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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쌤 Apr 04. 2023

글쓰기

국자에게 말을 건다.


1

“우리 삶이 불안정해지고 세상이 더 큰 불행으로 나아갈 때 글쓰기는 자꾸만 달아나는 나의 삶에 말 걸고, 사물의 참모습을 붙잡고, 살아 있는 것들을 살게 하고, 인간의 존엄을 사유하는 수단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_ [글쓰기의 최전선 : ‘왜’라고 묻고 ‘느낌’이 쓰게 하라] p.23



<글쓰기의 최전선 : ‘왜’라고 묻고 ‘느낌’이 쓰게 하라> 의

은유 작가의 말이 맞다.

'나의 삶에 말 걸고, 사물의 참모습을 붙잡고, 살아 있는 것들을 살게 하고, 인간의 존엄을 사유하는...'


가끔 내 삶에 내가 말을 걸어
사물의 모습을 보고 사유하게 된다.
그것이 깊든, 얕든 그렇게 사유함으로
나의 존엄에 스스로 만족하는 편이다.

내 삶에 말을 걸어 사물의 모습을 보고 사유를 한다?
뭐 이런 거다.
아이들 밥을 주려고 국을 푸다가
국자를 보고 어릴 적 달고나를 해먹다국자를 태워 혼이 났던 그 기억을 떠올리는 것.

가끔 아무렇게나 툭 튀어나온 사물에게 말을 거는 거다.



2

달고나 할아버지는

어김없이 신작로에 자리를 잡으셨다.

50원짜리 동전이라도 있어야 줄이라도 서 볼 텐데

돈이 없는 날은 거기 서서 달고나 할아버지의 기술을

구경하기도 힘들다.

돈이 없으니 기가 죽어 기웃거리지도 못하는 탓이다.

할아버지의 달고나 도구는 큰 숟가락 모양.

거기에 설탕을 두어 스푼을 넣고 기가 막힌 솜씨로 달고나를 만든다.

나는 그날도 구경은커녕 단내만 맡고 집으로 돌아왔다.

단내를 맡았으니 입이 궁금해 부엌을 기웃거리기를 반복.

삶은 고구마 따위도 없다.

가스레인지 위에 큰 솥이 있다. 그 속에 고구마가 있을까 뚜껑을 열어보려는 찰나 눈에 띈 솥 위에 걸쳐져 있던 국자.

이건 숟가락 보다 크고 냄비보다는 작으니 이건 달고나 제조 도구용으로 딱이다!

달고나 할아버지를 매우 존경한 나였으므로

달고나에 설탕과 소다가 들어간다는 사실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부엌 찬장을 뒤져 재료는 준비하였으나

문제는 불이다.

가스레인지를 사용하지 못하는 어린이였음으로

도저히 가스레인지를 켤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나는 연탄불.

연탄불이 켜져 있는 곳이 어딜까 죽어라 생각했다.

역시 사고 칠 때는 머리가 제대로 번쩍하는 법.

나는 연탄불이 누에를 기르는

큰 아버지의 잠실(_누에를 치는 방)에 있다는 것이 떠올랐고 곧장 잠실로 뛰어갔다.



3

누에는 뽕잎을 갈아먹어 살이 통통하게 올라 있었다.

잠실 뒤편에 아궁이에는 연탄불이 있었고

나는 지체 없이 작업을 시작했다.

야심 차게 시작했으나 예상대로

눈으로 보기에 쉬웠던 달고나 기술이 내게 있을 리가 없었다.

얼마나 실패를 많이 했는지 설탕은 바닥이 나고

국자는 까맣게 다 탔고

연탄불에는 설탕이 녹아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이제는 도망을 가야 한다는 느낌이 왔을 때

나는 재빠르게 그곳을 나왔으나

문제는 이 까맣게 탄 국자 다.

물에 아무리 넣어 수세미로 밀어도 탄 자국은 그대로 다.

손은 이미 벌겋게  부르텄고 수세미로 국자를 밀다 밀다

결국에는 국자 손잡이도 부러뜨렸다.

그 순간.

이제 국자가 부러졌으므로 우리 가족은 국을 못 먹게 되는구나 싶어 눈물이 났고 어린 마음에 밑에 집 상희네로 가서 국자를 가져와 버릴까도 생각했으나 정의의 사자인 내가 이 국자 하나 때문에 구차하게 도둑년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고 부엌에서 나와 마루로 나갔다.

나는 내 가방을 가지런히 해놓고

부러진 새까만 국자를 앞에 놓고

엄마에게 잘못을 빌어 볼 참으로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4

"니 여서 뭐하노? 와 우노? 와카노?"


눈물이 앞을 가려 말을 못 하고 있으니

국자 꼴을 보고는 짐작으로 엄마가 다시 말씀하셨다.


"아이고. 니도 쪽자(달고나의 경상남도 밀양지역의 방언)

해묵었드나?요새 집집마다 쪽자 해묵는다꼬 난리네!

울지 마라! 국자 그거 하나 다시 사믄 되지 울기는 와우노!

배고프다 울지 마라! 문디 국자 그기 뭐신데 우리 딸내미 눈에 눈물 빼노! 울지 마라!"


나의 국자에 대한 사유는
국자를 태워 망가뜨렸음에도 불구하고
혼내지 않고 웃어 주었던 우리 엄마의 따스함에

어른이 된 지금의 나에게 이렇게 문득 높은 자존감을 선물하기도 하는 그런 거다.



5
큰 아이가 나에게 말한다.


"엄마! 엄마 어릴 적에는 국자에다 달고나를 만들어 드셨다면서요? 다시 이야기해 주세요!"


이렇게 나의 사유는 나의 아이들에게까지 옮겨져 어느새

얘깃거리를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소통의 행위들이 바로 살아있는 것들을

살아있게 하는 게 아닐까.
국자를 보며 사유만
했다면 추억 떠올리기 정도만 되었을 테지만 그것을

글로 쓰기에 이것이
결국에는 나의 삶에 말 걸고,
사물의 참모습을 붙잡고,
살아 있는 것들을 살게 하고,
인간의 존엄을 사유하는
그럴듯한 행위로 완성되는 것이다.


글쓰기를 한다는 것.

그것은 내게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주는 선물.

인간의 존엄을 사유하는 수단이다.



사진출처 _ 네이버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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