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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히 Jun 26. 2024

민족의 영산(靈山), 백두산에 가다(6)

빗속의 서파 1,442개의 계단

  알람을 듣고 눈을 떴다. 네 시인데, 대낮처럼 날이 환했다. 한국은 요즘 5시경에 해가 뜨는데, 여기는 무려 약 1시간이나 더 이르다. 하늘은 거짓말처럼 화창했다. 어제 그렇게 쏟아지던 비는 온 데 간 데 사라졌다. 다행이었다.

  '맑은 천지를 볼 수 있을까?'

  침대에서 늘어져 뒹굴다, 느지막이 일어났다. 호텔 창문 너머로 공원이 보였다. 푸른 녹음이 아름다웠다. 이른 새벽부터 관광객들이 분주히 오갔다. 모두 어르신들이었다. 감탄스러웠다.

  "세상에, 참 부지런하기도 하시지! 잠이 없으시네."

  "조식 먹기 전에, 나가서 호텔 주변 구경하려고."

다랑이 혼자 길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어, 나도 갈래!"

재빨리 그를 따라나섰다.

  1층 로비를 지나는데, 식당 앞에 구름 같은 군중이 모여 있었다. 긴 대기줄을 보고, 그만 까무러치고 말았다. 시계를 보니 고작 5시 40분, 식사 시간 한참 전이었다.

  "세상에, 당장 줄 서야 겨우 밥 먹겠는걸?"

  귀남 오빠에게 연락해 식사하러 어서 내려오라고 전했으나, 그는 사양했다.

  "기다릴 자신이 없네. 그냥 너희들끼리 밥 먹어!"

결국, 귀남 오빠는 끼니를 거른 채 하루를 시작했다. 그는 매점에서 간식을 산 모양인데, 하필이면 맛없는 과자를 샀다.

  "초코파이 수박맛이야."

  "엑, 그거 맛없어요!"

  "그래? 괜찮던데."

  출발 시간은 7시였으나, 도저히 그 시간까지 준비할 수 없었다. 식사를 마치자 6시 50분이었기 때문이다. 방한복을 입고, 양치와 화장을 마치니 7시 30분이었다.

  "늦어서 죄송해요."

  작은 목소리로 조용히 인사하고, 전세 버스에 탑승했다. 모두 자리에 앉아 꼴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숙소에서 서파까지 전세 버스를 타고 긴 시간을 달렸다. 내려서 걷고, 관광하는 시간보다 오히려 이동하는 시간이 더 길었다. 두 시간가량 달려서 이제 다 왔나 싶었으나, 아니었다. 드라마 <부부의 세계>를 시청하느라, 다행히 지루하진 않았다. 

  국립공원에 도착해 입구에서 여권과 중국 비자를 맡기고, 한참 줄 서서 기다렸다. 외국인들 뿐만 아니라, 내국인들도 많았다. 토요일이었다. 국립공원 버스에 탑승했다. 산길이 가파르고, 굴곡이 많아 안전을 위해 내내 안전띠를 착용했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르면, 10시경에 소식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하늘은 여전히 맑았다. 

  '제발, 일기 예보가 빗나가기를...... 천지를 꼭 보고 싶다고!'

  아니나 다를까, 고지대로 오를수록 하늘이 우중충했다. 비구름이 자욱해서,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다행히 가방 안에는 미리 준비한 우비가 있었다. 우비를 걸친 채, 버스에서 하차했다.

  '휴, 망했네......'

착잡했으나, 여기까지 왔으니 돌아갈 순 없었다. 정상까지 꾸역꾸역 걷는 방법 외엔 달리 생각나지 않았다. 등산객들이 많았다. 가이드가 화장실에 다녀오라고 했으나, 가지 않았다. 다랑은 서둘러 화장실에 다녀왔다. 

  "화장실에 다녀오지 그래요? 정상엔 화장실 없어요. 추워서, 소변 마려울 걸요?"

가이드의 조언을 듣고 잠시 망설였으나, 귀찮아서 가기 싫었다. 결국, 화장실에 들르지 않고 그냥 이동했다. 가이드는 1시간 후에 집합하자고 말했다.

  눈이 조금 쌓여 있었고, 지저분했다. 소박한 꽃 군락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처음 보는 꽃이었다. 무슨 꽃일까, 궁금했는데 마침 대화 소리가 들렸다.


등산객(남): 이 꽃은 뭐야?

등산객(여): 어, 만병초인 것 같아.

등산객(남): 글쎄, 아닌 것 같은데?

등산객(여): 맞다니깐!


  꽃은 키가 작고, 연한 노란색을 띠었다. 마치 진달래와 비슷하게 생겼다. 비바람에 시달리면서 꿋꿋하게 핀 모습이 가여웠다. 궂은 날씨에 등산 중인 처량한 내 신세와도 닮아 있었다. 나중에 꽃이름을 검색하니, 만병초였다. 과연, 여자 등산객의 말이 맞았다.    

  노약자들은 가마를 타고 편히 계단을 올랐다. 가마를 탄 연로한 노인들과 곤히 자고 있는 유아를 만났다.

  '어린 나이에 벌써 백두산을 오다니, 부모덕에 호강하네!'

  가마꾼들은 지쳤는지, 기진맥진했다. 무거운 가마를 들고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려니, 한없이 애달팠다.

  '빈손으로 올라도 힘든데, 사람을 들고 가려니 얼마나 힘들어! 죽을 맛이겠군......' 

  뒤돌아 보니, 저 멀리 귀남 오빠가 보였다. 그는 며칠 전부터 걱정했다.

  "1,442개 계단 못 오르면, 어쩌지? 등산 안 한 지 오래됐는데."

  "어르신들도 다 오르는걸요. 괜찮을 거예요."

  계단에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100, 500, 1000,..... 대체 언제 도착하냐,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마침내, 1,442에 다다랐다. 드디어 백두산 정상, 천지에 도착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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