 만다.  공업용 퍼티가 만들어내는 독특하고 투박한 질감은 보아뱀의 몸 위에 주홍글씨 같은 낙인을 찍어내며 새로운 재료의 실험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날 삼킨 보아> 시리즈, 2024, 캔버스에 아크릴, 공업용 퍼티

   

    안 작가는 말한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저기 뱃속에 사람이 누워있어요.

      상상을 가지고 보면 보여요. 그리고 주인을 삼킨 보아뱀의 슬픔도 보여요."


    작가는 대상에 대해 알고 싶고, 대상에 대한 애정이 있다면, 멀리서 보지 말고 가까이 들여다보라고 조언한다.

    미술관에 가서 좋아하는 작가의 그림을 만나면, 앞에까지 쪼르르 달려가서 세세히 들여다보는 나에게 그의 말은 너무나 당연하게 이해되는 그런 것이었다. 길 가다 마주치는 자그마한 들꽃도 애정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그것에 대해 뜻밖의 많은 것들을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아포피스>, 2024, 캔버스에 아크릴, 공업용 퍼티

    이번엔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에서 잠자고 있는 신화 속 뱀 아포피스를 만나러 가보자. 아포피스는 이집트 신화에 등장하는 거대한 독사이다. 맹독을 가지고 이집트 태양신 라(Ra)를 공격하는 영혼의 포식자, 혼돈의 군주, 대반역자가 바로 아포피스이다. 혼돈과 파괴의 궁극적 형태로서, 절대적인 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아포피스는 혼돈과 파괴의 신이자 태양빛을 삼키는 어둠의 힘으로서,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고 서로 등을 돌리게 해 혼돈과 갈등, 고독의 상황을 만들어낸다. <인류 최초의 키스>에서 인간의 근원적인 악함과 죄성에 대해 탐구했던 작가는 이제 고대 이집트 시대의 근본적인 혼돈과 파괴의 상징인 아포피스를 자신의 그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아포피스의 사악함을 생생하게 느낄 수 없게 뱀의 몸체 중간 부분만을 잘라서 클로즈업시켜 묘사하였다. 공업용 퍼티의 질박하고 거친 질감과 뱀의 몸을 바탕과 구분 짓는 굵은 검은색 테투리는 아포피스에 대한 공포감보다는 먼저 무엇을 그린 것일까에 대한 호기심을 강하게 느끼게 한다.


    친구의 집을 찾아 길을 떠났던 안 작가의 뱀들이 이제는 인간의 내면과 근원적 본성에 대한 탐구의 매개체로서 그의 그림에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색의 단순한 형태로 그려진 뱀들은 우리의 '대충 쳐다보는 시선'이 아닌, '세밀히 들여다보는 관찰'을 요구한다. '몸의 눈으로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닌, '마음의 눈으로 꼼꼼히 읽어내는' 것이 그의 그림을 보고, 읽어내는데 필요한 감상법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나태주 시인의 시구처럼, 안 작가의 뱀에게 여유 있고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주는 것도 바쁜 현실을 벗어나 잠시 또 다른 세계로 떠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니키 드 생 팔 Niki de Saint Phall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