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어떻게 지내시는지 알 방법이 없어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이 편지가 제대로 보내질지 모르겠어요. 들려오는 소식이 없으니 잘 지내고 계신 거라 믿고 있습니다.
날이 좋습니다. 꽃도 많이 피고 옷차림도 가벼워졌어요. 사람들도, 거리에도 활기가 느껴집니다. 사월이 지나면 곧 더워지겠지요.
그러고 보니 딱 이맘때였던 거 같습니다. 멋모르던 신입생 시절, 저는 그저 제가 다니고 싶던 학교에 왔다는 것이 기뻤어요. 그래서 학교 주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구경하기 바빴지요. 낯선 동네를 산책한다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동네는 제가 어린 시절 살았던 동네와 비슷해서 더 정감이 갔어요. 낮은 건물들과 골목골목 숨어있던 작은 가게들, 열심히 돌아가고 있던 이발소의 삼색등, 조용히 햇빛을 받고 있던 고양이들, 화분에 담겨있던 작은 꽃들까지 다 기억이 납니다. 해질녘의 동네는 무척이나 따뜻했고 예뻤지요.
그런 저에게도 이문동은 낯설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좀 무서웠어요. 지나가면서 본 게 전부였고, 그 모습마저 출입 금지 카드가 붙어있고 거리에 쓰레기가 가득하고, 벽에 빨간색 라커로 철거 혹은 공가라고 적혀있던 모습이 으스스했거든요. ‘아직도 이런 곳이 있구나’ 싶을 정도였어요. 교과서나 옛날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곳을 들어가서 보기가 겁도 났습니다. 그런 제가 이문동에 가게 된 이유는 과제 때문이었어요. 이문동을 조사해오는 과제였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가니 무섭진 않겠다 싶었어요.
제가 이문동에 갔을 땐 이미 어느 정도 이주가 다 이뤄진 상태였습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대문엔 강제 침입, 주거 시 법적 조치를 받게 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었어요. 거리에는 쓰레기가 가득했습니다. 한참을 올라가 보니 새것으로 보이는 머리띠들이 있었어요. 그 머리띠들은 몇몇 개씩 똑같은 모양이었습니다. ‘아 머리띠를 좋아하는 아이의 집이었구나. 사랑받는 아이였겠네.’라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에, 친구가 ‘머리띠 부업하셨나 보다’라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친구의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좋아하는 머리띠라면 이리 두고 갔을 리 없었겠지요. 아니면 좋아하던 머리띠마저 두고 갔어야 했을지도 모르고요.
계속 위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맨 꼭대기 집이 나왔어요. 그 집은 대문이랄 것도 없었고 비닐로 바람을 막아두었는데, 그 옆엔 휠체어가 있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휠체어를 가지고 왔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어요. 그분은 어떤 모습으로 떠나가셨을까요. 휠체어 없이 가실 수 있었을까요?
가려진 틈 사이로, 낮은 담장 사이로 남겨진 집들을 보았는데 집 안이 모두 깨끗한 거예요. 길거리엔 쓰레기가 넘쳐났는데 말이에요. 어차피 다음 거주자가 올 것도 아니고, 굳이 힘들게 쓰레기를 집 밖으로 버리고 갔어야 했을까 싶었어요. 벽이고 지붕이고 모두 부서질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모두 집 안은 깨끗한 게 신기했어요. 어쩌면, 집을 보내주는 마지막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떠난 이의 몸을 깨끗하게 씻겨주고, 고운 옷을 입혀주는 거처럼요.
이미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고 동네의 온기와 불빛은 모두 사라진 채 가로등 몇 개만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세 네 가구였을까요, 서늘했던 동네에 몇 개의 불만 들어온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저 멀리 걸어오시던 할머니가 우리에게 뭐냐고 소리치셨죠. 우리가 조합에서 온 사람들인 줄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술학교에서 나왔습니다.’라고 하니 그제서야 우리에게 마음을 열어주셨죠. 예술학교 학생들이 우리 시위할 때 나와서 같이 시위도 하고. 촬영도 해주고. 고마웠다고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선배들일테지만 고마웠습니다. ‘왜 아직 여기 남아 계세요, 모두들 떠나서 무섭진 않으세요’라고 물었더니 여기가 내 집인데 무섭긴 뭐가 무섭냐고 대답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할머니는 정말 씩씩하셨어요.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냐고, 평생 여기서 살아왔는데 여길 떠나 어디로 가냐고 말하시던 할머니의 말, 낯선 이에게 거리낌 없이 자신의 집을 보여주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요샌 흔치 않은 나무로 된 벽과 천장, 옥색 싱크대, 먼지가 옅게 쌓인 고동색 벽시계, 전구가 하나 나가 조금 어두웠던 실내, 벽에 걸려있던 장신구들, 신발장 위에 있던 작은 식물들. 모두 할머니의 손길이 닿았을 것들이겠죠. 그 모든 것들을 챙기고 가셨을지, 두고 가셔야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 이후로 가림막이 쳐지고, 공사가 시작되고 나서는 그쪽으로 잘 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외면하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그러다 며칠 전, 어디서 공사 소리가 나고 있길래 ‘아 또 공사하나 보네’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따라가다 보니 제가 걸어 다녔던 거리가 나오더군요. 제 기억 속에 이미 많이 흐려진 곳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림막 틈 사이로 얼핏 볼 수 있었어요. 풍경이 많이 달라졌더군요. 그렇게나 높아 보이던 언덕이 사라져 있었습니다. 글쎄, 지형 하나를 뚝딱 만들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습니다. 공사장 앞에선 큰 소리가 났어요. 공사 소리 때문에 미치겠다고- 정신병 걸릴 거 같다고 말하는 주민과 공사 관계자와의 싸움이었습니다. 할머니. 도대체 누굴 위한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이지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싸움과 분노와 아픔이 부동산과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지워지는 걸까요. 짜잔- 하고 나타난 새 아파트에 들어가 행복하게 살면 그만인가요. 아파트값이 많이 오르면 그만인가요. 이 시간이 지나면 행복할 일만 남았나요.
아쉽습니다. 이문동은 분명히 공가 투성이의 쓰레기가 가득한 동네가 아니었을 텐데 말이에요. 사람 사는 소리가 들리고, 저녁이면 집집마다 음식 냄새가 나고 고양이들은 어딘가에서 햇빛을 쬐고 있고, 돌과 돌 틈 사이에 꽃이 피고 작은 가게 앞에 놓여진 의자에 사람들이 모여 앉아 이야기를 하고 함께 울고 웃었던 동네였을 텐데 그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아직도’ 이런 곳이 있구나라고 생각했던 제가 부끄럽기도 해요.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만나지 않았더라면 너무 쉽게 잊혀질 것들이었겠죠.
할머니. 잘 지내고 계실 거라 믿고 싶습니다. 처음 만났던 그 모습처럼 여전히 씩씩하게 화를 내시길 바라요. 열심히 지운다고 지울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 믿고 있습니다. 제가, 함께 갔던 친구들이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해요. 그곳은 따뜻하길 바랍니다.
22년 사월, 지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